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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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Stefan Czarniecki  | 
| 출생 | 1599년 | 
| 폴란드-리투아니아 차른차 | |
| 사망 | 1655년 2월 16일 (향년 71세) | 
| 폴란드-리투아니아 소코우프카 | |
| 직업 | 군인, 귀족 | 
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혼란기인 대홍수 때 폴란드를 구원한 장군이다.2. 일생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는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차른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여러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었고, 아버지가 당시 폴란드의 대공비었던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차와 친해서 궁정의 영향력을 통해 아들들의 경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그들은 종종 젊은 궁정 신하로 일할 수 있었다. 차르니에츠키는 크라쿠프에 위치한 예수회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 뒤의 경력은 상당히 불분명하다. 다만 그의 형제들이 전부 군복무해서 차르니에츠키도 군에 복무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중간의 경력은 불분명하지만 차르니에츠키의 이름이 다시 역사서에 기록되는 것은 타타르족과 벌어진 오흐마투프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났을 때이다. 그가 속한 후사르 기병대의 돌격은 폴란드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 전투 후, 그는 첫 임관장을 받고 코사크 기병대의 대장이 되었으며, 동시에 중위로 승급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왕으로부터 세 개의 마을을 받았고, 농지가 속한 영지를 약속받았다.
오늘 날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이 전쟁에 참전해 포로로 잡혔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탈출했지만 다시 잡혔다. 1649년, 즈보리프 협정 이후 그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다. 그 후 다시 참전하였으며 베레스테흐코 전투에서, 그는 폴란드 우익에서 싸우며 용감함을 보여주었다. 1652년, 차르니에츠키는 코사크와 후사르들을 이끌고 헤트만 칼리노프스키의 지휘 아래 바토흐 전투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폴란드는 패배하였고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명령에 따라 붙잡힌 포로 5,000여명 정도는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차르니에츠키는 짚더미에 숨어서 죽지 않았다. 1652년 10월, 차르니에츠키는 바토흐 전투에서 전사한 사무엘 예지 칼리노프스키를 대신하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전투에서 활약을 해 키예프의 성주와 더불어 상원의원 계급을 받았다.
1655년 스웨덴 국왕 칼 10세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차르니에츠키는 크라쿠프 방어를 지휘하였다. 하지만 지원군의 부족으로 항복하였다. 그리고 명예로운 조건으로 군대를 이끌고 크라쿠프를 떠났다. 차르니에츠키가 크라쿠프를 떠났을 때 당시 폴란드 대부분은 스웨덴에 점령된 상태였다. 그리고 대부분 상원의원과 귀족들은 스웨덴에 투항하였다. 그래서 해외로 피난처를 찾고 퇴위를 고려하고 있던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를 지지해 그가 저항을 선택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스웨덴군이 폴란드 대부분을 점령하자, 차르니에츠키는 정규군 대신 유격전을 펼쳤다. 그는 정규 전투 대신, 작은 기병대 중심으로 약탈대, 보급선, 주둔지 공격을 반복하여 스웨덴군을 괴롭혔다. 상당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스웨덴군은 차르니에츠키의 게릴라식 전쟁에 다소 취약하였다. 차르니에츠키는 1656년 2월 중순에 골롭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나중에 그 해 4월에 있었던 와르카 전투에서 특히 스웨덴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그 이후 몇 번 패배를 당했지만, 피해는 제한적이었고 오히려 바르샤바를 탈환하면서 승부의 추를 바꾸었다. 이에 스웨덴과 동맹을 맺은 트란실바니아의 죄르지 2세 라코치가 침공했으나, 차르니에츠키는 그를 격퇴함으로써 남부 전선을 안정시켰다. 이 전투에서 패배로 스웨덴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힘을 잃었고, 결국 올라바 평화 조약을 맺어 스웨덴과의 전쟁은 끝났다.
스웨덴과의 전쟁이 끝나자 차르니에츠키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동부로 갔다. 차르니에츠키는 포웡카 전투와 쿠슐리키 전투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이끌었다. 이 승리로 그의 인기와 명성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는 폴란드 국왕의 위기감을 일으켰으며, 차르니에츠키가 러시아 포로들의 몸값을 혼자 독점했다고 모함함으로서 그의 명성을 떨어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르니에츠키는 우크라이나로의 마지막 폴란드 공세를 이끌었고, 드네프르 강을 탈환하고 좌안 우크라이나에서 북쪽으로 진격한 다음, 리투아니아 군대와 합류한 뒤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왕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1664년 겨울, 원정 중 차르니에츠키는 중병에 걸렸고, 1665년 2월 16일, 병세가 악화되어 향년 약 65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