연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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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말대 왕''' | |||
성 | 희(姬) | ||
휘 | 희(喜) | ||
아버지 | 연효왕(燕孝王)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22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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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燕)나라 제43대 국군이자 마지막 왕. 연효왕의 아들. 형가(荊軻)에게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도록 시킨 것으로 유명한 태자 단(丹)의 아버지.동주 열왕 희희(姬喜)와 휘가 같다.
2. 생애
연왕 희 4년(기원전 251년), 연왕 희는 상국 율복의 말에 따라 조(趙)나라의 왕인 효성왕(孝成王)에게 500금을 보내 만수무강을 빌었다. 하지만 율복으로부터 조나라가 장평대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장성한 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므로 이때 조나라를 공격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조나라를 침공하기로 했다. 연나라와 조나라를 오가는 객경이자 제-연 전쟁의 영웅이었던 악의의 아들로 창국군에 봉해져 있었던 악간에게 조나라를 칠 뜻을 말하니 악간은 반대했지만 연왕 희는 그 말을 씹고 기어코 조나라를 쳤다. 송자에서 조나라의 명장 염파가 조나라 침공을 간언했던 율복을 죽였고, 악승이 대에서 경진을 포로로 잡으며 연나라군을 대파했다.연왕 희 5년(기원전 250년), 연나라군은 패배해 수도인 계성까지 포위되어 조나라에 강화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결국 조나라의 요구대로 조나라 공격을 반대했던 대부 장거를 보냈다. 이때 조나라가 장거를 상국으로 세우라고 강압하니 그대로 실천해 간신히 화친이 이뤄졌다. 조나라 침공을 반대했던 창국군 악간이 조나라로 도망가자 연왕 희가 악간에게 사죄의 서신을 보냈지만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원망한 악간으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했다.
연왕 희 8년(기원전 247년), 조나라와 연나라는 땅을 교환했는데, 연나라는 용태, 분문, 임락을, 조나라는 갈, 무양, 평시를 얻었다.
연왕 희 12년(기원전 243년), 조나라가 수차례 진(秦)나라의 침략을 받으면서 조왕이 방난을 대장으로 삼는 것을 보고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극신에게 물었는데, 극신이 방난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자 극신을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조나라에서 대장 이목(李牧)을 보내 연나라를 치니 무수와 방성을 빼앗겼다. 이때 방난과 극신이 싸워 극신이 사망했다.[1]
연왕 희 13년(기원전 242년), 연나라에서 태자 단(丹)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이때 진나라의 권신이었던 여불위(呂不韋)가 장당(長唐)을 연나라의 상국으로 삼고, 연나라와 합세하여 조나라를 동•서에서 협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당은 연나라로 가지 않았고,[2] 감라에게 설득당한 도양왕이 진나라에게 5개 성읍을 주자 진나라와 조나라가 합세해 연나라의 상곡 36개 현을 빼앗아 나눠 갖었다.
연왕 희 19년(기원전 236년), 진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하자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이(貍)와 양성(陽城)을 빼앗았다. 연왕 희는 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는데, 연나라의 사신이 조나라 땅을 지나가자 억류되었다. 그러나 사신이 도양왕을 설득해 풀려났으며, 진나라에게 '조나라가 연나라를 병합하게 하면 오히려 두 나라가 합세해 다시는 진나라의 명을 듣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자 진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조나라의 업(鄴)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로써 연나라는 구원받았다.
연왕 희 23년(기원전 232년), 태자 단(太子丹)이 진(秦)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연나라로 돌아왔다.
연왕 희 27년(기원전 228년), 진나라가 조유류왕(趙幽繆王)을 사로잡아 조나라를 멸망시키니 태자 조가가 옛 대(代)나라 땅에 가서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대왕 가(代王嘉)이다.[3] 이에 진나라와 연나라가 경계를 맞대게 되었다.[4] 이런 긴급한 위기 상황에서 백척간두의 위협을 느낀 태자 단은 형가에게 독항 땅의 지도를 주며, 진시황 영정을 척살하게 했으나 실패해 형가는 처형[5]되었고, 진시황은 격노해 왕전(王翦)을 시켜 연나라를 치도록 했다.
연왕 희 29년(기원전 226년), 진나라가 연나라의 수도인 계를 10개월 만에 함락시키니 연왕 희는 요동[6]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거기서 대왕 가의 조언을 듣고, 시황제 암살을 주도한 태자 단의 머리를 베어 그것을 진나라에 바치니 잠시 공격이 늦춰졌다. 여담으로 이 장소에 훗날 고구려의 백암성이 세워졌다. 또한 그 근처를 흐르는 강인 태자하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연왕 희 33년(기원전 222년), 진나라가 요동을 빼앗고 연왕 희를 사로잡아 연나라가 수백년만에 멸망했고, 조나라의 부흥운동 세력인 대나라도 같은 시기에 멸망했다.
[1] 극신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연소양왕 때 등용된 장수였다.[2] 연나라로 가려면 조나라 땅을 거쳐야 하는데, 조나라에서 장당에게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이었다.[3] 원래 조유류왕은 조도양왕의 서자였고, 대왕 가는 적자에 태자였으나 도양왕이 유류왕의 어머니인 창후를 총애했기 때문에 유류왕이 도양왕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4] 소진(蘇秦)이 연후문공에게 말한대로 조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한 것인데, 그 조나라가 일거에 멸망해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5] 사실 처형이라고 하기도 껄끄러운 게, 첫 칼질이 실패해 진시황과 옥좌에서 1:1 캐삭빵을 하다가 진시황이 직접 뽑아 휘두른 칼에 맞아 죽었다.[6] 《열국지》에 의하면 무려 평양까지 달아났다고 나오나, 실제 평양을 잠시나마 차지한 것은 한무제 이후의 일이니 《열국지》 작가의 착오로 보여진다. 실제 고조선과 연나라의 관계 및 몇 세대 전에 연나라가 고조선의 영토를 차지한 일을 생각하면 고조선이 연왕 희를 진나라로 보내는 것이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먼 훗날 고구려의 고국원왕에게 굴욕을 안겨 주었던 모용선비부의 전연이 멸망한 뒤에 전연의 모용씨 황족들이 고구려로 망명했는데 고구려는 이 피신한 전연의 황족들을 저족의 전진으로 내보내며 한맺힌 복수를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