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22 01:19:24

압해도 항몽전

1. 개요

여몽전쟁 중 현재의 신안군 압해도에서 현지 주민들과 몽골제국의 군대가 맞서 싸워, 현지 주민들이 2번 승리한 사건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00730&cid=49359&categoryId=49359

1.1. 1차 압해도 항몽전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당시의 전투로, 압해도 주민들이 승리하였다.

몽골의 차라대가 침입해 왔을 때 압해도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몽골군은 본대로서 전남 내륙 지방을 공략하면서 다른 부대로서 서해안의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려는 양동 작전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몽골과 고려 양국간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강화도 정부를 위협하여 육지로 내몰기 위한 전략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몽병이 배를 만들어 조도(槽島)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충주도(忠州道) 순무사(巡撫使) 한취(韓就)가 아주(牙州)의 해도(海島)에 있으면서 선박 9척으로 몽병을 쳤다.˝, ˝장군 이천(李阡)에게 주사(舟師) 200여 인을 주어 남도(南道)에서 몽병을 막게 했다.˝, ˝장군 이천이 온수현(溫水縣)에서 몽병과 싸워 수십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100여 명을 구출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서해안의 수송로를 장악하려는 몽골군과 이를 보호하려는 관군의 공방전을 기록한 것이다. 몽골군의 압해도 공격 역시 그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압해도 전투는 겉으로 보기에 대몽 전략의 핵심이었던 해도 입보책(海島 入保策)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해상 수송로의 장악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2. 2차 압해도 항몽전

1256년 몽골의 7차 침입 당시 전투로, 압해도 주민들이 승리하였다.

낭장 윤춘이 몽골군으로부터 돌아왔다. 윤춘이 반하여 몽골에 들어간지가 몇 해 되었는데 이 때에 와서 도망하여 와서 말하기를(중략) ‘차라대가 일찍이 수군 70척을 거느려 깃발을 늘어 세우고 압해를 치는 데 저와 한 관인을 시켜 다른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였습니다. 압해 사라들이 대포 2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양편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저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하였으나 압해인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드디어 수공(水攻)의 장비를 파하였습니다.(후략)’ 라고하여 압해도 전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압해도는 목포시와 무안군의 서해안에 남쪽으로 길게 뻗은 연안 도서로 이 섬을 몽골군이 장악하게 되면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아가 강화도 정부와 전남 지방의 곡창 지대를 차단시킬 수 있는 전략적 중요성이 있었기 ?문에 고려는 이에 충분한 대비를 하였고, 도민이 합심하여 몽골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당시 고려 조정의 실권자인 최항(최씨 정권)은 여러 도(道)에 사자를 보내 모든 주민들을 섬 안으로 몰아넣고, 따르지 않으면 그 집과 전곡(錢穀)을 불태우니, 굶어 죽는 이가 10명 중 8, 9명이나 되었다.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j_017r_0010_0060_0080_0020&types=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