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반다로 록 페스티벌 (Festival Rock y Ruedas de Avándaro)
1. 개요
1971년 9월 11일부터 12일까지 멕시코시티에서 약 120km 떨어진 Tenango del Valle 근처 아반다로 계곡(Valle de Avándaro)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음악 페스티벌
2. 배경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멕시코는 사회적,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었다. PRI(제도혁명당) 통치 하에 세계적 스포츠 행사인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과 1970년 FIFA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반면, 1968년 10월 2일 멕시코시티에서 자행된 틀라텔롤코 학살[1]은 젊은 세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반발과 자유를 갈망하는 청년 문화가 성장하게 된다. 당시 멕시코에서도 서구의 히피 문화와 반문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록 음악이 급부상하고 있었지만 정부와 기성세대 등 멕시코 주류 사회는 록 음악을 퇴폐적인 것, 외국물로 폄하, 배척했다. 당시 멕시코 히피 들은 '히피테카스(jipitecas)'로 불렸는데, 다학제적 사회운동인 라 온다[2]를 주도하고 있었다. 라 온다는 히피적 평화주의 가치관에 따라 PRI 정권에 대한 폭력 전복을 추구하지 않았음에도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았다. 1969년, 정부는 아카풀코에서 단 1번 공연한 뮤지컬 Hair를 금지 조치하고, 록 밴드 로스 셰이크스(Los Shakes)를 탄압했으며, 외국인 배우와 프로듀서들을 추방했다.공식 행사명인 Festival de Rock y Ruedas는 '록과 바퀴(자동차/모터사이클)'라는 의미로, '프로모토라 고(Promotora Go)'의 소유주인 에두아르도와 알폰소 로페스 네그레테 형제가 1969년 레이싱 드라이버 모이세스 솔라나의 치명적인 사고로 인해 취소된 아반다로 서킷(Circuito Avándaro)을 부활시키기 위해 라이브 록 음악 공연과 함께하는 대규모 자동차 경주로 기획한 행사였다. 그러나 상술한 멕시코의 사회적 혼란은 록 음악을 행사의 핵심으로 만들었고,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문화 현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3. 전개
공동 주최자인 에두아르도 로페스 네그레테(Eduardo López Negrete)와 발례 데 브라보 시장 후안 몬테스 데 오카 로사(Juan Montes de Oca Loza)는 주류 판매를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맥주는 음식과 함께 제공될 때만 팔기로 하고, 이동식 화장실을 설치했다. 관객 최대 25,000명, 122명의 레이서, 그리고 12개의 록 밴드가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행사 2주 전 바예 데 브라보의 5개 호텔 예약이 끝났다. 치안은 멕시코 주 사법경찰 책임자인 카르데나스(Cuauhtémoc Cárdenas)가 총괄했고 주 경찰 200명, 군 병력 120명, 그리고 정부 특수요원 50명이 배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주최 측은 음악 코디네이터로 밴드 라 마키나 델 소니도(La Máquina del Sonido)의 리더였던 아르만도 몰리나 솔리스(Armando Molina Solís)를 섭외했다. 그는 40,000페소의 예산과 라 레볼루시온 데 에밀리아노 사파타(La Revolución de Emiliano Zapata)[3]와 하비에르 바티스(Javier Batiz)[4] 섭외를 지시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참여를 거절하자, 몰리나와 주최 측은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개최일을 변경하고 각 3,000페소의 출연료로 12개 밴드를 섭외했다. 공연은 9월 11일 토요일 오후 7시부터 시작해 9월 12일 일요일 오전 8시경 종료하고 이후 자동차 경주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티켓 가격은 25페소로, 크라이슬러-AUTOMEX 대리점에서 판매했다. 저널리스트 하코보 사블루도프스키(Jacobo Zabludovsky)의 지원에 힘입어 라디오와 TV로 대규모 홍보를 진행했고 유명 광고 디자이너 조 베라(Joe Vera)가 공식 포스터 제작을 맡았다.
주최 측 예상과 달리 전국에서 20만~3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 멕시코 역사상 가장 큰 야외 집회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대규모 행사가 되어버렸으며 이는 교통 체증, 물자 부족, 위생 문제로 이어졌다. 9월 9일(목요일)부터 수만 명의 히피테카스가 현장에 도착했다.
히피 옷차림(장발, 꽃무늬 의상, 머리띠 등)을 한 참가자들이 많았고, 일부는 나체로 춤을 추거나 공공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마약을 사용하는 모습이 멕시코 언론에 보도되며 큰 논란이 일었다. 정부와 보수 언론은 젊은이들의 타락을 문제삼으며 록 음악 비난에 열중했고 참가자들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음식과 물자를 나누며 공동체를 형성했다. 멕시코 정부는 이 페스티벌을 반체제 운동으로 간주, 특수 요원을 배치해 감시했고 언론은 '마약과 방탕', '난장판'으로
페스티벌 첫 날인 1971년 9월 11일(토요일), 아침부터 들어오는 엄청난 추가 인파에 주최 측은 자동차 경주를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날씨는 비가 오락가락하며 바닥이 진흙탕이 되는 등 문제가 있었다. 임시로 설치한 무대의 전기 공급과 음향 시스템 또한 매우 열악했고, 3개의 대형 알텍랜싱 스피커와 간단한 믹서로 구성된 시스템은 공연이 진행될수록 점점 성능이 저하되었다. 당일 저녁 8시경 Los Dug Dug's가 오프닝 공연을 시작, 강렬한 사이키델릭 록과 블루스 사운드로 에너지와 반항적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일부 관객은 나무나 조명탑에 매달려 공연을 지켜봤으며, 일부는 무대 구조물을 흔들거나 술병을 던지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공연 중반부, 밴드 Peace & Love가 'Marihuana'와 'We got the power'를 연주하자
Peace & Love의 전설적 무대
4. 라인업
* 프리 페스티벌
9월 9일 목요일, 사운드체크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많은 수의 관객이 도착했고, 토요일 오전 6시에 프리 페스티벌로 시작하기로 결정
오전 11시, 카를로스 바카(Carlos Baca)가 무대에 올라 요가 세션 및 생태 강연 진행
에두아르도 루이스 사비뇬(Eduardo Ruiz Saviñón)과 UNAM 실험극단은 더 후의 록 오페라 Tommy 공연
* 밴드 출연 순서
라 레이 데 에로데스(La Ley de Herodes)
사피로(Zafiro)
라 소시에다드 아노니마(La Sociedad Anónima)
소울 마스터스(Soul Masters)
라 파차다 데 피에드라(La Fachada de Piedra) with 래리 산체스(Larry Sánchez)
라 파차다 데 피에드라 공연 종료 후 몇 시간이 지나고 다음 순서로 출연:
로스 둑 둑스(Los Dug Dug's)
엘 에필로고(El Epílogo)
라 디비시온 델 노르테(La División del Norte)
테킬라(Tequila)
Peace and Love
엘 리투알(El Ritual)
반디도(Bandido)
로스 야키(Los Yaki) with 마이타 캄포스(Mayita Campos)
틴타 블랑카(Tinta Blanca)
엘 아모르(El Amor)
Three Souls in my Mind
둑 둑스부터의 공연 녹음본(일부 소실)
코카콜라의 후원으로 라디오 주벤투드(Radio Juventud)를 통해 거의 전 과정이 생중계되었으며, 폴리도르 레코드, 텔레시스테마 메히카노(Telesistema Mexicano) 등이 비디오와 오디오를 녹화했다.
5. 후폭풍(El Avandarazo)
이 공연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어버렸고 멕시코 정부와 종교계, 보수적 기성세대는 크게 반발했다. 록 음악과 히피테카스가 급진적 정치 운동과 연관될 수 있다는 우려는 전국적 논란과 정부의 적극 개입을 야기했다. 언론과 종교계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당시 멕시코의 내무부 장관 모야 팔렌시아는 공연 주최자들을 강하게 비난했고 멕시코주 주지사 행크 곤살레스[5]는 '허가는 스포츠 행사로 받고 실제로는 록 페스티벌을 열었다'고 분노했다.대통령 루이스 에체베리아는 '아반다로 현상에 유감스럽고, 이런 행사와 공연을 좋아하는 자들은 우리나라 청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라고 발언하고 라 온다 운동을 탄압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대규모 집회가 금지되었으며, 로사리오(Rosario)의 'Avándaro', 파하로 알베르토(Pájaro Alberto)의 'Seguir al sol', 러브 아미(Love Army)의 'Caminata cerebral' 등 인기 곡들의 라디오 송출을 막았다. 라디오 주벤투드의 진행자들은 해고와 정직 처분, 유명 잡지 Piedra Rodante는 강제 폐간, 주최자 중 한 명이었던 후스티노 콤페안은 해외로 도피했다.
밴드 틴타 블랑카(Tinta Blanca)를 위시한 록 뮤지션들이 에체베리아와 대통령과의 담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화제가 되었으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TV 다큐멘터리에 사용하려던 촬영 필름이 행방불명되자 정부가 압수했다는 소문[6]이 돌기도 했다.
이 페스티벌이 촉발했던 멕시코의 사회적 긴장을 아반다라소(El Avandarazo)라고 부른다.
6. 영향과 재평가
아반다로 록 페스티벌은 일회성 행사로 끝났지만, 멕시코 문화와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단순한 음악 공연을 넘어 청년 세대의개최 당시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지만, 현재는 멕시코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여겨지며 다양한 다큐멘터리, 서적, 영화 등을 통해 역사적 의의가 재조명되고 있다. 2019년 11월 25일 멕시코 상원은 페스티벌 운영자들과 참가 뮤지션들에게 공식적인 인정을 표하며 48년 간의 정부 검열을 철회했고, 2021년에는 발례 데 브라보 시 정부, 멕시코 시티 정부가 공동 주최한 기념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1] 군대가 학생 시위대와 주민들에게 발포하여 300~400명(희생자들의 시신을 암매장 또는 소각하여 정확한 신원과 숫자는 불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무려 올림픽 개막식 열흘 전에 발생했지만 개막식은 계획대로 열렸다.[2] The Wave, 1960년대 전세계적 흐름이었던 반문화와 아방가르드 추종 행태의 멕시코 현지화. 영화, 문학, 미술, 음악 등을 포괄하여 여성 인권, 생태, 영성, 예술적 자유, 마약, 민주주의 등을 다뤘다.[3] 9월 11일 몬테레이 공연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4] 후일 TV 인터뷰에서 몰리나가 제안한 출연료가 너무 낮아서 거절했으나 곧 후회하고 여동생, 여친, 밴드 멤버들과 페스티벌로 출발했고, 교통 체증 때문에 포기했다고 함.[5] 마약 카르텔 돈세탁을 주도했다는 설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 멕시코 시즌 3에서 흑막 캐릭터로 등장.[6] 당시 멕시코 내무부 공식 문서에는 관련 내용이 없다.[7] 아르헨티나에서도 1976년 인간백정비델라 독재 정권 수립 후 유사한 탄압이 자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