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남문 일대
유적지 주요부 일대
1. 개요
불가리아어 Велики Преслав영어 Veliki Preslav
불가리아 북동부의 역사 도시. 슈멘에서 서남쪽으로 12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하고, 인구는 약 8천여 명이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전성기 시절 (893년 ~ 972년)의 수도였고, 본래 그냥 프레슬라프 (Преслав)였으나 1993년에 '위대한 프레슬라프'란 뜻인 벨리키프레슬라프로 개칭되었다. 유적 자체는 9세기에 세워져 13세기 후반까지 도시로 유지되었고, 킵차크 칸국에게 파괴된 이후 그 북쪽에 현재의 시가지가 세워졌다. 동로마 제국 및 몽골 제국의 철저한 파괴로 옛 흔적은 많이 남지 않았으나 남문과 둥근 성당 등은 일부 복원되었다.
2. 역사
10세기 중반 프레슬라프의 복원도
중심 성당이던 둥근 성당의 주요부 모습
본래 슬라브 인들이 살던 마을이었다가, 9세기 초엽 불가리아의 칸 크룸이 기존 수도이던 플리스카에서 서남쪽으로 20km 떨어진 평원에 도시를 세웠다. 이후 조금씩 발전하여 9세기 후반 보리스 1세 시기에는 대장군 직책인 이치르구-보일이 상주하는 군사 거점이 되었고, 864년 불가리아의 기독교 개종 후 여러 성당이 세워졌다. 889년, 보리스 1세의 퇴위로 즉위한 아들 블라디미르는 기독교를 박해하며 다신교를 재차 국교화하려 했다. 이에 892년, 수도원에서 나온 보리스 1세가 프레슬라프의 귀족 회의에서 아들을 폐위하고 주교이던 차남 시메온 1세를 추대했다. 시메온 1세는 기독교 배척 기류의 중심이던 플리스카에서 프레슬라프로 천도했다. 이때 왕궁 및 대성당과 함께 886년 플리스카에 세워졌던 문법 학교도 이전되었고, 많은 학자들이 뒤따랐다.
그후 80여년간 이어진 불가리아 제국의 최전성기에 프레슬라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발칸 반도 최대 도시로 성장했고, 불가리아 및 슬라브 문화가 함께 꽃피웠다. 프레슬라프 문법 학교는 키릴 문자를 발전시켰고, 왕궁과 둥근 성당은 방문자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도시는 또한 자기, 타일, 이콘, 성상장막 (iconostase) 등을 생산했다. 보리스 1세와 페터르 1세 시기에 발전하던 도시는 970년, 동로마 제국의 사주로 불가리아를 침공한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함락되었다. 972년에는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1세가 북상해 골지마 캄지야에서 키예프 군대를 격파, 잔병들이 도주한 프레슬라프를 포위해 함락한 후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써 프레슬라프는 동로마 령이 되었고, 보리스 1세는 포로가 되었다. 요안니스 1세는 불가리아 황관과 시메온의 도서관 장서들 등 귀중품을 약탈했고 프레슬라프를 이온누폴리스라 명명했다. 986년경 불가리아 제국 부흥에 나선 차르 사무일이 프레슬라프를 회복했지만, 1001년 바실리오스 2세가 정복해 다시 동로마 령이 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프레슬라프를 신설한 불가리아스 테마의 치소로 삼았고, 많은 병력을 주둔시켜 불가리아 인들을 통제했다. 11세기 후반 무렵 프레슬라프는 그리스어로 '메갈레 페리스틀라바'라 불렸다. 2세기 가까이 동로마 지배를 받은 후 12세기 말엽, 이반 아센 1세와 페터르 4세가 대대적인 봉기 (아센과 페터르의 난)를 일으켜 불가리아 제2제국을 세울 때에 형제는 각각 벨리코터르노보와 프레슬라프를 수도로 삼았다.
1196년 벨리코터르노보의 이반 아센 1세가 암살당하자 페터르 4세는 그곳으로 향해 찬탈자 이반코를 격파하고 동생 칼로얀을 서부의 차르로 옹립했다. 이듬해 페터르 4세 역시 암살당하자 칼로얀이 단독 차르가 되었고, 제국의 수도도 벨리코터르노보로 고정되었다. 이로써 쇠퇴하던 도시는 1242년 바투의 불가리아 침공 시에 몽골 제국군에게 파괴되었다. 다만 곧 재건되었고, 1257년에는 콘스탄틴 아센 1세에게 찬탈당한 차르 미초 아센이 프레슬라프와 메셈브리아를 거점으로 1263년까지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1270년대에 몽골계 국가인 킵차크 칸국이 불가리아를 침공했을 때에 프레슬라프는 크게 파괴되었다.
몽골군이 물러간 후 살아남은 주민들은 파괴된 도시 북쪽에 새 도시를 세웠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1337년에 제국을 통합한 이반 알렉산더르는 아들들을 각지의 데스포티스 (친왕)로 봉하며 이반 아센 4세를 프레슬라프에 분봉했다. 다만 이반 아센 4세는 1349년 오스만 제국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따라서 그의 봉토는 후일 이반 시슈만의 영토로 편입된다. 1388년 무라트 1세는 세르비아 원정 시에 병력을 보내지 않은 이반 시슈만에 대한 보복으로 프레슬라프와 플리스카 일대를 정복하며 후자를 니코폴 일대로 몰아세웠다. 오스만 시기에 프레슬라프는 작은 마을로 전락했고, 1993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3. 볼거리
궁전 유구 일대
둥근 성당 입구 부분
남문 일대
성벽 유구
3.1. 프레슬라프의 보물
1978년 프레슬라프 북쪽 2km 지점의 포도밭에서 발견된 보물로, 970년대 키예프-동로마 침공기에 불가리아 귀족 혹은 왕족이 약탈을 피해 숨겨두어 보존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