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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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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기성.jpg
출생 1907년 6월 1일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사망 1991년 2월 1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이명 어우양쥔(歐陽軍)[1], 이수현(李守鉉, 李壽鉉)[2]
학력 요쓰야소학교 (졸업)
가이세이 중학교 (졸업)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파일:군복을 입고 말을 탄 박기성.jpg
말을 타고 찍은 사진.

1. 개요2. 생애
2.1. 해방 이전 생애2.2. 광복 이후 생애
3. 여담

1. 개요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해방 이전 생애

1907년 6월 1일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서 박문용과 연철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외가가 있는 증평군도안면 화성리로 이사했고, 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우고 15세 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익혔다. 1919년 3.1 운동이 확산되며 4월 10일 도안면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천안 고모댁에 방문 중 천안소학교를 구경한 것을 계기로 신학문을 익히기로 결심하여 도안면 강습소에 등록하고 2년 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1924년 셋째 외삼촌인 연동희에게 여비 40원을 얻어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본 유학 전 일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로 부터 동경유학생들이 압박을 많이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힘으로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그는 일본의 요쓰야소학교 야간부 속성과(소학교 5, 6학년 과정)를 1년 만에 졸업하였다. 당시 나월환이 소학교 동기로 함께 학교에 다녔다. 소학교 졸업 후 가이세이 중학교 야간부를 다녔고, 1926년 6.10 만세 운동 이후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원심창, 한하연 등과 교류했다.

1927년 도쿄 요요기 광장에서 예정된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하려다 일본 경찰에 연행되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히고, 1928년 정찬진, 홍영유 등과 도쿄에서 한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자유청년연맹'을 조직했다. 당시 제일 친일단체인 '상애회'의 박춘금을 습격하고자 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929년 귀국해 일제의 감시 속에서 귀향하였고, 2개월 간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후 나월환의 누나의 도움으로 중국 망명 준비를 하였다. 이후 집에서 땅문서를 훔쳐 100원의 여비를 마련하고 인천경찰서에서 도선증명서를 받아 1931년 중국 청도로 망명했다. 이후 친척의 도움을 받아 6월에 남경으로 이동했고, 원심창, 류자명, 정화암, 백정기 등과 지내며 이회영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재정비하였다.
파일:한국청년전지공작대 1939년 11월 17일 수정본.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1939년 11월 17일, 시안으로 가기 전 촬영한 단체 사진

1933년 육삼정 사건 이후 난징으로 가서 중국포병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혁명군에 입대했으며, 류자명의 도움으로 천광궈의 보증을 받아 1934년 중국중앙군관학교 11기로 입학해 1937년에 졸업했다. 1939년 국민혁명군 대위로 진급해 중경 훈련총감부 통신감실 참모로 근무하며 유자명, 나월환 등과 교류하였고, 나월환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창설했다.

1940년 5월 서안에 이동해 후쭝난 부대와 연계하고,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이후 대원 수 100여 명에 이르렀고,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설 후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제되었다. 하지만 제 5지대장 나월환이하유, 김동수 등과 충돌하다가 박동운에게 암살당하고 제 5지대가 제 2지대에 편입되자 중경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이동해 정보참모부장으로 근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2.2. 광복 이후 생애

광복 후 이강과 함께 한인 동포들의 귀국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타이완에 다녀왔고, 1945년 12월 28일 귀국하였다. 1946년 박시창, 최덕신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임관[3]하였고, 이후 대위로 진급해 1947년 제 5연대 대대장으로 건군 후 최초로 진행된 추기대연습을 주도하였다.#. 이후 제2보병사단 제5연대 연대장[4], 대구 제1훈련소 부소장을 역임하였고 고등군사반 7기 훈련을 마친 후 1952년 101노무사단장을 역임하고 1960년까지 대령으로 복무하다가 준장으로 진급 후 전역하였다.

예편 후 대한중석 고문 등 기업체 고문, 자문역으로 활동하며 1969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참여하였고, 1985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84년 독립운동 회고록인 나의 조국을 집필하였다.
파일:박기성 독립운동가 1987년.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1987년 3월 2일, KBS 가요무대 삼일절 특집 출연[5]

1991년 2월 1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3. 여담

  • 차일혁, 박정희 등과 친분이 있었다. 박정희가 육군대학에 진학 후 진해에서 차일혁, 이종찬 등의 도움으로 겨우 전세집을 얻는 등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자 차일혁이 평소 박정희와 친분이 있던 박기성에게 요청해 여러모로 박정희에게 도움을 주었다.#
  • 국민혁명군 경력에 비해서 예편과 동시에 예비역장성으로 진급하는 등 진급속도가 느렸다. 6.25 전쟁 당시 미군들과 호흡이 맞는 편인 1910, 20년 대 생의 젊은 군인들이 빠른 진급속도의 혜택을 받은 반면 고령의 군인들은 출신과 관계없이 진급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다. 육사 동기이자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이 1950년 준장에 진급했고, 채원개가 1949년 제3보병사단 사단장을 역임한 것에 비해서도 진급속도가 느렸다. 아나키스트 경력도 있고, 이종찬, 박정희 등 이승만 계열과 거리가 있던 군인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한몫 하였다.
  • 가훈을 "인자(仁者)는 수(壽)"라고 할 만큼 평소 장수의 비결을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평소 물욕과 출세욕이 없었으며 6.25 전쟁 중 울산 방어진에서 방위군 연대장을 지냈을 때 보초를 선 장병의 피복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떠는 모습을 보고 당번병을 시켜 자신의 옷을 가져다 입혔다고 한다. 평소 고집이 센 성격이나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에 따르면 황포군관학교 11기생으로 남목청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 조선혁명당(1937년)이운한과 동기다. 회고록《나와 조국》에는 도주 중인 이운한에게 담배불을 붙여준 것으로 기록되어있으나 같은 한국인 동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해방 후 귀국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조카와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가 1953년에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이면서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효도하지 못해 평생 가슴아파했다.
  • 박기성 회고록 《나와 조국》[7]이 있다. 한국독립당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지하공작으로 독립운동한 언론인 송지영의 도움을 받아 출간하였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수호 계승해 온 우리민족이 그 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 민족은 슬기롭게 대응하여 국권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 일제의 운요오마루의 함포사격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국권을 침탈한 침략은 더없는 국치대욕이었다.
우리 민족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제에 항쟁을 계속하였다. 의병항쟁을 비롯하여 3.1 독립운동, 임시정부, 독립군과 광복군의 무력항쟁, 실로 끊임없는 항쟁을 전개해왔다.
물론 여기에는 순국열사와 애국지사들의 많은 피의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우리 민족이 오늘날에 와서 세계 속에 비약하게 된 것은 그 분들이 뿌린 피의 대가이며 국권상실이란 대욕을 다시는 당해서는 안되며 국권상실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깊이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일생을 조국과 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친 박기성 장군이 그 지난날을 회고하여 당시의 독립운동 행적을 책으로 남기게 된 데에 대하여 나는 크게 기뻐한다. 박기성 장군의 살아있는 증언은 당시의 일제의 침략성과 우리 민족과 애국지사들에 대한 학대상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길이 얼마나 험준하였는가 상세희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다시금 국권상실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마음 속에 되새겨 국력배양과 남북통일에 모든 힘을 모아 만진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치욕과 가난과 무지 대신 선진조국을 건설하여 다시는 지난날과 같은 슬픈 일을 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1984년 6월
송지영
발문(跋文)[8]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벗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가장 험난한 길을 굳세게 헤쳐온 박기성 장군이 그의 일생을 총정리한 회고록인 「나와 조국」을 펴내게 되는 것을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머리 숙여 경하해 마지 않는 바이다.
박기성장군은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만큼 용맹무쌍한 생애을 살아왔으면서도 그 아디에도 그런 티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참하고 무거운 성품의 소유자다.
나는 박기성 장군에게서 무엇보다도 그런 점을 높이 사주고 싶다.
옛말에 빈 그릇이 소리가 나고, 빈 수레가 시끄럽다는 말이 있듯이, 박기성 장군은 또 겉은 물컹하게 보이는 점도 없지 않으나 속이 탄탄해서 어느 누구도 범접을 할 수 없다.
요즘 세상에 조금만 어쩐다 하면 「자서전」이니 「회고록」이니 하는 걸 잘들 펴내고 있다. 그러나 박기성 장군의 「나와 조국」은 그런 류의 책들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박기성 장군의 「나와 조국」이야 말로 진짜 회고록다운 회고록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의 회고록이야 말로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군대생활을 함께 한 동기생들이라든가 또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자상하게 알고 싶은 분에게는 큰 연구자료가 될 것이고 어떤 뜻에서는 우리나라의 영원한 재산이 되리라 믿는다. 진정 박기성 장군은 「나와 조국」을 펴냄으로써 이 나라에 크게 이바지했음을 나는 믿는다. 실로 일본이며, 중국대륙을 샅샅이 누비고 다니며 박기성 장군이 직접 겪은 체험기라서 그 가치는 남다르다고 하겠다.
영원한 나의 벗인 박기성 장군이 「나와 조국」이라는 회고록을 내놓게 된다는 이야기를 그로부터 듣고는 솔직히 말해서 은근히 그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박기성 장군은 끝네 세상에 나와 보람있게 살다가는 기록을 남기고, 가는구나하는 생각때문에서이다. 진실로 내가 하지 못한 일을 그는 해냈구나하는 생각에서 몇마디의 기록을 하기로 했다.
아무튼 지금 내 심정은 어린애처럼 그를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다.
나보다도 훨씬 그를 잘 알고 있고 또 사회적으로나 혹은 배운 것이 훨씬 나은 벗들이 그에겐 많은데 굳이 나에게 발문(跋文)의 한 마디를 맺는다.

1984년
유석현

[1]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만들어져 한국광복군 시절까지 이름으로 쓰였다.[2] 우당 이회영 선생이 지어준 이름[3] 회고록에 따르면 박시창 장군의 추천으로 육사 입교했다.[4] 제 5연대장을 맡아서 대전 골령골 학살자 명단에 들어가며 골령골 학살전범이기도 하다KBS 6.25 특별기획 골령골, 묻혀버린 진실'감춰진 이름들' [5] 참고로 자막에 있는 '귀주성'은 고려시대에 발발한 평안북도 구성시 귀주성 전투가 아닌 중국 구이저우성이다.[6] 해당 영상 12분 10초부터.[7] 도서출판 시온, 1984.[8] 책의 끝에 본문의 내용의 대강이나 간행에 관계되는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