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5 10:09:39

아나톨리 페펠랴예프

<colbgcolor=#fff><colcolor=#0039A6> 아나톨리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Анатолий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파일:Anatoly_Pepelyayev.jpg
출생 1891년 7월 15일[구력]
러시아 제국 톰스크
사망 1938년 1월 18일 (향년 46세)
소련 러시아 SFSR 노보시비르스크
국적
학력 옴스크 생도단
파블롭스크 보병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중장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1. 개요2. 생애
2.1. 러시아 내전2.2. 사망
3. 미디어
3.1. 영화
3.1.1. 콘트리부치야
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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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러시아 내전 말기 프리아무레 임시정부를 사실상 지도하며 백군 최후의 저항을 주도했다.

2. 생애

1891년 군인 니콜라이 페펠랴예프의 아들로 태어났다.

옴스크 생도단과 파블롭스크 보병학교를 졸업한뒤 아버지 지휘 하 제42톰스크소총연대에 배속되어 군생활을 시작했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공을 세워 6개의 훈장을 받고 중위에서 중령으로 특진했다.

2.1. 러시아 내전

10월 혁명 이후 대대 내 병사들에 의해 대대장으로 선출되었다. 구 제정의 복고는 원하지 않았으나 볼셰비키독일 제국과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발해 고향 톰스크로 돌아와 수마르코프 대령의 제안으로 장교들과 학생들의 비밀조직에 가입했고, 조직 내 참모장을 맡으면서 봉기를 일으켜 톰스크의 볼셰비키들을 몰아냈다.

볼셰비키들을 몰아낸뒤 5,000명의 자원자들을 받아 비밀조직의 분견대를 중앙시베리아군단으로 개편한다. 이후 시베리아의 주요 거점지들을 장악하여 불과 27세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1918년에는 페름 공세페름을 성공적으로 점령해 적군 포로 20,000명을 생포했다. 이어서 이즈마일의 요새를 성공적으로 점령해 '시베리아의 수보로프'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19년 예브게니류드비크 밀러의 군대와 연결하는데에 실패 및 붉은 군대의 재정비로 백군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상관 콜차크와의 갈등도 발생하게 되어 결국 1920년 4월 하얼빈으로 망명한다.

하얼빈에서 목수로 일하던 도중 블라디보스토크에 백군 잔존 세력들이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해 분견대를 조직하나, 이마저도 1923년 현지 적색 파르티잔에 의해 생포되었다.

2.2. 사망

1924년 사형선고를 받지만 미하일 칼리닌에 편지를 보내 10년형으로 감형을 받게 된다. 1936년 석방된 이후 내무인민위원부의 감시를 받으며 목수로 일하던 도중 대숙청의 바람이 들이닥쳐 반혁명조직 창설 혐의로 1938년 사형 선고를 받고 선고일 당일 총살형당했다.

1989년 노보시비르스크 지역 검찰청에 의해 복권되었으나, 10년뒤 1999년 러시아 검찰청에 의해 복권이 취소되었다.
파일:Pepelyayev_Cemetary.webp
페펠랴예프 부자 묘지

3. 미디어

3.1. 영화

3.1.1. 콘트리부치야

파일:Kontributsiya_MG_Pepelyayev.jpg
콘트리부치야에서 등장한 페팰랴예프
2019년작 러시아 내전 영화 콘트리부치야에서 막심 마트베예프가 연기했다. 본작의 주인공이다.

4. 참고 문헌



[구력] 1891년 7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