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0 14:17:28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51c3f, #d22c3f 20%, #d22c3f 80%, #b51d2f);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폴란드 제2공화국|
제2공화국
]]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폴란드 망명정부|
제2공화국 망명정부
]]
제4대 대립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 아우구스트 잘레스키 스타니스와프 오스트로프스키
대립
에드바르트 라친스키 카지미에시 사바트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rowcolor=#fff> [[폴란드 인민공화국|
제2공화국 임시정부
]]
<rowcolor=#fff> 제5대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폴란드 인민공화국|
인민 공화국
]] · [[폴란드 제3공화국|
제3공화국
]]
<rowcolor=#fff>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레흐 바웬사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레흐 카친스키
<rowcolor=#fff> 제10대 제11대 제12대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안제이 두다 카롤 나브로츠키 }}}
대립: 1945년 7월 6일 이후 제2공화국 망명정부연합국유엔
승인 및 국내 영향력 상실로 인해 폴란드 인민공화국과 대립하였다

}}}}}}
<colbgcolor=#d22c3f><colcolor=#fff>
폴란드 공화국 제8대 대통령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Aleksander Kwaśniewski
파일:Aleksander_kwasniewski.jpg
출생 <colbgcolor=#fff,#1f2023>1954년 11월 15일 ([age(1954-11-15)]세)
폴란드 인민 공화국 비아워가르트
학력 그단스크 대학교 (국제무역학 / 중퇴)
재임기간 제3공화국 제3대 대통령
1995년 12월 22일 ~ 2005년 12월 22일
정당 사회민주당(1990년~1995년)[1]
서명 파일: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서명.svg
1. 개요2. 정책3. 여담

1. 개요

폴란드의 제8대 대통령이자 폴란드 제3공화국의 세번째 대통령으로, 폴란드의 사민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원래는 폴란드 사민당의 전신이 과거 폴란드 인민공화국 체제에서의 독재정당인 폴란드 통일노동당이어서 당선에는 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예측했지만 레흐 바웬사 대통령의 인기가 매우 낮았던 데다가[2] 우파 정당인 폴란드 자유노조가 해체되면서 표가 분산되어 크바시니에프스키가 당선되었다.[3] 2000년 선거에서 과반 득표율(53.9%)로 연임해[4] 폴란드 첫 재선 대통령이 되었다.

2. 정책

정당이 사민당이니만큼 사민주의 좌파 정책을 펼쳤으나, 인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정치인이었다. 또한 크바시니에프스키 이후로 폴란드의 좌파 진영이 몰락하고 중도우파 자유주의 정당인 시민 연단과 우익~극우 성향의 우익대중주의 법과 정의의 양강 체제로 정계가 재편되어 현재까지 폴란드에서 배출한 최후의 좌파 성향 대통령이다.

1997년 민주화 후에도 스탈린주의의 잔재가 잔존했던 폴란드 헌법을 현행으로 개정했으며 외교적으로도 1999년 폴란드의 NATO 가입, 2004년 EU 가입을 성사시키는 치적을 남겼고, 이라크 전쟁 초반부터 연합군으로 참전했으며,[5] 1997년 빌뉴스에서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며 우호조약을 맺어 폴란드를 대표적 친우크라이나 국가로 만들었다.[6] 또 그의 집권 기간 동안 폴란드 GDP는 2배로 성장했다. 이렇듯 여러 치적을 남겼기에 최고 지지율이 80%에 달하며 과반 득표율로 재선에도 성공하고 2020년 폴란드 내의 한 여론조사에서 1989년 이후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혔다.[7][8]

3. 여담

에마누엘 올리사데베의 폴란드 귀화에 큰 역할을 했는데,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해 시무룩하던 올리사데베에게 폴란드 귀화 제의를 직접 건넸고 이를 수락하자 대통령 직권으로 귀화 절차를 하루 만에 끝내주어 올리사데베가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 정작 대통령 재임기에는 무소속이었다. 폴란드 대통령은 취임하면 당적이 소멸하기 때문.[2] 지지율이 3%를 기록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3] 다만 바웬사 임기 중 치러진 총선에서도 사민당 등 좌파연합 정당이 의석의 을 차지했는데 여당 계열 정당은 의석의 10% 미만을 차지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폴란드가 이원집정부제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결과는 더더욱 치명적인 것이다.[4] 민주화 이후 폴란드 역사상 유일하게 첫 투표에서 단번에 후보자가 결정된 대선이다.[5] 미국과 함께 전쟁 초반부터 지상군을 파병하여 참전한 나라는 폴란드 외에는 파이브 아이즈 국가인 영국, 호주가 전부다.[6] 그 인연으로 2004년 크바시니에프스키는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당시 합의를 중재했다.[7] 최저 지지율과 공산당 후예 소속 후보에게 단임 정권교체 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대통령 시절의 레흐 바웬사는 현 폴란드의 국부인 것과 별개로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8] 단임 정권교체를 당한 민주적 이미지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비민주적 이미지 정당 소속 대통령이 역대급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고 대중적으로 고평가받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지미 카터-로널드 레이건의 관계와 유사하며, 우익 정치 거물을 이기며 집권한 좌익 인사가 각기 다른 분야에서 현행 국가의 틀을 만든 또 다른 정치 거물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윈스턴 처칠-클레멘트 애틀리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