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에른스트 헤르만 판 라파르드 Ernst Herman van Rappard | |
| |
본명 | 에른스트 헤르만 리데르 판 라파르드 Ernst Herman Ridder van Rappard |
출생 | 1899년 10월 30일 |
네덜란드령 동인도 바니유마스 | |
사망 | 1953년 1월 11일 (향년 53세) |
네덜란드 부그트 | |
국적 |
(1899~1945) -> 무국적 (1945~) |
가족 | 오스카 에밀 반 라파드 (아버지) 디나 탈 라르센 (어머니) 마리 요한나 니체 (배우자) |
학력 | 라이덴 국립대학교 (법학) 뮌헨 대학교 (경제학 / 석사) 빈 대학교 (정치학 / 박사) |
직업 | 정치인, 군인 |
종교 | 개신교 (루터교) |
소속 | 국가사회주의 네덜란드 노동자당 친위대 |
참전 | 서부전선 독소전쟁 |
최종계급 | 상급돌격지도자(Obersturmführer) |
1. 개요
네덜란드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며 국가사회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2. 생애
에른스트 판 라파르트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네 형제 중 차남이었다. 그의 조부와 부친 모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직업을 가졌기에, 그는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수마트라의 메단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911년에 더 나은 교육을 위해 네덜란드로 보내졌다. 그는 헤이그의 HBS(중등학교)를 다녔으며, 국가시험 B를 통과한 뒤, 1921년 12월 7일에 라이덴 국립대학교 법학과에 등록하였다. 형의 복무로 인해 군 복무는 면제되었다.1923년 2월 16일에 예비시험을 통과한 후, 그는 해외로 떠났다. 복음 루터교회 신자로서 그는 독일에 인맥이 있었으며, 베를린, 뮌헨, 빈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27년에 뮌헨에서 경제학 석사시험에 합격하였고, 1930년에는 빈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오트마어 슈판의 강의를 들었으며, 슈판은 판 라파르트가 조합주의 사상에 눈뜨게 했다고 스스로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자들과도 접촉하였는데,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독일 합병을 열망하였다. 독일에서는 나치의 당원들과 인맥을 형성하였고, 1930년에 네덜란드로 돌아온 후에도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그는 아버지의 재정 지원 덕분에 정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의 독일인 친구들은 그에게 네덜란드에서도 독일의 나치당에 상응하는 정당을 창당할 것을 권유하였다. 1931년 12월 16일,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안톤 뮈세르트에 의해 창립된 지 이틀 뒤, 판 라파르트는 아달베르트 스밋, 알베르트 판 바터란트와 함께 국가사회주의 네덜란드 노동자당을 창당하였다. 그는 당 서기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몇 달 후, 판 라파르트와 판 바터란트는 스밋과 결별했고, 판 바터란트가 이끌던 암스테르담 지부 대부분을 데려갔다. 판 라파르트는 곧 판 바터란트와도 당 지도권 및 안슐루스 주장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하게 되었고, 결국 각자의 NSNAP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로써 기존 스밋의 NSNAP 외에 또 다른 두 NSNAP이 생겨났다.
1932년 12월부터는 당 기관지 『국가사회주의자』를 단독 편집하며 여러 팸플릿을 통해 독일과의 합병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의 구호는 “저지 독일인, 다시 독일인(Neder-Duitsch, Weder Duitsch)”이었다. 그의 외할머니와 외증조모가 인도네시아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이 동일한 게르만 인종에 속한다는 주장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논거였다. 그는 독일 제국처럼 네덜란드에서도 유대인의 영향력이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33년, 그는 드레스덴에서 부모의 전 하녀였던 여성과 결혼하였다. 측근 몇몇은 그의 부인이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실상 배후에서 당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판 라파르트는 자신의 NSNAP을 히틀러의 정당처럼 만들려 했지만, 그의 독일인 동지들은 그를 유능한 지도자로 보지 않았다. 동시에 보다 조심스럽고 네덜란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NSB와의 경쟁도 치열하였다. 그의 형 오스카르는 NSB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판 라파르트는 NSB처럼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주목을 덜 받게 되었다. 대신 그는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과의 소란스러운 집회와 충돌에 의존하였다. 1934년 한 집회에서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그는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아른험에 거주하며 최대 지지를 받았고, 1939년까지는 암스테르담에 살았다. 1938년과 1939년에 각각 제복 착용 금지법 위반으로 벌금과 일주일의 구금형을 선고받았다.
1938년 9월, NSNAP-판 라파르트 당원도 공무원 금지 조치 대상에 포함되었으며, 1939년 5월 말에는 니메헌에서의 집회가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1939년 6월 16일, 당원이 500명 남짓 남은 가운데 당을 공식 해산하였다. 그러나 많은 당원들은 독일에서 근무하거나 국경 지역(헬데를란트, 림뷔르흐)에 거주하며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갔다. 두 주 후, 그는 부인과 함께 독일로 이주하여 뒤셀도르프의 민족독일연맹(Bund für Deutschtum im Ausland)에서 일하게 되었다. 1938년 7월 부친 사망 이후 그의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다. 이 나치 기관은 독일 접경의 ‘게르만계’ 국가들의 병합을 지향하였으며, 그는 주로 네덜란드 신문 기사를 번역하였다.
1939년 11월, 그는 독일군의 특수부대 플레크 부대(Einheit Fleck)에 입대하여, 마스트리흐트 다리 공격 등 네덜란드 침공 준비를 비밀리에 진행했다. 그러나 1940년 2월, 자신이 네덜란드 군복을 입고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군을 떠났으며, 이는 양심의 문제였다고 해명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네덜란드 당국에 독일의 침공 계획을 알리지는 않았다.
독일의 침공 이후 그는 네덜란드로 귀국하였으며, 점령군의 재정 지원을 받아 정당을 재건했다. 1940년 6월 15일에는 새 정당 기관지 『새로운 국민』의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NSB 등 경쟁 정당과의 치열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두었고, 전국 각지에 당사가 세워졌다. 판 라파르트도 NSB처럼 위트레흐트에 본부를 두었다. 1940년 10월 작성된 당 강령에 따르면 여전히 가장 중요한 목표는 네덜란드인의 독일 혈통과 국민적 단일성에 대한 재인식, 그리고 네덜란드인과 제국 독일인의 민족통일을 통해 이루는 국가사회주의의 실현이었다.
NSNAP는 NSB를 향한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양측의 충돌은 물리적 충돌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점령군은 이를 묵인하였고, 이는 무서르트의 NSB가 더욱 친독적으로 변하게끔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SA는 반유대 폭동에도 자주 참여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 NSB는 노골적으로 동부전선 참전을 지지했고, 이 시점부터 NSNAP의 존재 가치는 거의 사라졌다. 같은 해 3월,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슈츠슈타펠에 입대하였다.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SS부대 내 NSNAP 독립 부서를 창설하려는 희망을 품었다.
베를린에서의 신병 훈련 후, 그는 1941년 4월, 제1SS기갑사단의 상사(Oberscharführer) 계급으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실전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6월 중순 귀국한 그는 NSB와의 통합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1941년 9월, 판 라파르트와 무서르트 지지자 간의 격렬한 충돌 이후, 베를린에서 제국판무관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의 제안으로 NSNAP은 NSB에 흡수되도록 강제되었고, 9월 27일부로 판 라파르트는 모든 당 활동을 중단하였다. 『새로운 국민』도 같은 시기 발간을 중단하였다. 12월 14일, 자이스잉크바르트는 NSB만이 유일한 정당이 될 것이라 발표하였고, 판 라파르트는 자신과 지지자들에게 NSB 가입을 권유하며 솔선수범하였다. 그는 NSB에서 어떤 직위도 맡지 않았다.
1942년 4월 15일, 그는 다시 슈츠슈타펠에 입대하였다. 이후 라돌프첼에서 하사관 훈련을 받고, 1942년 7월부터 10월까지는 5 SS기갑사단 소속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복무하였으며, 부상 후 네덜란드로 귀환하였다. 회복 후 그는 1943년 1월, SS본부 베를린에 배치되었지만, NSB에 대한 그의 비판적 과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장교 훈련을 받은 후, 그는 소위(Untersturmführer) 계급으로 SS연대 데 루이터의 전령으로서 동부전선에서 복무하였다. 1944년 8월, 그는 에스토니아의 나르바 전투에 참여하였고, 퇴각 중 중병을 앓게 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 그는 2급 철십자훈장, 부상훈장, 돌격훈장을 수여받았다.
회복 후 그는 1944년 12월, 아펠도른의 34 SS의용척탄병사단 란트슈투름 네델르란트에 중위(Obersturmführer) 계급으로 배속되었다. 부슴에서는 중대장 훈련도 받았다. 1945년 4월에는 벨프와 보더흐라펀에서 지역 사령관으로 근무하며 비교적 올바른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1945년 5월 18일, 도른에서 캐나다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유트레흐트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1947년부터는 스헤베닝언에 이감되었다. 1949년 3월 28일, 헤이그의 특별법원은 그를 반역죄로 사형에 처했다. 그는 1940년 5월 항복 후 네덜란드가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늘 조국을 위한 행동을 했다고 항변하였다.
상급심에서는 1950년 1월 11일, 헤이그의 특별 대법원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재판부는 그가 실질적인 판단력이 결여된 이상주의자였으며, 그의 네덜란드 안슐루스 주장은 네덜란드 국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점령군에게조차 쓸모없는 인물로 전락했다는 점을 참작 사유로 들었다. 1950년 6월부터 1951년 12월 초까지 그는 레우와르던 교도소, 이후 브레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53년 초, 푸흐트의 중앙 교정 병원에서 52세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3. 서훈 내역
4. 여담
- 판 라파르트는 내성적이고 고립적인, 전형적인 책상물림 학자형 인물로 보였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했고, 말도 느릿하고 서툴렀다. 그의 우유부단하고 비외교적인 태도는 무서르트 같은 경쟁자와의 협력 기회를 잃게 했다. 그는 스스로 리더십과 조직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개인적 야망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군 복무를 통해 실제로 목숨을 걸며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