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09 17:13:51

박병하

1.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병하2.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박병하3. 광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병하

1.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병하

성명 박병하(朴邴夏)
생몰 1905년 2월 4일 ~ 1940년 9월 28일
출생지 전라남도 나주군 영산포읍 산정리 300번지
묘소 서울 국립현충원 안장
훈격 건국훈장 애국장 (2021년 8월 15일 추서,
제76주년 광복절)
자손 장남 명윤, 차남 명활
파일:묘비.jpg
요약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중
박병하는 송정리보통학교(松汀里普通學校)와 송정리중학원(松汀里中學院)을 졸업한 후, 1927년 이경채(李景采)와 함께 서적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통한 민족 독립을 계획하였다.
1928년 3월 이경채와 함께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민족독립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실현하기 위하여 선전 격문을 작성해 주요 관공서에 부착•배포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4월 4일 자신의 집에서 이경채와 함께 격문을 인쇄하여, 4월 11일 광주역 앞 경찰관파출소 게시판과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通學校) 앞 전신주, 광주 송정리 신사(神社) 등에 부탁하였다. 이어 4월 14일부터 17일까지 이경채와 함께 우편을 통하여 전라남도 내 각 중등학교와 경찰서 등 주요 관광서에 격문을 배포했다.
당시 광주 지역에 여러 사회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문서 배포 활동은 처음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탐지한 일제 광주경찰서(光州警察署)와 호남선 송정리(松汀里) 경찰관주재소 경찰에 의해 1928년 4월 18일 이성태(李成泰) •양영일(梁永日) •이상근(李相根)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8년 10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대정) 8년 제령(제령) 제7호 위반’과 ‘치안유지법(치안유지법) 출판법(출판법) 위반’ 등을 이유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징역 9월로 감형되었고, 1929년 7월 12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31년 무렵 일본 도교로 이주하고 대정정(大井町)에 위치한 김택전구(김澤電球) 제작소에서 직공으로 일하였다.
1932년 6월 무렵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청년동맹 성남지구 오르그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공산청년동맹 성남지구 스포츠연맹 조직책으로 활동하며 반제국주의 운동과 조직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을 탐지한 도코경시청(東京警視廳) 특고부(特高部) 내선과(內鮮課) 경찰에 의해 1933년 1월 27일 체포되었다.
1934년 9월 20일 도코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후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4월 11일 형 집행이 종료되었다.
정부는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파일:학생.jpg
박병하 의사의 생애
식민지기 항일지식인의 실천과 저항
개요
박병하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지식인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광주 지역의 청년단체 활동을 기점으로 격문 제작·선전 활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지하조직 운영과 사상 교육 활동에 가담하였다. 그의 활동은 단순한 개인의 저항을 넘어, 식민지 조선의 지식 청년들이 실천한 초국적 항일운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초기 생애와 사상적 각성
박병하는 전라남도 나주군 영산포읍 산정리 300 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05 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강제로 이양된 해로, 국가적 주권 상실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그는 1920 년대 후반 청년기에 이르러, 광주 지역 청년 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자주독립과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1929 년 광주 격문 사건과 첫 수형
1929 년 4 월, 박병하는 송정청년회 간부 이경재 등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신사회 건설을 주장하는 격문을 제작하여 광주 일대의 관공서에 부착·배포하는 항일 선전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이 내용은 동년 『조선일보』 보도(1928년 10월 10일자)에도 실명으로 기록되어 실시간 언론 보도의 형태로 남아 있다.
파일:조선일보보도.jpg

일본 내 지하항일조직 활동과 두 번째 투옥
출옥 이후에도 박 의사는 활동을 멈추지 않고, 1931 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조선 유학생 사회 내 항일운동 네트워크에 합류하였다. 그는 1932 년 1 월경, 공청동맹 성남지구 스포츠연맹이라는 조직의 ‘조직책’(핵심 간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조직은 표면적으로는 체육단체의 외형을 띠었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 결사체로, 격문 제작, 독립의식 고취, 청년 규합, 사상 교육 등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해당 활동으로 인해 1933년 1월에 다시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조선 말기의 상황과 순국
박 의사의 말년은 일본의 침략전쟁이 격화되던 시기와 겹친다. 1937 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은 병참기지화되었고, 동원과 통제가 전면화되었다. 창씨개명, 국민정신총동원, 학도병 차출 등 일제의 총력 동원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조선 사회의 공적 공간은 급격히 축소되고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수형과 고문, 장기 구금으로 인해 박 의사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1940년 9월 28일, 해방을 5년 앞둔 시점에 향년 36세로 순국하였다.

사후 평가 및 역사적 의의
박 의사의 순국은 1세와 3세 유아였던 두아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남겼고, 이후 그의 가족은 장기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의 활동은 특정 이념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당시 청년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한 식민지 타도·민족 자립·사회 개혁이라는 공동의 지향 속에 위치한다. 일제하의 조선에서 국내외를 오가며 항일운동을 전개한 그의 생애는, 비정형적이고 다중적인 독립운동의 한 전형으로 평가될 수 있다. 2021 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그의 유해는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박병하 의사는 해방을 보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삶은 조용히 꺼진 불꽃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저항의 기록으로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파일:안장식.jpg

박병하 의사의 생애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

1905 년 2 월 4 일, 전라남도 나주 영산의 산정 마을에서 박병하라는 이름의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해는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였다. 국권을 잃은 나라의 공기는 가라앉은 분노와 깊은 무력감으로 가득했고, 나라의 미래는 어두운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태어난 박병하의 삶은, 그로부터 36 년 뒤 스스로 그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한 청년 지식인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무단통치로 시작된 식민 지배는 3·1 운동 이후 보다 교묘한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전환되었고, 언론과 교육, 사상과 종교까지 모든 영역이 통제되었다. 겉보기에는 평온한 질서였지만, 내부에서는 민족의식이 더욱 단단하게 응축되고 있었다. 학생과 청년들은 비밀리에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었고, 곳곳에서 격문이 붙고 선언문이 돌았다.

그 역사적 긴장 속에 박병하도 청년기의 문을 열었다. 1929 년 4 월, 그는 전남 광주에서 송정청년회 간부 이경재 등과 함께 항일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신사회 건설’과 ‘민족해방’을 주창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광주 일대의 주요 관공서에 부착하고 배포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징역 1 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감옥은 단지 공간적 억압이 아니라,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문이 뒤섞인 생존의 경계였다.

그러나 그 시련은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출옥 후에도 그는 독립운동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1931 년, 그는 일본 도쿄로 건너간다. 당시 도쿄는 조선 출신 유학생들이 학문을 쌓는 곳이자, 민족의식과 사상적 열망이 교차하는 긴장의 공간이었다. 박병하는 ‘공청동맹 성남지구 스포츠연맹’이라는 조직에 참여하게 된다. 이 조직은 겉으로는 체육활동을 내세운 청년단체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조직된 항일지하조직이었다. 그는 이 조직에서 ‘조직책’으로 활동하며 격문을 돌리고 독립의식 고취와 동지 규합에 나섰다. 그러나 1933 년 1 월경,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징역 2 년 6 개월형을 선고받았다.

두 번째 수형 생활은 첫 번째보다 훨씬 더 가혹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의 감옥에서 ‘불온한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견뎌야 했고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1930 년대 후반 조선 사회는 이미 피폐해져 있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은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하였다. 청년들은 학도병으로 차출되었고, 식량과 자원은 일본 본토로 실려나갔으며, 문화와 언어마저 일본식으로 개조되기 시작했다. 나라 전체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잃어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박병하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두 차례의 투옥과 고문, 수형 생활의 후유증은 그의 생을 파괴했고, 결국 1940년 9월 28일, 36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한살, 세살의 두아들이 있었다. 아직 말을 온전히 떼지도 못했을 어린 아이들은, 아버지라는 존재를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 채 시대의 고통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해방을 보지 못했다. 1945 년 8 월, 조국은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박병하라는 이름은 그 빛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광복의 태극기를 휘날릴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로, 어둠 속에서 사라진 이로 남았다.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로 분류된 그는 무명의 학생 [1]박병하로 80년 넘는 세월을 전북 김제시 공덕면 제말리의 공동묘지에 묻힌채, 후손 두아들의 마음속에 비밀스런 독립운동가로 기억됐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잊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이후 60년이 흐른 2005년에 여운형, 권오설, 조동호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게 서훈하였다.
박병하 의사의 이름 역시 정부의 적극적인 독립유공자 조사 노력이 결실을 맺어 세상에 밝혀졌다.
박 의사는 2021 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비로소 그의 이름은 무명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서 영웅 독립운동가로 불리게 되었고, 한 시대의 그늘 속에서 꺼지지 않던 불꽃 하나가 다시 역사의 기록 속에서 살아났다.
파일:안장식행렬.jpg
"아버지, 아버지께서 훌륭한 일을 하셨기 때문에 훈장까지 타셨고, 오늘 여기에 모십니다. 이제 편안한 세월 보내세요."
- 2023년3월 현충원 안장식 후 봉안실에서, 장남 명윤(1937년생)

2.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박병하

성명 박병하(朴秉夏)
생몰 ? ~ ?
출생지 미상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박병하는 1919년 4월 이상룡이 유하현 고산자에서 조직한 한인기구단체인 한족회(韓族會)의 통수(統首)를 역임했다. 그러나 1920년 4월부터 1921년 2월 사이에 한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제의 탄압 때 서간도 지역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병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광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병하

성명 박병하(朴炳夏)
생몰 1847년 12월 28일 ~ 1910년 8월 27일
출생지 전라남도 광양군 흥덕면 백운리
사망지 전라남도 광양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병하는 1847년 12월 28일 전라남도 광양군 흥덕면 백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생으로,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발표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통분하여 만시(挽詩)를 짓고 단식 투쟁을 하다 8일만인 8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병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생전 벼슬을 하지 않고 죽은 사람의 명정에 쓰는 존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