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임진왜란 중인 서력 1593년 1월 3일에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중종의 능인 선정릉이 도굴된 사건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선정릉에는 국왕과 왕비의 시신이 없는 상태이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측에 무덤을 도굴한 범인을 잡아서 압송할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 2명의 도굴범을 잡았다고 대마도에서 범인들을 조선으로 보냈지만 모두 가짜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외교적 파장을 생각한 것인지 조선 조정에서 이쯤에서 덮어두기로 하면서 유야무야 되었고 결국 압송된 대마도민 2명은 참수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1]2. 전개
2.1. 선정릉의 도굴
1592년 음력 4월 13일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조선을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그러던 중 음력 12월 1일에 왜적이 선정릉을 도굴했다고 한다.기사 참조 선조수정실록엔 이 날짜에 도굴되었다고 기록하면서도 주석으로 정확하게 언제 도굴되었는지는 모른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이전에 도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조선 조정은 이듬해 음력 4월 13일에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올린 장계를 통해 비로소 선정릉이 도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기사 참조 왜군이 선정릉을 도굴한 시점이 정확하게 언제이며 또 왜 도굴을 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단지 추측만 할 수 있다.
한편 정릉에서는 정체불명의 유골이 나왔다.# 출처불명의 유골이 중종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조정은 생전에 중종을 봤던 사람들[2]을 수소문해 몽타주를 작성했다. 그러나 중종은 키가 큰 편이였고 보통의 체형에 용안은 갸름하나 살짝 얽었고 턱이 굽어 모난 턱이었으며 코가 높고 길되 코 끝이 살짝 굽어 매부리코의 형태였다. 또한 이마에는 녹두보다 좀 작은 검은 사마귀가 있었으며 수염은 적지도 많지도 않으며 수염 색은 누런색이었다. 정릉의 시신은 키가 포백척으로 3척 2촌[3]으로 작고, 몸집이 크고 살집이 두둑한 체형이었다. 정릉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유골은 중종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나왔으나 중종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에 유골은 정릉 근처의 정결한 곳에 후하게 묻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고 한다. 그 유골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아직은 없다.
2.2. 도굴범 소환
1598년에 결국 6년에 걸친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당연히 단절되었다. 하지만 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던 대마도[4]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무역이 재개되는 게 유리했기에 조선과 일본이 서로 화해하도록 자리를 주선하려고 애를 썼다.[5] 이때 조선 측에서는 1606년에 일본에 선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잡아서 압송하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그런데 뜻밖에 일본은 '범인을 잡았다'고 하며 2명의 범인들을 체포해 조선으로 보냈다. 이렇게 조선으로 끌려온 범인들은 당시 37세의 마코사쿠(麻古沙九)와 27세의 마타하치(麻多化之)[6]라는 인물이었다. 조선으로 압송된 이 2명의 범인들은 오자마자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하였는데 마코사쿠란 인물의 진술을 들어보면 이렇다.
"나는 본래 대마도에 살았습니다. 임진년 왜적이 침구하여 왔을 때 연소한 사람으로 도주 군관(軍官)의 노자(奴子)가 되어 나와서 부산의 선소(船所)에 머물렀을 뿐 서울에는 올라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능침을 범한 연유를 전연 알지 못합니다. 다만 대마도주에게 득죄(得罪)하게 되어 촌가(村家)에 쫓겨나 있었는데, 지난 10월 8일 야간에 결박되어 이곳에 보내진 뒤로 이와 같이 추문을 받게 되었으니,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없는 말을 꾸며 공초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본에 맹세한다면 반드시 믿어주지 않을 것이니 내가 조선에 맹세하는 것을 허락하여 준다면 사흘 내로 죽겠다는 맹세라도 굳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대저 나의 사정이 매우 애매하니 대마섬으로 돌아가서 변정(辨正)한 뒤에 다시 나와서 죽게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05권, 선조 39년 11월 17일 임오에 실린 마코사쿠의 진술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05권, 선조 39년 11월 17일 임오에 실린 마코사쿠의 진술
즉, 마코사쿠는 임진왜란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해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부산포의 항구에만 머물렀을 뿐 서울엔 올라온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전쟁이 끝난 후 대마도주에게 죄를 얻어 쫓겨다니던 처지에 한 달 전에 붙잡혀서 강제로 조선으로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마타하치의 진술을 들어보면 이렇다.
"나는 본래 대마도 사람으로 도주 평의지에게 소속되어 포수(砲手)가 되었는데 도주가 매 사냥을 나갔을 때 수행하였다가 마침 명령을 어긴 잘못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득죄하게 되어 사코 촌(佐古村)에 쫓겨나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는데, 평경직(平景直)이 나의 건장함을 애석하게 여겨 몰래 식량을 갖다 주었으므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박하여 배에 실어보냈기 때문에 오긴 했습니다만 조선 땅은 이번이 처음으로 능침을 범한 절차에 대해서는 전연 모르는 일이고 평조윤(平調允)[7]이라고 하는 자도 모릅니다. 부모는 다들 형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4∼5촌 이내에 전혀 친족이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05권, 선조 39년 11월 17일 임오에 실린 마타하치의 진술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05권, 선조 39년 11월 17일 임오에 실린 마타하치의 진술
마타하치는 임진왜란 당시엔 아예 조선에 온 적도 없어 이번에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인물이었다. 나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당시엔 그는 겨우 13세의 소년이었다. 당연히 군에 입대했을 리가 없다. 즉, 마코사쿠와 마타하치 모두 도굴과는 전혀 무관한 대마도의 잡범들이었지만 일본 측에서 아무리 찾아도 범인이 나오지 않자 사형시키고 싶었던 범죄자들 중에 대충 골라서 억지로 능침을 범한 인물이라고 갖다 붙여서 조선으로 보낸 것이었다. 또한 일본에서 반환했다는 중종의 시신 역시 생전의 중종을 본 적이 있는 궁녀들이 살펴보니 키나 체격을 볼 때 중종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결국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다시 한 번 갑론을박을 벌이게 되었다.
즉, 이 두 사람 모두 알리바이[8]가 있는 셈이다. 물론 완전히 무고한 사람은 아니고 둘 다 일본에서 사형당할 범죄자였지만 그에 따른 처벌도 할 겸 가짜라도 보내서 떠넘겼던 것이다.
2.3. 사건 종결
결국 조선 국왕 선조는 이쯤에서 덮으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처음엔 둘이 제 목숨을 건지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해서 고문을 계속 가해보았지만 이들은 끝까지 버티며 자신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버텼고 범인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보고만 올라왔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일본 측에다 왜 가짜를 보냈냐고 따진다고 해도 그들이 진범을 잡을 수 있을 가능성도 희박했다.일단 선정릉을 도굴한 사람들은 거의 높은 확률로 당시 참전한 일본군 병사였을 것이다. 무덤이 도굴되었을 만한 시기 역시 한양이 점령당한 임진왜란 초반, 정확히는 1593년 4월 이전인게 확실하다. 문제는 진범이 도굴에 관한 기록을 구체적으로 남겼을리도 없고, 전시상황에 제대로 된 목격자도 있을리 없다는 것. 정황상 한양에 먼저 입성했을 가토 기요마사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에 있을 확률이 높았겠지만, 전근대시기 전쟁통에 머나먼 외국 땅에서 저지른 범죄를 10년도 더 지난 뒤에 진상을 입증하고 진범을 찾아내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애초에 진범이 살아있는지 조차도 의문이었다. 임진왜란은 7년이나 이어진 전쟁이었고 설사 도굴을 저지른 범인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이어 일본에서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난 사상자가 무려 3~4만 명이나 되고 두 다이묘 역시 주력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진범은 여기서 죽었을 수도 있었다. 즉, 일본측에서 범인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바다 건너 조선땅에서 이루어진 범행이고, 저지른 시기가 이미 한참 전이라 특정하기도 불가능하며 범인의 생사조차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이 수준이면 설령 현대 기술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중앙정부가 힘써서 나서도 잡기 힘들 판에 실질적으로 사건해결을 맡은 쪽은 대마도였다. 당시 조선이나 일본 정부는 냉랭한 국교 단절의 시기였고, 어떻게든 그 사이에서 대마도만 무역을 재개해보고자 애쓴 상황이었다. 조선은 대마도측에게 중개무역을 재개하고 싶으면 일본 정부가 직접 진범을 찾아내라고 요구했으나, 일개 섬에 불과한 대마도가 그런 무리한 요구를 중앙 정부에게 할 수 있을리 없었다. 결국 골머리를 썩다가 자신들의 섬에 있던 잡범들이라도 적당히 포장해서 보낸 것이다.
물론 조정 내에서는 선정릉을 도굴한 진범을 내놓을 때까지 절대 화의를 맺어선 안 된다는 여론도 만만찮았으나 결국 이대로 질질 끌면 쓸데없는 소모전이 될 뿐이라는 여론이 더 우세해 이쯤에서 덮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그들의 입을 열기 위해 고문까지 해버려서 아무리 범죄자들이라 한들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
이후에 논의된 문제는 그 가짜 범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로 옮겨갔다. 이덕형은 이 가짜 범인들을 다소 동정했는지[9] 김해나 양산으로 귀양을 보내서 살게 하자는 방안을 건의했지만, 다른 대신들은 비록 저들이 가짜이긴 해도 살려줬다간 입을 놀리다가 벌어질 일이 두려웠는지 처형하자고 했다. 이들이 완전히 무고한 것도 아니고 어찌 됐건 대마도에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였기 때문에 결국 1606년 음력 12월 20일에 둘 다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 조정이 두 사람을 처형하는 것으로 끝냈기 때문에 결국 진범은 붙잡지도 못했고 진짜 왕과 왕비의 시신은 찾지도 못한 채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한편 이 사실이 일본 중앙 정계에 알려진 것은 거의 30년 뒤인 1620~30년대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아무리 대마도가 송환을 직접 했고, 처형당한 인물들이 범죄자라곤 해도 엄연히 일본국 백성을 조선이 데려가 사형시켜버린 상황이었기에 문제를 제기할 소지는 있었다.[10] 하지만 도굴 사건의 피해국인 조선에서 이미 덮어버린 사안을 구태여 다시 들춰서 시끄럽게 했다가 조선에서 도굴 사건을 다시 들먹이면 일본 입장에서 난처해질 것이 분명한 지라 결국 일본에서도 덮는 걸로 끝났다.
[1] 아예 죄가 없지는 않았고 잡범으로 대마도에서 잡혀서 압송된 죄수들이기는 했지만 결과는 가혹했다.[2] 임진왜란 때면 중종이 죽은 지 거의 50년이 넘어가던 무렵이다.[3] 당시 조선에서 포백척의 1척이 46.6cm인 것을 보면 149cm 정도의 신장이 나온다.[4] 대마도는 들이 적고 숲이 많은 곳이라 농사 짓고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먹고 살 길은 교역 뿐이었다. 다만 대마도에 워낙 나무가 많고 그 나무들의 목재로 쓸 수 있을 만큼 질이 좋아서 그 섬의 나무들을 몽땅 팔아도 일본 전 국민이 3년은 먹고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기본적인 인구 부양력이 갖춰줘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는데, 대마도의 인구는 21세기 시점으로 봐도 한국의 소규모 군 수준이다.[5]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다이묘들은 모조리 처형, 영지몰수, 유배 같은 처벌이 내려지던 때 정작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 직접 참전해 도쿠가와와 직접적으로 대립한 소 요시토시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소씨 가문과 대마도는 새롭게 집권한 에도 막부가 조선과 다시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필수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이다.[6] 두 사람 다 성씨는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평민들이 성씨를 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위의 한자들은 실제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 조선 측에서 그들의 이름을 듣고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7] 일본측이 범릉 사건의 주범이라고 지목한 인물이다.[8] 당시에 그곳에 없었음을 주장함으로써 무죄를 주장하는 방법. 마타하치와 마코사쿠 두 사람 모두 당시에 서울에 없었음을 주장하였다.[9] 진범이 아니라 일본 측에서 대충 잡아 보낸 것이 훤히 티가 나는 상황이었고, 저들로서는 아무리 사형수일지언정 본인들이 저지른 적도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될 판이니 아무리 조선이 일본에게 이를 갈고 있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동정할 여지가 충분했다.[10] 다만 왕의 무덤을 도굴하는 범죄는 고대나 중세는 물론 현재에도 문화재 훼손에 훼손하는 큰 범죄이기에 애초에 죽을 사람 2명을 조선으로 보낸것이므로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