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양동근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2. 프로 입문과 신인상
삼선중 졸업 후 연계 학교인 경복고가 아닌 용산고를 택했고 졸업 후 한양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팀을 진두지휘하면서 한동안 약세를 면치 못하던 한양대 농구부의 돌풍을 주도했다.
2012년에 작고한 신임 한양대 김춘수 감독[1]은 당시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양동근[2]을 잠재력 하나만 보고 과감히 발탁하여, 그를 중심으로 팀을 짰다. 그리고 전통의 2빅맨 시스템 대신 1빅맨 3포워드 1가드 시스템의 토털농구로 팀을 쇄신한다.
이후 김성현, 김승민, 강은식, 서동용, 조성민 등을 영입하고, 2년간 담금질을 한다. 이 개혁이 대성공한 한양대는 양동근이 3학년이 되는 시점부터 대학농구 정상의 자리를 노리게 된다. 팀 성적과 함께 개인 성적도 좋아져, 3~4학년 때는 2년 연속 농구대잔치 어시스트상을 수상하여 대학농구 최고의 포인트 가드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당시엔 대학농구리그가 출범전이라 농구대잔치가 최고 권위의 대회였다.
농구대잔치에서 3학년때는 당시 대학농구 최강 연세대에게 석패했지만, 4학년때는 하승진, 김태술, 이광재, 양희종, 방성윤, 이정석, 전정규가 포진한 연세대를 격파하는 대이변을 연출한다. 이 게임을 앞두고 김춘수 감독은 강은식에게 미드레인지 슛을 연습시켜 하승진을 끌어내고 양동근이 이정석, 김태술을 융단폭격하는 전술을 써서 대박을 냈다. 물론 조성민, 김성현, 김승민, 서동용 등 김춘수가 키워낸 포워드진이 로테이션을 돌며 공격을 성공한 점도 컸다.
이처럼 한양대의 리더로 일찍부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선발된 경력에 농구대잔치에서 2년 연속 어시스트상을 수상한 양동근은 자연스레 2004년 드래프트 최대어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 때부터 믿고 쓰는 한양대 가드라는 말이 생겼다.
2004년 드래프트에서 전주 KCC 이지스에게 전체 1순위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KCC는 2003-04 시즌 도중 모비스의 센터 R.F. 바셋을 임대 영입하는 과정[3]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모비스에게 양도했고, 그 결과 형식상으로는 전주 KCC가 가진 지명권이었지만 모비스가 실질적으로 지명권을 행사해 1순위로 양동근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4]
이로써 양동근은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 당시 빅3 이외의 대학을 나온 최초의 1픽 선수가 되는 기염을 토한다. (양동근 바로 다음으로 빅3 이외 대학출신 1순위 선수는 6년이 지난 후 2010년 경희대학교 출신 박찬희다)
마침 모비스는 팀 재건을 위해 한 때 좋지 않게 헤어졌던 유재학을 파격적인 금액으로 전자랜드에서 불러 모셔오는데 성공했고,[5] 유재학 감독의 합류와 그의 지도 아래 양동근은 프로에서도 한양대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며 팀을 지휘한다. 비록 5할 승률에 미치지 못한 팀 성적이었지만, 신인 첫 해 평균 11.5점 6.1어시스트라는 준수한 기록을 내며 신인상을 타는데 성공.[6]
3. 두 번의 MVP의 영광 (2005~2007)
박수교, 최희암, 장일의 시대를 거쳐 팀의 전설들도 다 떠나고 막장으로 치달았던 모비스는 유재학 감독의 취임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 일선에는 양동근이 있었다. 그리고 모비스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크리스 윌리엄스까지 가세하면서 모비스는 하위권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돌풍을 일으키며 일약 2005-06 시즌 정규리그 우승이라는 사상 최고의 이변을 연출한다. 외국인 선수에게 따로 MVP를 주기 때문에 국내 선수 중에서 MVP 선정을 해야 하는데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한 서울 삼성 썬더스의 서장훈과 치열한 경합을 거친 끝에 결국 KBL 최초로 둘 다 MVP를 받았다.하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두 선수 모두 주역이 되지 못했다. 일단 양동근은 챔프전에서 평균 15.5득점 7.1어시스트로 분전하기는 했지만, 삼성과 치열한 접전 끝에 4전 4패로 우승에 실패했다. 높이에서 우세한 삼성이 예상과는 다르게 강혁과 네이트 존슨의 픽 & 롤을 들고 나오면서 모비스가 완전히 말린 것. 그 결과 정규시즌과 다르게 서장훈도 조연에 그쳤다.[7] 최종 스코어만 보면 경기 내용도 일방적일 거라고 오해하기 쉽겠지만 경기 내용은 그리 일방적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승리를 거둔 건 삼성이었지만...
그러나 양동근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2006-07 시즌에 다시 팀의 정규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한다. 전 시즌에 비해 훨씬 향상된 성적을 거두며, 전년도에 팀빨로 수상했다는 비평을 말끔히 씻어낸 것. 평균 15.7득점, 5.9 어시스트, 1.9스틸로 더 향상된 기량을 선보이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부산 KTF 매직윙스와의 7차전까지 가는 챔프전 접전에서 평균 19.1점 7.3어시스트 3.4리바운드 평균 39분을 뛰는 맹활약으로 팀의 두 번째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기자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KBL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에는 대학 시절 동기였던 연인과 결혼까지 골인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최고의 시간을 보낸 양동근에게 찾아온 것은 바로 입대 영장이었다(…).
4. 상무 (2007~2009)
병역 특례의 유일한 기회였던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대표팀은 사상 처음으로 8강에도 못 들면서 탈락, 꼼짝없이 군 입대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히 신체 건강한 양동근은 신혼의 달콤한 꿈도 뒤로 하고 2007년 5월 상무에 입대하게 되었다.[8]그리고 상무에서 2007년 12월 오른쪽 발목 연골 재생수술을 받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재활에 쓰게 되었다. 기사 이 수술 이후로는 농구화 깔창을 특수 제작해서 사용했다. 재활 후, 농구대잔치에서 우승을 하고 무사히 전역했다.
5. 전역 이후 (2009~2012)
복귀 첫 시즌에는 신인 시절과 같은 성적을 냈다. 이 때 모비스의 국내 선수 1옵션은 3년차인 함지훈으로, 함지훈 위주로 팀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양동근이 합류한 2009-10 시즌에는 전년도와 달리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모두 우승에 성공했다.그리고 2010-11 시즌, 양동근은 예년 MVP 시즌 때의 모습을 되찾았다. KBL 무대에서 양동근의 돌파와 패스는 잘 먹혀 들어갔다. 생애 최다인 16.5득점을 기록하며 맹활약. 다만 모비스는 함지훈의 입대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얇은 선수층의 한계도 극복하지 못했다. 덕분에 양동근 혼자 죽어라 뛰고 달리는 지경이었고, 팀 성적도 하위권에 머물렀다.
2011-12 시즌도 마찬가지로 가드진의 지원이 미비한 상황에서 양동근 혼자 죽어라 슛 쏘고 패스하면서 혼자 백코트진을 책임졌다. 외국인 선수 테렌스 레더와 상무에서 제대하고 시즌 후반 합류한 함지훈의 활약을 바탕으로 플레이오프 4강까지는 올랐지만 당시 극강이던 동부산성을 넘지 못하고 3:1로 패배. 그럼에도 유재학 감독은 '(양동근이) 정말 고생했다'며 미안해했고, 안티가 없는 선수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6. 모비스 왕조의 주역 (2012~2016)
2012-13 시즌에는 혼혈 귀화선수 문태영과 신인 드래프트 1순위 김시래의 합류로 모비스 공격의 롤은 예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덕분에 데뷔 이후 가장 낮은 스탯을 기록 중이지만, 팀에서의 중심점 역할과 상대 가드진을 봉쇄하는 앞선 수비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평. 정규시즌 2위에 이어 서울 SK 나이츠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1차전 역전 3점포 및 4차전 28득점의 신들린 활약으로 본인 선수 인생의 두번째 만장일치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하였다.2013 FIBA 아시아 남자농구 선수권에서는 수비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 특히 3/4위전에서는 다시 한번 뛰어난 수비력을 발휘해 한국이 2014 FIBA 농구 월드컵으로 나가는데 큰 공을 세웠다. 뒤이어 열린 아시안 게임 이란과의 결승에서도 패색이 짙어지던 4쿼터 중후반, 추격의 3점슛과 수비, 김종규가 성공시킨 결정적인 앤드원을 어시스트하며 마무리했다.
2014-15 시즌 초반에는 아시안 게임 등 비시즌 강행군 여파 때문인지 양동근의 농구인생 중 가장 부진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1라운드 3점슛 성공률이 14%에 머무르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여주며 그동안 두 자리수를 사수하던 평균 득점도 한 자리수로 추락했다. 1라운드는 역대 최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양동근도 노쇠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라운드부터 갑자기 슛 성공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며 2라운드 9경기 만에 3점슛 성공률을 40%까지 끌어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2014-15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창원 LG 세이커스를 상대로 양우섭의 뛰어난 맨마킹 수비를 극복하고 5경기 평균 18득점의 활약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결승에서는 정규리그 2위였던 원주 동부 프로미를 맞아 4경기 평균 20득점 4.8리바운드 4.8어시스트로 모비스의 4:0 완승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기자단 투표에서 64표 중 60표를 받아 챔피언결정전 MVP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정규리그 우승 4회, 정규리그 MVP 3회, 플레이오프 우승 5회, 챔피언결정전 MVP 3회 등 KBL 출범 이래 가장 뛰어난 커리어를 보유한 리빙 레전드로 등극했다.
2015 FIBA 아시아 남자농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모습을 보였다. 특히 레바논과의 경기에서 후반전에 완전히 폭발하여 18득점 6리바운드 8어시스트 8스틸로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박찬희가 부상으로 결장하고 김태술이 극도의 부진을 보인 탓에 출전 시간 관리를 받지 못했고 결국 조대결에서 중국에게 패배, 8강에서 이란과 맞붙어 패배하며 당초 목적이던 4위권 진입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대회를 통해 양동근은 농구팬들로부터 재조명 받게 된다. 그동안 국제대회서 비교적 준수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성적에 묻혀 국내용이라고 까였던 양동근이었지만, 이번 대회서만큼은 홀로 빛났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동근은 평균득점 12.7점 어시스트 4.7개 리바운드 3.6개 스틸 2.4개를 기록하며 전방위적인 활약을 하였다.[9] 효율성 지수를 나타내는 PER 역시 17.4를 기록하며 전체 대회 7위 가드 1위에 올랐고 대한민국 팀내에서도 1위를 기록하였다. 한국 나이 35세의 선수가 사실상 팀의 에이스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동안 국내용이라고 비난했던 안티들도 이번 대회 퍼포먼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외신들이나 타국가 선수들도 양동근을 주목하는 등 양동근으로서는 전성기가 꺾이는 시점에 화려한 불꽃을 태운 대회가 되었다.
비시즌 동안의 강행군으로 인해 2015-16 시즌 초반에는 낮은 슛 성공률을 보여주었다. 대신 함지훈이 리그 어시스트 1위를 달릴 정도로 훌륭한 플레이 메이킹 솜씨를 보여주고 있고 기량이 눈에 띄게 발전한 전준범과 아이라 클라크, 커스버트 빅터 두 외국인 선수가 득점을 해주면서 모비스는 '리빌딩하는 팀'이라는 주장이 무색하게 훌륭한 성적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시즌 중후반부로 오면서 역시 그 실력은 어디 안 가는지 양동근은 시간이 지날수록 슛감이 올라오면서 훌륭한 득점력을 보여주기 시작, 팀은 정규시즌 2위를 차지했고[10] 이로 인해 또다시 MVP 후보에 오르게 됐다. 팀 동료 함지훈이 양동근 못지 않게 좋은 활약을 했으나, 보여준 MVP 포스가 무색하게 시즌 후반부터 경기력이 좋지 않아 양동근 아니면 KCC의 전태풍이 MVP를 수상하지 않을까 의견이 많았는데, 시상식 당일 전태풍을 1표차로 제치며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다![11]
4강 플레이오프에서는 원주 동부를 3대0으로 꺾고 올라온 고양 오리온과 경기를 했는데, 애런 헤인즈와 김동욱, 이승현, 최진수 등 장신 포워드들이 골고루 활약을 해준 오리온을 상대로 팀의 스윕패를 막지는 못 했다. 그래도 지난 시즌에 비해 약해진 전력이라 평가받는 모비스를 1위팀과 승차 없는 정규시즌 2위로 이끌고 본인은 백투백 MVP까지 받았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
7. 무너진 명가를 재건하라 (2016~2019)
2015-16 시즌후 FA 자격을 얻었으나 원소속팀인 모비스와 보수총액 7억 5천만원(연봉 5억 5천, 인센티브 2억)에 3년간 재계약에 사인한다.2016-17 시즌 전자랜드와의 개막전에서 커리어 사상 최악의 부상을 당한다.[12] 결국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들것에 실려 바로 병원행. 진단 결과는 손목 복합 골절로 재활에만 최소 3~4개월 이상이 걸리는 중상이었다. 10년이 훌쩍 넘는 커리어 동안 10경기 이상 결장한 적이 없는 KBL 대표 철인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일부 전문가들과 팬들은 아예 시즌 아웃까지 점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대들보가 쓰러진 모비스는 개막 후 4연패에 빠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준범이 리그 최강의 3점 슈터로 거듭났고 중간에 일시 대체로 합류한 마커스 블레이클리와 시즌 초반 골칫거리였던 찰스 로드의 호흡이 잘 맞으면서 조금씩 승률을 올리며 5할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블레이클리는 KBL 계약 조건에 불만을 품고 잠적해버렸고, 이후에는 다시 네이트 밀러가 뛰게 되었다. 기복 심한 활약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스틸은 1위이며 시즌 초와 비교하면 폭발적인 모습을 꽤 많이 보이고 있다.
2017년 1월 7일 서울 삼성전에서 약 80일만에 복귀하여 13득점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부상 여파와 나이 탓인지 예년 만큼의 폼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다소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단 사이드 스텝이 느려졌고, 슈팅 역시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준다. 본래 나이가 먹으면 기복이 심해지기 마련인데다가 양동근의 출전시간 관리를 안 하기로 유명한 유재학 감독이 상당히 굴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7-18 시즌 1라운드 초반 부진을 보이며 노쇠화에 확인도장을 찍는가 했지만, 점차 회복해서 2라운드 초반까지 쾌조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다. 스탯은 커리어 평균과 차이가 없으며 1라운드 마지막 경기 삼성전에서는 상대선수 4명을 제치며 종료 0.8초전 멋진 위닝 레이업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영상 일부에서는 '37살 가드가 맞냐? 국대에 가드 부상이 많아 다시 차출해야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여전히 평균 33분을 출전하며 구르는 중이지만 박형철, 박경상이 영입됨에 따라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2월 17일 전준범 데이에 30점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치며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2018년 1월 1일. kt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고참의 품격과 해결사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날 경기에서 kt의 외인 맥키네스와 모비스의 외인 레이션 테리가 득점대결을 벌이며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승부의 마침표를 찍는 위닝샷으로 팀의 10연승을 이끌었다. 영상
2018년 1월 17일. 전자랜드와의 4라운드 홈 경기에서 KBL 통산 11번째 7,000득점을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정확히 6,999점인 상황에서 자유투 2구 중 1개가 적중하여 정확히 7,000득점에 성공한다. 포인트 가드 포지션 중에서는 주희정에 이어 최다 득점 역대 2위의 대기록이다.
정규시즌 최종전인 3월 13일 전자랜드 원정 경기에서 어시스트를 추가하며 KBL 통산 5번째 3,000어시스트 고지를 달성했다. 양동근 이전에 주희정, 이상민, 김승현, 신기성이 3,000어시스트 기록을 달성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세월 앞엔 장사 없다고, 시즌 후반 그리고 플레이오프를 보면 확실히 나이를 먹었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슛 기복이 심해지고 있는데다 수비에서의 사이드 스텝도 확실히 느려진게 보일 정도. 물론 여전히 나이에 비해 좋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지만, 젊은 가드들인 피터슨이나 이재도를 상대로도 버거운 모습이다. 그래도 G리그에서 돌아온 이대성과 각성한 박경상이 있기에 예전처럼 혼자 팀의 가드 포지션을 먹여살려야 하는 정도는 아니기에 확실히 부담을 덜었다.
2018-19 시즌 현대모비스가 FA로 오용준과 문태종을 영입하면서 강제로 젊어졌다(…). 게다가 시즌 도중 아이라 클라크까지 합류하면서 나이 서열이 4위까지 떨어졌다(…).[13] 불혹이 얼마 안 남았지만 3점슛 성공률이 40% 이상에 어지간한 국내 가드들과의 매치업에서도 밀리지 않으면서 클래스는 여전하다는 걸 본인이 경기에서 증명하고 있다. 소속팀 현대모비스 역시 2018-19 시즌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였다.
이어지는 4강 플레이오프 및 챔피언결정전에서 위기때마다 팀을 구하는 3점슛으로 대범함과 관록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8-19 시즌 팀의 통합우승의 중심에 서서 6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추승균 前 KCC 감독을 제치고 KBL 역대 최다 우승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이후 FA로 풀렸고 5월 15일 원 팀 계약협상 기간 1시간을 남겨두고 1년 보수 4억원에 재계약을 맺었다.
8. KBL 리빙 레전드 (2019~2020)
2019-20 시즌에도 국내 탑 가드의 면모를 보이며 여전히 떨어질 줄 모르는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던 중 2019년 11월 11일에 터진 역대급 트레이드로 인해 자신과 함께 현대모비스 주축 가드로 활약했던 이대성을 적으로 만나 상대하게 되는 진풍경을 보였다. 사실상 팀의 리빌딩 시즌을 맞아 함지훈과 함께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2019년 마지막 경기인 29일 군산에서 치른 KCC와의 경기에서 3점슛 6개를 포함한 26득점을 올리며 노장의 품격을 드높였다. 2020년 새해가 밝으면서 마지막 30대를 보내게 되었다.
9. 은퇴
2020년 3월 31일 한국 나이 40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먼저 은퇴를 선언한 전태풍에 이어 2019-20 시즌 KBL 두 번째 은퇴 선언이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1년 재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계속 뛴다면 FA로 풀리게 되지만 팀을 옮길 가능성은 없으므로 사실상 현대모비스에서 현역 생활을 연장하느냐 아니면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느냐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있던 상황이었다. 2019-20 시즌 중에 이미 은퇴와 관련해 구단과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2006-07 시즌 첫 우승을 합작했던 크리스 윌리엄스와의 추억을 기념하고자 윌리엄스의 등번호인 33번을 달고 은퇴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시즌이 조기 종료되어 해 보지 못한 채 은퇴하게 되었다. 기사1기사2팬들의 반응은 갑작스럽게 발표가 나와 놀랐다는 것과 함께 한편으로는 박수 칠 때 아름답게 떠나서 보기 좋다는 의견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시즌에도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을 유지하며 건재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루었고 남은 건 현대모비스에서의 지도자 생활뿐이라 팬들은 코치 연수를 받고 지도자로서 현대모비스를 이끌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현대모비스 구단은 4월 1일 KBL 센터에서 양동근의 공식 은퇴 기자 회견을 가졌다. 양동근은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소회를 밝히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기자 회견에는 유재학 감독, 조성민, 함지훈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은퇴와 동시에 모두의 예상대로 양동근의 등번호 6번을 현대모비스 구단이 세 번째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프로 입단 후 15년 동안 단 한 번의 이적 없이 오직 한 구단에서 한 명의 감독과 함께 뛰고 은퇴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양동근의 공식 은퇴 행사는 2020-21 시즌 현대모비스 홈 개막전인 10월 11일 DB와의 경기 중에 열렸다. 이날 현대모비스 선수들은 유니폼에 양동근의 이름을 달고서 경기를 뛰었으며 양동근은 3쿼터 객원 해설로 은퇴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1] 1999년경에 김용근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 2008년 농구대잔치에 고려대에게 패하자, 이상영 코치와 함께 선수 2명을 폭행하는 바람에 경질되고 말았다.[2] 고교 때까지 수비용 식스맨이었던 양동근을 불러주는 대학팀은 없었다. 고교 특급 선수는 이르면 고등학교 1학년, 보통 2학년에는 입학할 대학교가 정해지는데, 양동근은 3학년이 지나도록 오라는 곳이 없어서 농구를 관둬야 하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용산고 입학 시절 키가 168cm 밖에 되지 않아 짬이 차는 고학년이 될 때까지는 주로 벤치를 지키는 수비용 식스맨이었다. 그에 반해 1년 후배 이정석은 1학년 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찼다.[3] KCC get: R.F. 바셋, 2004년 신인드래프트 7순위 지명권 / 모비스 get: 무스타파 호프, 2004년 신인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4] 1순위 경쟁자는 용산고 1년 후배인 이정석. 둘 다 실력 차이가 거의 없고 고만고만하다는 평이었으나, 모비스 구단은 당시 KCC 감독이었던 신선우의 강력 추천과, 양동근의 외모가 조금 더 나아서 스타성이 있다는 이유로 양동근을 1순위로 뽑게 된다. 당시 기사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전자랜드 감독이었던 유재학은 전자랜드가 1순위에 걸릴 경우, 이정석을 뽑으려고 했다. 이정석은 양동근에 이어 2순위로 안양 SBS의 지명을 받았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2017년, 1순위를 다투던 두 선수는 현대모비스에서 함께 뛰게 되었다.[5] 유재학은 부상으로 인해 기아자동차에서 조기 은퇴하는데, 그가 부상 재활을 포기하고 은퇴한데는 기아가 중앙대 위주로 굴러간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한다.[6] 프로농구 출범 이후 모비스의 유일한 신인왕으로 17년 후 이우석이 타면서 깨졌다.[7] 심지어 제대로 경기에 나오지도 못했던 서장훈은 결국 1년 후 KCC로 팀을 옮기게 된다.[8] 결국 양동근의 공백과 용병 농사 실패가 겹치면서 2007-08 시즌 모비스는 11연패를 두 차례나 하는 등 14승 40패라는 구단 사상 최악의 성적을 내게 된다. 다만 김승현의 부상과 심용섭 단장의 막장 운영으로 같이 꼴찌 싸움을 하던 오리온스가 10위를 하면서 최하위는 면했다. 여담이지만 귀화 전이었던 이승준이 이 시즌에 외국인 선수 신분(등록명 산드린)으로 모비스에서 뛴 적이 있었으나, 부상 때문에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일찌감치 짐을 쌌다.[9] 심지어 비교적 약체로 꼽히는 나라들과의 경기는 거의 뛰지 않고 만든 기록이다.[10] 1위 전주 KCC와 승수는 같다.[11] 역대 최소 득표차 수상이며, 기존 기록은 2001-02 시즌 MVP 투표 당시 2표차(김승현 39표, 서장훈 37표).[12] 이 날 경기가 자신의 500번째 출장 경기라서 더욱 안타깝다.[13] 문태종과 클라크가 75년생(클라크가 6개월 빠르다.), 오용준이 80년생, 본인은 81년생이다. 참고로 문태종+클라크+오용준+양동근+함지훈까지 5명이 코트에 나서면 나이 합이 200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