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1 19:32:26

베트남 대기근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어록3. 상세4. 기타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1. 개요


1945년, 베트남 북부에서 일본 제국이 자행한 대량 학살로 약 200만 명의 베트남 국민이 굶어서 죽은 비극적인 사건이다. 베트남에서는 이 대량 학살을 'Nạn đói năm Ất Dậu 1945(1945 을유년 대기근)'으로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 대량 학살을 '1945年ベトナム飢饉(1945년 베트남 기근)'로 부른다.

2. 어록

"우리는 다시는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ㅡ 베트남 국부 호찌민
"1945년 베트남에서 끔찍한 대기근을 초래한 주범은 일본과 프랑스이며, 주된 책임은 일본에게 있다."
ㅡ 베트남역사연구원 前 원장 반 타오 ㅡ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잔혹 행위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용서했지만,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여전히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 이는 일본이 처음엔 인도차이나의 해방자를 자처했지만, 곧 가증스럽고 억압적인 점령자로 변했기 때문이다."
ㅡ 베트남 前 외무장관 구엔 코 탁 ㅡ

3. 상세

태평양 전쟁을 치르던 일본 제국은 보호령이라는 명목으로 1940년부터 베트남에 일본군을 주둔시켰고, 1944년 베트남 북부에 진주한 일본군은 약 10만 명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베트남은 1940~1945년까지 비시 프랑스일본 제국의 이중지배를 받는 독특한 식민통치체제 하에 놓이게 된다. 베트남은 겉으로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국이 베트남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비시 프랑스는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베트남을 통치해야만 했다.[1]

1940~1945년까지 약 6년 동안, 일본군은 베트남 전역에서 쌀을 대대적으로 수탈하여[2] 군량미로 비축하거나 일본 본국으로 반출하였다.[3] 아울러, 벼와 옥수수 경작지를 산업작물 재배지로 전용하고, 면화·황마·대마·고무 등을 강제로 생산하게 하여 이를 전쟁물자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베트남의 식량 생산량은 해마다 감소하였고, 가구당 가용 식량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44~1945년, 베트남 북부에 잇따른 홍수와 가뭄으로 극심한 식량 부족이 발생하였고 대기근의 위기로 이어졌다. 일본 제국은 창고에 비축된 군량미를 활용해 구호에 나서야 했지만[4], 베트남독립동맹회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북부 지역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군량미 배급을 고의로 차단하였다.[5] 또한, 일본군은 철도와 도로를 군사용으로만 이용하도록 제한하여, 남부 지역의 쌀이 북부 지역으로 수송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았다.[6] 비시 프랑스 식민 행정부 역시 이러한 일본 제국의 악행을 묵인하고 방관하였다.[7] 그 결과, 1944년 10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약 8개월 동안 베트남 전체 인구 약 2,000만 명 중 무려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북부 지역에서 집단 아사(餓死)하는 참극이 벌어졌다.[8][9]

베트남 대기근은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제국일본군이 자행한 전쟁 범죄 중 규모가 가장 큰 대량 학살로 평가된다. 참고로 일본이 중국에서 자행한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는 약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류 역사에서 몇 달 사이에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베트남 대기근은 아일랜드 대기근,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나란히 거론될 만큼 잔혹한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다.

4. 기타

  • 1960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 중 발생한 베트남 피해에 대한 배상금으로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에 3,900만 달러를 지급했다. 이 배상금은 남베트남과의 경제협력 명목으로 남부 지역 주민 2만 명에게 분배되었으며, 1인당 약 1,000달러씩 지급되었다. 일본 정부는 베트남 대기근이 북부에서 발생했는데, 배상은 남부에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다. 하물며 200만 명 피해자 가운데 1%인 2만 명에 대한 배상만 하였으며, 그 2만 명도 남부 지역 주민들이기에 충분한 조사와 타당한 기준에 따른 배상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일본 정부는 베트남 대기근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10] 일본은 침묵을 통해 전후 책임을 회피하는 소극적 방식으로 과거사를 처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일본군의 동남아 진출이 서구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왜곡된 망언을 담고 있어, 이는 베트남 내에서 깊은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베트남 대기근을 추모하는 기념관과 추모비는 하노이 동남부의 빈뚜이[11] 지구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그 규모가 작고 시설이 낙후되어 200만 명이 희생된 참사의 역사적 비중에 비해 도외시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베트남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프랑스 식민주의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만, 정작 베트남 대기근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12] 이로 인해 베트남의 젊은 세대들 중에는 대기근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 베트남 대기근 당시 참혹하고 비참한 여러 일화 등이 전해진다. 굶주린 베트남 사람들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본군 기병대 군마의 배설물 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곡식을 건져서 먹었다는 증언 등도 전해진다.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da251d><colcolor=#ffd700> 고대 반랑 (문랑)
어우락 (구낙)
남비엣 (남월)
찌에우 왕조
한나라 - 한 구군 참파
남비엣 (남월)
쯩 자매의 난
한나라 - 교주
자오찌 (교지)
사씨 정권
중국 남조 - 교주
반쑤언(만춘)
전 리 왕조
중국 남조 - 교주
중근세 안남
응오 왕조
십이 사군 시대
다이꼬비엣 (대구월)
딘 왕조 | 전 레 왕조
다이비엣 (대월)
리 왕조 | 쩐 왕조
다이응우 (대우)
호 왕조
명나라 - 교지 다이비엣 (대월)
후 쩐 왕조
다이비엣 (대월)
후 레 왕조
막 왕조 후 레 왕조
후 레 왕조{{{#!wiki style="margin:-5px -5px -12px" 다이남 (대남)
찐씨 정권
꽝남 (광남)
응우옌씨 정권
}}}
떠이선 왕조{{{#!wiki style="margin:-5px -5px -12px" 귀인 정권 부춘 정권 }}}
근대 다이남 (대남)
응우옌 왕조
안남
응우옌 왕조
프랑스 - 코친차이나
프랑스 - 인도차이나 연방
일본 제국 - 베트남 제국
현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프랑스 -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
베트남국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bgcolor=#536349><rowcolor=#fff>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발발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발발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라플란드 전쟁 발발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전쟁범죄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A급 전범
평화에 대한 죄
사형수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마쓰이 이와네 무토 아키라
이타가키 세이시로 히로타 고키
복역수
가야 오키노리 고이소 구니아키 기도 고이치 도고 시게노리 미나미 지로
사토 겐료 스즈키 데이이치 시라토리 도시오 시마다 시게타로 시게미쓰 마모루
아라키 사다오 오시마 히로시 오카 다카즈미 우메즈 요시지로 하시모토 긴고로
하타 슌로쿠 호시노 나오키 히라누마 기이치로
피의자[1]
히로히토 천황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고노에 후미마로 코다마 요시오 고이즈미 치카히코
구즈 요시히사 기시 노부스케 나가노 오사미 니시오 도시조 다니 마사유키
다다 하야오 다카하시 산키치 데라시마 겐 도쿠토미 소호 마사키 진자부로
마츠오카 요스케 사사카와 료이치 사토미 하지메 쇼리키 마츠타로 스마 야키치로
아모 에이지 아베 겐키 아베 노부유키 아오키 카즈오 아카기 고헤이
안도 기사부로 오카와 슈메이 오타니 게이지로 이사하라 히로이치로 이와무라 미치요
하시다 구니히코 혼다 구마타로 혼조 시게루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범죄 사건
학살 사건 베트남 대기근 | 난징 대학살(100인 참수 경쟁) | 마닐라 대학살 | 밀리환초 학살 | 바탄 학살 | 보르네오 학살 | 중국 북부 학살 | 치치지마 식인 사건 | 파푸아뉴기니 학살 | 팔라완 학살 | 베허호 사건 | 아라시함 포로 학살
생체 실험 731 부대 | 규슈대학 생체해부
전시 강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노역 정신대 | 죽음의 철도 | 하시마
정치적 추종 세력 및 사상
순국7사묘 · 신사본청 · 야스쿠니 신사 · 팔굉일우 · 일본의 우경화(넷 우익) · 일본의 역사왜곡 · 일본의 피해자 행세 · 일본회의 · 국가신토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 애국 비즈니스
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공식적으로는 이들은 무죄이다.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
}}}}}}

[1] 1940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프랑스가 패망하자 비시 프랑스 정권이 수립되었고, 베트남 내에서 군사적 기반이 약했던 비시 프랑스는 일본 제국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과의 동맹 관계로 인해 베트남 내의 비시 프랑스를 섣불리 축출할 수 없었으나,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자 비시 프랑스를 축출하고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베트남에 대한 직접 통치를 단행하였다.[2] 쌀을 강제로 싸게 매입하였고, 쌀을 숨기면 폭행·고문을 하고 빼앗았다.[3] 일본은 매년 70~110만 톤의 베트남 쌀을 국외로 반출한 것으로 알려졌다.[4] 일본군은 해마다 수백만 톤의 쌀을 공출하였기에 군수 창고에는 쌀이 가득 쌓여져 있었다.[5] 일본 제국은 베트남 내 독립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지층인 베트남 농민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6]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군의 철도·도로 파괴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7] 일본 제국만큼은 아니지만, 비시 프랑스 또한 쌀을 수탈하고 비축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8] 베트남 인구의 약 10%가 기근으로 사망하게 된다.[9] 베트남역사연구원 前 원장 반 타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45년 일본의 베트남인 대량학살과 관련된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질 경우, 현재 확인되는 200만 명의 피해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10] 일본의 일부 민간단체에서는 베트남 대기근에 대한 조사와 사과를 하였다.[11] Vĩnh Tuy[12] 피상적인 수준으로 서너 줄만 적혀져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