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리첼렌이 참치 인터넷 어장에서 연재하고 있는 AA작품. 2024년 12월 19일 부터 연재를 시작하였다.제목 그대로 고구려가 삼국통일전쟁에서 승리한 대체역사물,
첫편 링크
2. 국가
2.1. 고구려 → 조선
2.1.1. 고구려
원역사에서 664~5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것과 달리 669년에 죽은 것으로 바뀌었다.토번이 강대해짐에 따라 고구려 전선에서 당나라가 빠지고, 신라와 고구려의 1대1 캐삭빵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연씨 대막리지 막부가 계속 유지되었고, 의도치 않게 양치기들 또한 교화되었다.
발해를 세웠던 대씨는 고구려의 충신으로 남게 되었으며, 그 밖에도 여러 충신들이 멱살잡고 이끌었다.
대씨와 고씨의 동군연합으로서 제가회의를 이끌었으나, 고려주의자인 태왕이 나타나면서 대씨와 대립하기 시작했고 평양을 피바다로 만들며 대흠무가 주도권을 잡았다. 태왕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상국으로서 집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북주[1]와 남주[2]의 31 대가들을 끌어들여 제가회의를 중세의회정으로서 거듭났다.
대흠무가 노쇠한 후 후계자들에게 승계했는데 대씨 막리지와 대씨 대대로를 제끼고 대씨의 피가 흐르는 광덕제가 최후의 승리자가 됐다. 광덕제는 경연에 심취한 유학군주로, 최초로 유학을 도입함으로써 후계국인 조선이 유고를 국시로 삼는데 첫 발단이 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급사 이후 고려말 난세가 시작됐다.
어린 태왕을 두고 왕이 되고 싶은 대씨들이 내전을 벌였고 대씨이지만 광덕제의 충신인 대언의가 승리했지만 제가회의를 향해 칼부림을 벌여서 북주 대가들과 철천치원수로 거듭났고, 남주 소가는 평양을 손에 쥘 기회라고 반겨 대언의의 친위세력이 되며. 북주와 남주가 평양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북주연군의 승리로 대언의는 평양성 저잣거리에 수급이 매달리고, 북주소가인 거란계 경계인 유살덕이 새로운 상국으로 거듭났다.
유살덕은 대흠무를 우상으로 삼아[3] 제가회의를 다시 열고 태왕을 천손으로서 존중했다. 작금의 체제를 끝장내기 보다는 협치함으로써 남주에게 민심을 얻고 북주에게는 앙심을 얻었지만 대흠무와 같은 권위를 가지지 못했기에 북주는 유살덕을 내치고 대흥안령 부근의 실위족인 단보각을 끌여들여 그를 국상으로 만들었다. 유살덕의 아들 유덕식은 남주에서 소가로 목숨을 부지했다.
단보각은 역성혁명의 꿈을 꾸고 있지만 마땅한 명분이나 치적이 없어 명재상 흉내를 냈다.[4] 하지만 단보각은 안씨로 개명하고 대가가 됐음에도 세외촌부였고 2세기 동안 북주를 다스린 북주의 대가, 북주오한들은 단보각을 암살하고 꼭두각시로서 대씨 종가 가주를 국상으로 만들어 내세웠다.
대씨 국상은 당대 강제의 황제인 제영제 인종에게 밀서를 보냈고, 10만 철기를 가진 양치기들이 고려를 잡아먹고 중원으로 역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제영제 인종은 북주오한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남주에서 올라오는 곡물을 중요시하는 대가들과 달리 중원 곡물을 먹이면 되지 않느냐며 북주소가들이 대가들을 배신하여 제영제의 편을 들었고, 북주오한들의 군대는 총력전을 상전하지 않은 내전용 군대였던 만큼 소모를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제영제는 고려의 편의를 봐주어 유덕식을 국상으로 만들고 방계왕족인 묘태왕을 끌어들였다. 또한 오한들이 멸족당한 후 소가들에게 절도사직을 두고 골육상쟁 갈라치기 하여 유리바닥 또한 깨트려 주었다. 이 때문에 북주소가는 다시 고려에 신종하게 되었다.
강제강점기 시기, 고려의 국상이 된 것은 유살덕의 손자이자 유덕식의 아들 유살적이었다. 유살적은 대흠무의 선례로 재상중심제야 말로 고려의 체제라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태왕 묘태왕은 그들을 신임하지 못했고 강제의 천자와 같은 절대황권을 바랐다. 묘태왕은 32 대가들에게 묻혀있던 옛 평양귀족들을 끌여들여 유살적을 죽이고, 북주를 통합한 북주대호 안문각을 끌여들였다. 안문각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지 못한채.
결국 묘태왕은 유살적의 아들이자 고려의 마지막 시중인 유보기가 평양에서 결사항전으로 개성으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그를 따라온 평양권귀는 왕륭의 손에 참살당했고, 끝내 왕륭에게 선양하게 됐다. 하지만 왕륭의 평양권귀 참살은 대씨로 하여금 왕륭이 아닌 안문각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안문각의 북조선과 왕륭의 남한은 7년간의 대립 끝에 안문각의 대승으로서 조선이 개국하게 된다.
2.1.2. 조선
유목중화. 중원에서 강성제국으로 인해 중화가 파괴되고 원역사적 중화는 조선에서 볼 수 있게 됐다.개국 때부터 조제전쟁, 이왕의 난, 반정, 게장, 흑사병 등등으로 정치가 혼란스러웠으나 15세기 중엽 이후 의정부
2.1.2.1. 조선 역대 태왕
2.1.2.1.1. 태조 안문각
"여기 북주사람 안문각의 피눈물을 보아라!!!"
AA는 김 깅가남.
백두대호. 프로토타입 테무친. 독자들이 상상했던 무지개카칸으로, 제경제와 더불어 어장의 슈퍼스타 중 하나이다.
안씨와 실위족은 북주대가들에 의해 몰락하여 한낱 변경 촌부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제영제의 갈라치기로 안문각은 13살에 부하들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목숨을 건지는데 성공하였다. 안문각은 몽골고원까지 쫓겨나 세를 길러 재기에 성공하였다.
안문각이 만든 조선은 고려와는 정반대의 국가이다. 귀족사회와는 대비되는 문치(?)[5]에 기초한 중앙집권국가이며, 신분제에 유동성을 주고자하는 양천제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개국시조로서는 문무양도 완벽했고, 양치기들에게는 구세주였으며, 후대 태왕들에게는 태왕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줬으며, 중원조차 미워할 순 없는 복수귀이자 호적수라고 평가받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흠이 있다면 후계가 망했다 것이다.[하지만]
두번째 조제전쟁에서 대승이란 위업을 거두며 안문각은 숨을 거뒀는데 그와 함께 백두산이 폭발하면서 천손으로서 숭배받게 되었다.[7] 조선태왕들의 절대황권에는 안문각을 숭앙하는 태조신앙의 영향이 적지 않게 있다.
2.1.2.1.2. 태종 안소유
AA는 타카나시 호시노2.1.2.1.3. 세종 안궁
AA는 니오우노미야 이즈무2.1.2.1.4. 고종 안무진
AA는 고죠 사토루조선의 재건국자.
조요전쟁이후 무너져가는 제국을 물려받았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그의 재위 초기는 연해주 출신 경계인인 모후, 소씨 태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그가 장성한 후 인간카피바라이자 현인신으로서 정치색을 보이지 않고 조선 300년간 쌓아온 관례를 존중하며 문치를 하고자 했으나, 조선은 신분적 유동성의 역사였던 만큼 그의 총애를 얻고자하는 지방관들이 업적을 내기 위해 풀칼라 혹사를 시작했다.
몽올기사단이 김요의 잔장 서요를 물리쳐 진초와 외교분쟁을 만드는 일은 물론, 시베리아 정벌까지 하게 됐으니.
강대한 강역을 통치하기 위해 법치와 호랑제국으로서 조선을 재건국하였고, 차르정과 일군만민으로서 종교적 신앙을 끌어들여와 법치제국에게 유도리를 더했다. 정작 그는 사대부의 나라였던 안문각의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반올림해서 반백년동안 피냄새가 빠지지 않으니 안문각의 나라는 실존하지 않은 것인가 라는 의문에 무너져 내렸다.
태왕가에서 드문 가족과 사이가 좋은 태왕이다. 관외출신인 어머니를 사랑하여 꾸준하게 관외 통치를 시도하였고, 아들이자 후대 태왕인 선종 안호는 그의 책사였으며, 위공학자 때문에 66개의 율령국으로 쪼개진 일본에서 대장부 노릇하라고 안씨태후를 보냈다.
1000으로 몇번이나 불려나올 정도로 독자들의 삐뚤어진 사랑을 받고 있다.
2.1.2.1.5. 정조 안유
AA는 게토 스구로2.1.2.1.6. 숙조 안명
AA는 명희2.1.2.1.7. 세조 안찬
AA는 타찬카2.1.2.1.8. 순조 안진
AA는 카와조에 타마키2.2. 제 → 초 → 송
사실 상 이 어장의 주인공 격이었던 국가.
바다건너 교역으로 강세해졌으며, 이로 인해 절도사 중 가장 큰 세력을 세워 당에게 견제를 받았다가 제나라를 세웠다.
이로써 당은 원역에 못 미치는 약 160년의 치세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써 당은 원역에 못 미치는 약 160년의 치세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잘 나가다가 제경제 때 경관을 세우고 그 업보를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제경제는 그래도 후반에 불교를 받아들여 진심으로 참회하였으며 제나라의 전성기를 연 명군이다.
제경제는 그래도 후반에 불교를 받아들여 진심으로 참회하였으며 제나라의 전성기를 연 명군이다.
뭔가 다이스갓의 편애 아닌 편애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 참치들은 이제 보내주자고 아우성이었다.
제나라는 결국 마진에게 패했으며 강성 본가는 당시 샤아 태왕이 모셔와 경주 불국사를 관리하게 했고, 분가는 남쪽 베트남에서 강성 진씨[8]가 초나라를 건국 후 북벌을 나섰지만, 전패를 한다. 분명 강제 때는 나가면 다 이겼었는데.
그러나 마진이 내부적으로 무너져 내려 마지막 황제이자 여황제에게 선양을 받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패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황하 폭룡과 흑사병의 억까를 이겨내고 기어코 천리에게 승리했다. 이때 참치들은 인리는 못 이기면서 천리는 맨날 이긴다 신기해 했다.
황하 폭룡과 흑사병의 억까를 이겨내고 기어코 천리에게 승리했다. 이때 참치들은 인리는 못 이기면서 천리는 맨날 이긴다 신기해 했다.
그러나 후에 상황이 반전 되었는데 바로 주명이 북조로서 등장한 것. 그것도 마흐디교를 국교로하는 나라이다.
주중팔이 마흐디 짭들을 정리하면서 조선에서도 '오랜만에 정통 마흐디 나왔구나!'라는 반응이었다.
주중팔이 마흐디 짭들을 정리하면서 조선에서도 '오랜만에 정통 마흐디 나왔구나!'라는 반응이었다.
안서[9]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안서를 정리했고, 주명은 성지 + 기마병 양성소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 싸움을 걸었다.
그렇게 조선은 장성 북쪽에서 주명과 싸움에서 이겼고, 주명 패잔병을 쫓아 화북으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월남병까지 끌고 온 진초가 조선을 공격했다!
이에 독자들의 반응은 전부 아연 실색이다. 북조를 패는 세외를 북조와 힘을 합쳐 세외를 물리치는 남조라는 어이가 가출한 이야기이기 때문.
갑자기 월남병까지 끌고 온 진초가 조선을 공격했다!
이에 독자들의 반응은 전부 아연 실색이다. 북조를 패는 세외를 북조와 힘을 합쳐 세외를 물리치는 남조라는 어이가 가출한 이야기이기 때문.
이후 어찌저찌 나라가 휘청거리다 진씨친왕들과 여러 유력자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
이어 받은 것은 강성 주씨다.
이어 받은 것은 강성 주씨다.
이 주송은 태조부터가 통수질로 황제가 되었고, 그 이후 광신근황혁명주의자인 이자성이 등장해 나라 꼴이 갖춰지나 싶더니 이자성 죽고나서 더 막장으로 달려나갔다. 이자성 때 황제는 이자성에 기생하는 수준이었고 그 다음 황제는 투자로 자신의 이익만 쫓기 바빴으며 마지막 황제는 매국노 라는 아주 돌아버리겠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결국 민국이 결성되었으며 폐제 주사는 목이 잘렸다. 그 때도 감옥에서 도망쳐서 세외를 불러오려는 매국노 짓을 하려는 짓이 결정적이었다.
2.3. 마진
이 어장의 고유 종교인 마흐디교[10]를 국교로 하는 중화제국.초대 마흐디는 국가에서 지원해 주었던 승단의 승려였고
2대 마흐디는 그 마흐디를 제압하러 갔다가 교화되어 열심히 모은 금군을 그대로 들고 장안으로 회군했다.
3대 마흐디는 사실상 마진을 세웠다고 평가 받았다.
그렇게 강제를 태산에서 무너트리고 치세를 열줄 알았으나, 마고라는 희대의 광인이 마흐디 하겠다고 조카 목을 졸라 죽이는 바람에 나라가 개판이 났다. 결국 보다 못한 공주가 스스로 마흐디로 올라 삼촌을 폐하고 나라의 문을 닫았다. 마지막 여제는 어느 한 적한 절에 들어가 비구니로 생을 마감했다.
2.4. 이한
전주 이씨, 여기서는 중경 이씨가 통치 하였던 국가. 약 백년 동안 성장으로써 초지역을 다스리다 스스로 제위에 올라 한나라를 개창하였다. 그러나 사천 대지진으로 인해 천명을 잃었다 판단되어 멸망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천자가 잘 다스렸다는 판정이 나와 참치들이 안타까워 하였다.
2.5. 대한
준가르조 한나라로 3개국 연합체였다. 지금은 주송의 경제위기 떠넘기기와 학살을 통한 식민지배로 연합체에서 완전한 나라가 되는데 성공했다. 주송의 식민지였다가 식민 본국을 역으로 식민지배하기 시작한 기이한 국가 그냥 주송이 똥볼 차다가 이렇게 된게?
2.6. 일본 -> 부상 -> 비류
원역과 달리 백제와 퓨전 농도가 진해졌으며, 천황이 스스로를 백제왕이라 칭하기도 한다.
사실상 부여천하관에 같이 들어와있는 수준.
사실상 부여천하관에 같이 들어와있는 수준.
오랜 전란이 이어졌던 대륙계와 다르게 섬나라로써 유학 등 학문이 엄청나게 발전 하였으며, 성리학이 일본에서 나왔다.
그러다 위공학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사회실험을 계속 하였으며, 결국 일본이란 나라를 66개의 국가로 해체 시켜버렸다.
이 상황을 보다 못 한 태왕이 개입하여 일본을 재창조하였으며 공주도 보내주었다.
안씨 황후는 아주 기합찬 부여고지능자여서 일본 중앙집권화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사족들에게 맨날 쿠사리를 먹는 상황이었으며, 이게 황제냐 왕이냐 소리를 들었다.[11] 그러다 화봉 천황이 백제왕으로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려 하자사실 대숙청 독자 천하관을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켰으며 성공했다.
그러나 나중에 화봉 천황 자체가 폭군+궁궐 병자라는, 광해군과 비슷한 사람이라 나왔으며 광해군과 달리 치적도 없어서 인조반정이 그대로 일어났다는 수준.
그러나 조선의 무력적 개입이 두려웠던 일본 사족들은 그대로 180도 상황을 바꾸어 절대왕권은 필요악이다로 게다가 초나라에 사대를 했다. 이럴거면 뭐하러 반정을 했냐는 반응이 다수였으나, 화봉 천황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는 다이스에서 치적 없는 광해군이라 나왔기에 반정을 일으킬 수 는 있다는 반응.
결국 협천자 공씨가 화씨에게 선양을 받았으며조승상?, 현재는 사대하면서 치적 쌓기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중간에 삼촌이 조카를 죽이려 했지만 결국 자리를 지켜내었다.
부상국은 그동안 평상주행하였지만 천리를 연타로 맞고 뻣었다. 그동안 식민지인 여송 또한 빼앗겨서 도쿠가와에게 선양하게 됐다.
도쿠가와는 비류의 직계라는 명분으로 나라 이름을 비류국이라 바꿨다.
[1] 말갈과 거란, 돌궐과 모족[2] 신라, 백제, 마한, 탐라[3] 대흠무가 그의 생전에 대조영부터 대흠무까지의 역사를 대씨에게 유리하게 굉장히 상세하고 교훈적으로 다룬 사서를 집필했다고 유씨집안은 이때 은혜를 입은 집안이라고 후판정 하게 됐다.[4] 당시 중원의 황제는 전륜성왕으로 숭배받는 제경제 세조이었기 때문이다.[5] 정작 제대로 된 문치가 성공한 것은 9대 태왕 안문호로, 그 역시 반정으로서 왕위에 올랐고 문치는 경화사족과의 화해하고자 하는 떡고물이었다.[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서장자는 유씨 소생으로 몸이 약했고, 적장자인 안소유는 막둥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강제의 간섭없이 시원하게 내전 하라는 배려(?)라고도 할 수 있다.[7] 안문각 평가 中 경극 작가들 "햐, 다시 생각해도 그 양반 마지막은 낭만 뒤졌다!"[8] 당시 초태조는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 싶었지만 못 한 것으로 나온다. 리첼렌의 말로는 이정도로 뭉쳤다면 다음은 초 태조라는 합의가 있었다는 듯.[9] 일단 조선의 번후[10] 마흐디교란 불교에 이슬람을 섞은 습합 종교이다.[11] 일본의 천하관 자체가 부여천하관이랑 섞인 탓도 있으며, 백제왕의 칭호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재조지은 또한 조선에게 2~3번 정도 입었기에 반쯤 속국이었던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