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0 12:54:00

버머와 래저러스

파일:버머와 래저러스.jpg

그림 왼쪽에 있는 견공이 버머, 오른쪽이 래저러스. 맨 왼쪽의 인물은 자칭 미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황제 노턴 1세.

1. 개요2. 생애3. 노턴 1세와의 관계4. 래저러스의 죽음5. 버머의 죽음

1. 개요

Bummer & Lazarus

186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돌던 한 시대를 풍미한 견공들. 버머는 하얀색과 흑색 뉴펀들랜드 종이고 래저러스는 믹스견이다. 둘 다 뛰어난 쥐잡이 실력으로 유명했다.

2. 생애

버머는 1860년에 프레더릭 마틴 선술집 밖에서 생활하는데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뛰어난 쥐잡이 실력을 입증하며 스트리크닌[1]으로 독살당한 브루노의 뒤를 이어 영역의 권력자로 군림한다.

그리고는 몽고메리가의 행인들과 술집 손님들로부터 먹을 것을 얻어가며 생활하다 1861년 자신보다 더 큰 개와 싸우던 래저러스를 구하며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래저러스는 싸움에서 얻은 다리의 상처로 죽어갔지만, 버머의 극진한 간호로 살아남아 버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게 된다. 행인들은 래저러스의 뛰어난 회복 능력을 보고 예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라자로와 같은 꼴이라며 그에게 래저러스란 이름을 붙여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래저러스라는 녀석이 버머보다 뛰어난 쥐잡이 개였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팀이 되면서 시너지 효과로 효율이 더 높아져서 20분만에 85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실력에 도시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틴의 선술집은 곧 신문기자들에게 기사를 쓰기 위한 최고의 장소가 된다. 술도 마시고 기사도 쓰고 그리고 기자들은 자신들이 술집에서 놀지만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기사를 열심히 퍼가요 퍼날라서 곧 유명한 스타가 된다. 당시 신문인 <Californian>, <Daily Alta California>, <Daily Morning Call>, <Daily Evening Bulletin> 등이 그들로 날로 기사를 먹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 신문기자들은 서로 경쟁이 붙어서 이 둘을 모험을 더욱 사실감이 넘치게 묘사하기 위해 이 둘을 의인화하는데 버머는 독실한 빈털털이 신사로 나오고 반대로 래저러스는 교활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제멋대로인 친구로 나온다. 특히 버머가 다리에 총을 맞아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래저러스가 다른 개를 찾아가자 신문은 신나서 "목숨을 살려준 은혜도 모르는 똥개로부터 배반당하다"라는 헤드라인을 써낼 정도였다. 그리고 버머가 회복해 래저러스가 다시 돌아오자 신문은 또다시 신이 나서 기사를 찍어내기 시작한다.

이 둘은 도로를 점거하다가 1862년 래저러스가 개잡이한테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분노한 시민이 폭동을 일으켜 그 둘의 석방과 자유로운 방황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시에선 래저러스를 풀어주며 그 둘은 떠돌이 개와 관련된 법률로부터 자유롭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둘은 일주일 후에는 도망가는 말을 붙잡는 전공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명성에도 버머는 킬러에다가 도로의 개들과 매번 싸우는 문제견이었고, 래저러스는 도로의 개들과 매번 싸우는 버머를 거들거나 짖으면서 응원하거나 둘이 함께 주인이 잠가둔 가게 안을 뒤지는 것도 예사였다는 문제견들이었다고 한다.

3. 노턴 1세와의 관계

하지만 이 둘이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미국의 황제를 자처하고 다녔던 노턴 1세와 함께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턴 1세를 이 둘의 주인으로 알기도 하지만 일단 그것에 대한 정확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만화가 에드워드 점프가 이 셋을 한 컷에 그려서 그런 인식이 있다고 한다. 정작 노턴은 맨 위에도 있는 셋이 있는 그림을 보고 어떻게 저런 하층 개들과 나를 같이 그려 넣을 수 있느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도까지만 해도 노턴은 이 두 견공의 주인으로 인식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 디킨슨의 다음 문구.
Bummer and Lazarus went everywhere with him. No theatrical performance opened in San Francisco from 1855 to 1880 that three complimentary tickets for the first row of the balcony were not put aside for Bummer and Lazarus and Norton I, Emperor of the United States.
버머와 래저러스는 와 어디든지 함께 다녔다. 1855년에서 1880년까지 버머, 래저러스, 미합중국의 황제 노턴 1세, 이 세명을 위한 발코니 첫 번째 줄 좌석의 공짜 티켓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그 어떤 공연도 시작하지 않았다.
-San Francisco is My Home-

4. 래저러스의 죽음

1863년 10월 샌프란시스코 만화경에서 죽었다. 사무엘 딕슨은 그가 소방차 바퀴에 충돌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같은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한 남자아이를 문 뒤에 어떤 사람이 준 쥐약이 든 고기를 먹고 죽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샌프란시스코는 범인을 찾기 위해 50$를 걸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점프에서는 노턴 1세교황으로 분장하고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만화를 그렸고 사람들은 그를 유명한 인사의 무덤 옆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꽤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에 참가했으며 그의 단짝 버머도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래저러스는 묻히지 못하고 박제되어 마틴의 선술집 안에 전시된다. <Daily Evening Bulletin> "Lament for Lazarus"라는 이름을 가진 둘의 모험을 찬양하는 래저러스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내기도 했다.

5. 버머의 죽음

파일:버머와 래저러스 죽음.jpg

1863년 10월 래저러스가 살해당한 뒤에는 혼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마크 트웨인은 그가 검은색 강아지를 데리고 있다고 했으나 그후에 그 강아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거기다가 그의 단짝 래저러스가 사라진 뒤 그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사그라져서 조용히 지내다가 1865년 11월 헨리 리피라는 술 취한 인간에게 차이는 일도 벌어졌다. 비록 언론의 관심을 잃었다고는 하나 버머가 그런 폭력을 당할 개는 아니었다. 시에서는 즉시 헨리를 구속하고 대중 정의에 의해 징역을 살게 된다. 그의 감방 룸메이트 데이비드는 그의 죄목을 알자마자 바로 콧방망이를 날려버렸을 정도.

이후 버머는 노환 탓에 여러 사람의 간호 속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버머의 죽음은 래저러스의 죽음처럼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나 그를 기리기 위해 상단에 있는 삽화를 실어줬다. 특히 마크 트웨인은 그를 위해 추도연설을 썼다. 래저러스는 전성기에 돌아가서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버머는 세간의 관심이 식은 뒤 조용히 자연사한 탓에 아무도 몰라주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글이다.
The old vagrant 'Bummer' is really dead at last; and although he was always more respected than his obsequious vassal, the dog 'Lazarus,' his exit has not made half as much stir in the newspaper world as signalised the departure of the latter. I think it is because he died a natural death: died with friends around him to smooth his pillow and wipe the death-damps from his brow, and receive his last words of love and resignation; because he died full of years, and honor, and disease, and fleas. He was permited to die a natural death, as I have said, but poor Lazarus 'died with his boots on' - which is to say, he lost his life by violence; he gave up the ghost mysteriously, at dead of night, with none to cheer his last moments or soothe his dying pains. So the murdered dog was canonized in the newspapers, his shortcomings excused and his virtues heralded to the world; but his superior, parting with his life in the fullness of time, and in the due course of nature, sinks as quietly as might the mangiest cur among us. Well, let him go. In earlier days he was courted and caressed; but latterly he has lost his comeliness - his dignity had given place to a want of self-respect, which allowed him to practice mean deceptions to regain for a moment that sympathy and notice which had become necessary to his very existence, and it was evident to all that the dog had had his day; his great popularity was gone forever. In fact, Bummer should have died sooner: there was a time when his death would have left a lasting legacy of fame to his name. Now, however, he will be forgotten in a few days. Bummer's skin is to be stuffed and placed with that of Lazarus.
늙은 부랑견 ‘버머’가 마침내 정말로 죽었다.
그는 언제나 아첨이나 해대던 그의 부하 ‘래저러스’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았거늘,
그의 죽음은 래저러스의 죽음처럼 신문 세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자연사했기 때문이리라.
친구들이 곁에서 그의 베개를 고쳐주고,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주며,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애정과 체념의 말을 들어주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긴 세월과 명예, 그리고 병과 벼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안고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는 자연사가 허락되었지만,
불쌍한 래저러스는 ‘부츠를 신은 채로 죽었다’[2]—즉, 폭력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거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채 불가사의하게 숨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살해당한 개는 언론에서 미화되어, 그 잘못은 눈감아지고, 미덕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반면 오히려 그보다 뛰어났던 버머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생을 다하자,
마치 흔히 볼 수 있는 초라한 똥개의 죽음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그래. 이제 그를 보내주자. 한때 그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귀여움을 받았지만,
말년의 그는 매력을 잃었고, 자존심마저 사라졌으며,
동정과 관심을 잠시라도 되찾기 위해 비열한 속임수까지 서슴지 않았다.
누구든 그 개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엄청났던 인기는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다.

사실, 버머가 더 일찍 죽었더라면 그의 죽음은 그 이름에 불멸의 명성을 남겼겠건만,
이제는 불과 며칠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겠지.

버머의 가죽은 박제가 되어 래저러스의 가죽과 함께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후 버머 또한 역시 래저러스처럼 박제되어 전시되는 운명이 된다. 1906년 버머와 래저러스는 Golden Gate Park 박물관[3]에 기증되어 창고에서 지내다가 1908년에 파괴된다.

[1] strychnine. 알칼로이드의 일종으로, 신경 독성이 있어 척추동물에게 근경련과 질식을 유발한다. 옛날에는 변비약, 각성제, 소화제나 늑대 등의 유해한 야생동물을 구제(驅除)하기 위한 독약으로 쓰이는 등 폭넓게 사용되었다.[2] 미국의 관용어. 신발을 벗은 채 침대에서 평온히 죽은 것과는 대비되게 부츠를 신은 채 전장에서 뛰어다니다가 죽었음을 은유한다.[3] 지금은 M. H. de Young Memorial Museum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