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09 21:13:51

송만수

파일:송돈효.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송돈효(宋燉孝)[1]
자 / 호 화룡(和龍) / 우송(又松)
본관 신평 송씨[2]
출생 1911년 12월 21일[3]
전라남도 담양군 천면 대성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성리)
사망 1974년 7월 20일[4]
전라남도 담양군
묘소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선영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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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만수는 1911년 12월 21일 전라남도 담양군 천면 대성리(현 담양군 금성면 대성리)에서 아버지 송환민(宋煥珉, 1890. 8. 12 ~ 1971. 4. 25)과 어머니 밀양 박씨(1887. 12. 19 ~ 1916. 7. 11) 박승룡(朴承龍)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현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문태곤(文泰坤)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같은 학교 학우들이 주도한 가두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김삼석(金三錫)·김홍남(金鴻南)·김동섭(金東燮) 등과 함께 인쇄물을 교부받았고, 제2차 가두시위날인 11월 12일 오전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가두시위에 앞장서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1930년 2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검사 측에서 공소하였으나 1930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 없음으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1947년 보통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 1960년 11월 23일부터 1961년 10월 30일까지 고흥군수를 역임했고, 1962년 11월부터 1964년 4월까지 여천군수를 거쳐 나주군, 보성군 등 5개 지역의 군수직을 수행했으며, 1967년 10월에는 전라남도지방공무원교육원[5]장에 발령받았다. 1968년에는 전라남도 내무국에 전보되었다가 함평군수에 발령되기도 했다.

그 뒤 1974년 7월 20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송만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나중에 이 이름으로 개명했다.[2] 노송공파(老松公派) 23세 효(孝) 항렬.[3] 신평송씨족보에는 11월 8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신평송씨족보에는 4월 28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2021년 전라남도인재개발원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