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그로벤동크 백작 안토닌 셰츠 Antonie Schetz, graaf van Grobbendon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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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안토닌 셰츠 Antonie Schetz |
| 출생 | 1564년 7월 또는 8월 |
| 스페인령 네덜란드 안트베르펜 | |
| 사망 | 1641년경 |
|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뤼셀 | |
| 아버지 | 가스파르 2세 셰츠 |
| 어머니 | 카타리나 반 우르셀 |
| 형제 | 란슬롯, 이사베우, 아그네스, 얀 카렐, 니콜라스 멜키오르, 콘라드 |
| 배우자 | 바바라 카레만스, 마리아 반 말센 |
| 자녀 | 란슬롯, 이자벨, 이그나스 아우구스트 외 13명 |
| 직위 | 그로벤동크 백작, 탈뷔르흐, 고이를레, 풀레, 폴더보스, 베제말의 영주, 스헤르토헬보스의 총독, 성 야고보 기사단의 기사. |
1. 개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백작, 군인.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 스페인군에 소속되어 스헤르토헨보스 공방전에서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을 물리쳤다.2. 생애
1564년 7월 또는 8월경 태어났으며, 8월에 안트베르펜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가스파르 2세 셰츠는 포르투갈령 브라질과의 무역업에 종사하던 대상인 에라스뮈스 셰츠의 장남으로, 1555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 의해 무역 대리인으로 선임되어 왕을 대신해 국고를 사용하여 교역을 진두지휘했고, 1564년 재무 총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총독을 맡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의 십일조 강제 징수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1577년 새 총독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정부에서 떠나서 네덜란드 공화국에 가담한 뒤 쾰른 평화 조약에 참여해 평화를 옹호했지만, 협상이 실패한 뒤 1580년 다시 스페인 정부에 순응했다.어머니 카타리나 반 우르셀은 안트베르펜 시장인 란슬롯 반 우르셀의 딸이다. 우르셀 가문은 네덜란드의 명문 가문이었지만, 17세기 후반에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고, 안토닌의 형제인 콘라드가 이 집안에 입양되면서 가문이 이어지게 되었다. 형제로 란슬롯 1세[1], 이사베우, 아그네스, 얀 카렐[2], 니콜라스 멜키오르[3], 콘라드[4]가 있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안토닌은 펠리페 2세를 위해 플란데런군에 입대했고, 1589년 스헤르토헨보스 총독으로 선임되어 그곳 수비대를 지휘했다. 당시 스헤르토헨보스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네덜란드 공화국이 남부 저지대 국가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장소였다. 안토닌은 가족을 이 도시에 거주하게 해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게 해주는 한편, 네덜란드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집중했다.
1601년 11월 1일,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가 사촌인 빌럼 로더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와함께 병사 8천 명을 이끌고 스헤르토헨보스를 포위했다. 그는 굳건히 버텼고, 마우리츠는 심한 서리가 내리면서 장병들이 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데다 네덜란드 총독 알브레히트 7세가 구원군을 보낼 준비를 한다는 첩보를 접하자 철수했다. 마우리츠는 1603년에도 군대를 재차 일으켜 스헤르토헨보스를 공격했지만, 안토닌에게 역시 격퇴되었다.
그러나 1629년, 마우리츠의 뒤를 이어 스타트허우더가 된 프레데릭 헨드릭이 스헤르토헨보스를 포위 공격했을 때 구원군이 오지 않자, 결국 항복했다. 그 후 세츠 가문은 스헤르토헨보스를 떠난 뒤 틸뷔르흐-고이를레 영지 주민들에게 틸뷔르흐 성에서 가톨릭 미사를 드리는 걸 허락했다. 1631년, 안토닌은 헐스트와 그 주변 지역 방어전에서 스페인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1635년 71세의 나이로 루벤 시 총독으로 선임되어 네덜란드군의 포위 공격을 막아냈다. 이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그로벤동크 백작에 선임했다.
안토닌은 1582년 바바라 카레만스와 결혼했고, 1604년 바바라가 스헤르토헨보스에서 사망한 후에는 베르트 반 말센의 딸이자 틸뷔르흐의 상속녀인 마리아 반 말센과 재혼했다. 틸뷔르흐는 고이를레와 함께 하나의 영지를 이루었다. 이로써 안토닌은 결혼을 통해 틸뷔르흐와 고이를레의 영주가 되었고, 틸뷔르흐에 거주하게 되었다.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가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그는 안보상의 이유로 자기 영지를 봉건 영지로 격상시켰다. 그는 마리아 반 말센과의 사이에서 자녀 16명을 낳았는데, 그중 적어도 딸 둘과 아들 3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사망했다. 성인이 된 자녀 중 란슬롯 셰츠(1606~1664)는 스페인군 중장과 림부르크 총독을 역임했고, 이자벨(1616~1709)은 라 캄브르 수도원 원장을 맡았으며, 이그나스 아우구스트(1625~1680)는 나무르와 겐트의 주교를 역임했다.
1641년경 사망했고, 브뤼셀의 예수회 성당에 안장되었다. 장남 란슬롯이 틸뷔르흐크의 새 영주가 되었고, 아내 마리아는 1650년 사망하여 남편과 같은 묘실에 안장되었다. 브뤼셀 예수회 성당은 예수회 수도원의 일부였는데, 이 수도원은 1825년에 철거되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법원 광장과 유럽평의회 건물이 들어섰다. 두 개의 원형 명판이 달린 커다란 묘비는 뒤르셀 가문에 의해 보존되었고, 벨기에 림뷔르흐에 있는 수녀원의 회랑 벽에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