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총사 샤스포에 대한 내용은 샤스포(천총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Chassepot Fusil modèle 1866 1866년형 소총 | |||
날이 휘어진 야타간식 총검이 독특하다. | |||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종류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볼트액션 소총 | ||
원산지 | [[틀:깃발| | ]][[틀:깃발| ]][[프랑스 제2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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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역사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1866년~1874년 | ||
개발 | 앙투안 알퐁스 샤스포 | ||
개발년도 | 1858년~1866년 | ||
생산 | 생테티엔 조병창 샤텔레로 조병창 튈 조병창 | ||
생산년도 | 1866년~1875년 | ||
생산수 | 2,000,000정 | ||
사용국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그리스 왕국| ]] [[틀:깃발| ]][[틀:깃발| ]][[다호메이 왕국| ]] | ]][[틀:깃발| ]][[프랑스 제2제국| ]]||
사용된 전쟁 | 식민지 확장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
기종 | |||
원형 | 드라이제 | ||
파생형 | 그라 소총 M1866/74 카라비너 M1871 | ||
세부사항 | |||
탄약 | 11mm | ||
급탄 | 단발 | ||
작동방식 | 볼트액션 | ||
총열길이 | 795mm | ||
전장 | 1,310mm (총검 비장착시) 1,880mm (총검 장착시) | ||
중량 | 4.635kg | ||
발사속도 | 8~15RPM | ||
탄속 | 410m/s | ||
최대사거리 | 1,200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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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orgotten Weapons의 리뷰 및 사격 영상 |
2. 상세
이 소총이 채택된 데에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쾨니히그레츠 전투[1]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극초기에 나온 볼트액션 소총인 만큼, 기존에 있던 드라이제를 기반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마냥 드라이제를 베끼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나름의 독자적인 개량을 거쳐 드라이제의 단점이 개선되었다. 드라이제와 비교할 때, 폐쇄돌기 구조를 도입하여 폐쇄 시의 안정성이 높아졌고,[2] 노리쇠에 고무패킹을 적용해 격발 시의 가스압 누출을 막아 드라이제보다 더 빠른 탄속을 낼 수 있었다.[3][4] 다만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다시 전진시키면 자동으로 코킹이 되는 후대의 볼트액션 소총과 달리 노리쇠 후퇴에 앞서 별도의 코킹이 필요한 점은 드라이제와 동일했고,[5] 고무 패킹이 소모품이어서 주기적인 교체가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성능 자체는 당시 유럽에서 흔히 쓰이던 소총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당시 총검들의 추세에 맞게, 전체 길이 70cm를 넘어가는 야타간식 총검이 눈에 띄긴 하지만, 같은 시기에 배치된 신무기 미트라예즈[6] 역시 평가가 좋았던지라, 이 둘은 수뇌부의 큰 기대를 받았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듯 첫 투입된 멘타나 전투에서 가리발디가 이끄는 의용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 의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는 "경이로운 무기"라는 후한 평가를 받았다.
또한 1870년에 터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샤스포는 분명 드라이제를 압도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소총보다는 야포에 집중 투자를 했고, 이에 따라 총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상대가 더 우수한 야포[7]를 들고 오니 프랑스군이라도 GG를 칠 수밖에 없었다.[8] 그리고 훈련도가 낮은 병사들이 지휘관들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발포하여서 명중률이 낮은 것도 패배에 단단히 한몫했다.[9]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프랑스군의 제식 소총으로 쓰이다가, 1874년부터 금속 탄피를 사용하는 그라 소총으로 대체되었다. 이 때 일부 샤스포 소총도 금속 탄피를 사용할 수 있게 개조되었다고 한다. 해군에서는 육군보다 조금 더 오래 운용하다 오스트리아에서 개발된 크로파첵 소총이 도입되면서 퇴역했다.
일본에서의 사용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프랑스와 교류를 하면서 프랑스식으로 군대를 개편하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나폴레옹 3세의 의향으로 2,000정의 초도 생산분이 일본에 공짜로 지원된 전적이 있다.[10] 당시 세계 제일의 소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막부에 맞서던 신정부 측이 상당히 긴장했고, 프랑스 장교단이 직접 훈련시키던 막부 전습대(傳習隊)가 장비하는 등 나름대로 성공의 가망성이 보였지만, 정작 보신 전쟁에서는 단 한 자루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11] 이유는 총만 도착했지 최신 교범이 아직 발간되지 않아서 훈련과 실전은 전장식 라이플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 샤스포는 막부가 항복한 이후 고스란히 신정부가 노획했고, 신정부는 신생 일본군의 주력 소총으로 채택했다.
결국 총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전으로 인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침몰한 비운의 무기.
오히려 샤스포 소총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직후에 일어난 민중 봉기인 파리 코뮌을 진압하는데 효과를 발휘했다. 프랑스 정부군이 파리 코뮌에 참가한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을 탄압할 때, 바로 이 샤스포 소총을 사용하여 무려 2만 명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3. 파생형
- M1866/74
프랑스군이 기존의 샤스포를 대체하고 새롭게 개발한 그라를 배치하자 그에 맞춰 샤스포를 금속 탄피를 쓰는 소총으로 개조한 사양이다. 청불전쟁은 물론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쓰였다고 한다. 그 일부는 기구 격추용으로도 사용되었다.
- 샤스포-카라비너 M1871 (Aptierter Chassepot-Karabiner M1871)
독일 제국군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노획한 샤스포를 마우저 11×60mmR 탄환을 사용할 수 있게 개조한 카빈으로 1875년부터 1884년까지 약 275,000정이 개조되어 작센 왕국과 바이에른 왕국의 기병대에 의해 운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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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 | <colbgcolor=#c7c7c7,#353535> 리볼버 | MAS 1873 · Mle 1892 | |
자동권총 | Mle 1935S · Mle 1950 · PAMAS G1 | ||
기관단총 | MAS-38 · MAS-48 · M12S2 | ||
소총 | 볼트액션 | Mle 1866 · Mle 1874 · Mle 1886 · Mle 1890 · Mle 1892 · Mle 1902 · Mle 1907 · Mle 1916 · Mle 1934 · MAS-36 · FR-F1 · FR-F2 | |
반자동 | RSC Mle 1917 · Mle 1918 · MAS-40 · MAS-44 · MAS-49 | ||
자동 | MAS T62 · FAMAS | ||
기관총 | Mle 1907 · AAT Mle 1952 | ||
대전차 로켓 | LRAC F1 |
[1] 물론 프로이센 왕국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유는 무기의 우수성도 우수성이지만 그보다는 프로이센 왕국군의 현대적인 군사운영과 전시체제가 결정적이었다. 구시대적인 사고가 만연해 있어 협업이 원활하지 않던 오스트리아 제국군 장교들 간의 반목 역시 프로이센 측의 중요한 승리요소였다.[2] 드라이제는 장전손잡이 아랫부분의 정사각형 지지대가 폭발 압력에 의한 노리쇠 후퇴를 막는 방식이었다. 샤스포는 이 사각형 지지대를 길게 연장하여, 약실을 닫으면 이 길게 연장된 지지대가 홈에 딱 맞물려 폐쇄돌기 구실을 하도록 만들어 폐쇄 시의 안정성을 높였다.[3] 탄속 증가는 드라이제의 15.4mm보다 작은 11mm 구경을 채택한 영향도 있었다.[4] 물론 금속탄피의 도입 이후로는 격발 시 탄피가 팽창하여 약실에 밀착되며 가스 누출을 막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 같은 고무 패킹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방식이 되었다.[5] 사실 이것 역시 드라이제 보다 우수했는데 드라이제 소총은 노리쇠 전진 후,후퇴 시 모두 코킹이 필요했지만 샤스포는 후퇴 시킬시에만 코킹을 했기에 드라이제보다 우수했다.[6] 일종의 기관총. 다만 다연발 총신에 다연발 총알을 카트리지로 끼워서, 전탄발사와 연속발사를 선택할 수 있는 특이한 물건.[7] 암스트롱 포보다도 우수한 강철제 포신의 후미장전식 야포였다. 반면 프랑스군은 여전히 청동제 포신의 전장포가 주력.[8] 아이러니하게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보병화력이 승리를 좌우한다는 정 반대의 평가를 받았다.[9] 반면 드라이제를 장기간 운용하면서 실전을 치른 프로이센군은 총의 성능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총에 대한 숙련도는 높았다.[10] 사실 속내는 막부가 이후 창설할 것으로 생각했던 신생 일본국군의 수요로 추정되는 7만여 정을 샤스포로 채우게 될 계기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딜가나 그렇지만 사실 세상에 진정한 공짜는 없다.[11] 일본 내에서도 오해가 많아서, 전습대가 샤스포를 실전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