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21:50:05

민월

국호 민월(閩越)
존속기간 기원전 306년 ~ 기원전 110년
위치 복건성
수도 야(冶)
국성 추(騶)
국가원수
주요 군주 초대 민월왕 무제(無諸)
월요왕 추(丑)
동월왕 여선(餘善)
언어 고대 월어, 상고 중국어(?)
종족 월족
멸망 후 전한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
2.1. 성립 이전2.2. 동구와의 전쟁2.3. 내분2.4. 한나라-민월 전쟁과 멸망2.5. 멸망 이후
3. 역대 군주4. 인물

1. 개요

월나라의 후계국이자 전한의 제후국. 오늘날 복건성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 국가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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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성립 이전

기원전 306년, 월나라초(춘추전국시대)의 침공으로 멸망하면서 월나라 유민들이 복건성 지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들이 민월의 시조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기 동월연전에 의하면, 민월왕 무제(無諸)는 동구왕 요와 함께 월왕 구천의 후예였다고 한다. 진(통일왕조)이 중국을 통일한 후 동구, 민월의 땅에다 민중군(閩中郡)을 설치하면서 무제는 요와 함께 왕위를 잃고 군장으로 봉해졌다.

반진전쟁 시기, 무제와 요는 제후들을 이끌고 오예에게 가담해 진나라에 맞섰다. 그러나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때 소외당하면서 한고제의 편을 들었고, 한나라는 기원전 202년과 193년에 무제와 요를 각각 민월왕, 동해왕으로 봉하였다.

2.2. 동구와의 전쟁

오초칠국의 난 당시, 유비(오왕)은 민월과 동구를 반란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동구만 유비에게 호응하고 민월은 거부했다. 유비의 오나라군이 한나라군에게 격파된 후, 유비의 아들 자구(子駒)는 민월로 망명했는데, 동구가 유비를 살해한 것에 원한을 갖고 민월에게 동구를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기원전 138년, 민월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동구를 공격해 수도인 동구(東甌)를 포위했다. 동구는 한나라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한나라는 엄조(嚴助)를 파견해 동구를 돕도록 했다. 엄조의 구원군이 도착했을 때 민월군은 동구에서 철수했고, 동구왕 망은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로 망명해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2.3. 내분

기원전 135년, 민월은 남월을 공격했다. 남월은 군사를 일으켜 민월을 공격하는 대신 한나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한나라는 왕회(王恢)를 예장에서, 한안국(韓安國)을 회계에서 출병해 민월을 공격하도록 했고 민월왕 영(郢)은 험한 지형에 의지해 한나라군과 맞섰다.

영의 동생인 여선(餘善)은 민월의 상, 종친들과 논의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민월왕 영을 살해해 그 목을 한나라에 받쳤다. 한나라는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무제의 손자인 요군(繇君) 축(丑)을 월요왕(粵繇王)으로 삼았다.

무제의 손자 축이 요왕으로 옹립되었지만, 민월 내에서는 여선(餘善)을 따르는 사람이 많자 여선은 자립해버리고 왕을 칭했고, 요왕을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서 민월은 2개로 나뉘어졌다. 한나라도 여선이 자립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여선 때문에 다시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여선을 인정하고 그를 동월왕으로 임명했다.

2.4. 한나라-민월 전쟁과 멸망

기원전 112년, 동월왕 여선은 남월의 여가(呂嘉)를 공격하는데 참여하겠다고 한나라에 요청했다. 그러나 여선은 군대가 계양(揭揚))에 이르자 바다에 파도가 심하다는 핑계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남월과 내통했으며 한나라군이 남월의 수도 번우를 함락시켰을 때도 지원하지 않았다.

남월 정벌에 참여한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한무제에게 서신을 보내 민월 정벌을 요청했으나 한무제는 남월 정벌로 군사들이 지쳤다면서 군을 멈추고 예장군(豫章郡) 매령(梅嶺)에 주둔하게 했다.

기원전 111년 가을, 누선장군 양복이 민월 정벌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월왕 여선은 군사를 일으켜 군을 징발해 한나라와 통하는 길을 막았다. 장군 추력(騶力) 등을 ‘탄한장군(呑漢將軍)으로 임명한 여선은 백사(白沙), 무림(武林), 매령(梅嶺)을 공격해 그곳의 한나라 교위들을 죽였다. 이때 한나라는 대농(大農) 장성(張成), 전 산주후(山州侯) 유치(劉齒)를 장수로 삼아 주둔케 했는데, 이들은 민월군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안전한 곳으로 후퇴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자신감이 생긴 여선은 스스로 무제(武帝)로 칭하고 자립을 선언했다. 이에 한나라도 총 4가지 경로를 통해 민월을 침공했다.
  • 누선장군 양복은 무림(武林)에서 출격했다.
  •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을 구장(句章)에서 출격시켜 바다를 통해 민월을 공격하게 했다.
  • 중위(中尉) 왕온서(王溫舒)는 매령(梅嶺)에서 출격하였다.
  • 남월 출신 항장인 과선장군(戈船將軍) 정엄(鄭嚴)과 하뢰장군(下瀨將軍) 전갑(田甲)은 약사(若邪)와 백사(白沙)에서 출격시켰다.[1]

4가지 경로로 출발한 한나라군은 기원전 110년 겨울, 민월로 도착했다. 동월은 평소대로 군대를 일으켜 험한 곳에 의지하고 순북장군(徇北將軍)에게 무림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순북장군은 누선장군의 몇몇 교위(校尉)를 괴멸시키고 장리(長吏)를 살해하였다. 누선장군은 전당(錢唐)의 원종고(轅終古)를 이끌고 순북장군을 베었고, 원종고를 아후(禦兒侯)에 봉했다. 이는 누선장군 양복의 한나라 군대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나라는 과거 한나라에 머물렀던 월연후(越衍侯) 오양(吳陽)을 파견해 여선을 회유하려 시도했으나, 여선은 거부했다. 횡해장군 한열의 군대가 도착하자 오양은 자신의 읍인 700여명과 함께 여선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서 한양(漢陽)에 있는 민월군을 공격하였다.

건성후(建成侯) 오(敖)와 그가 이끄는 무리는 요왕(繇王) 거고(居股)를 설득했다.
“여선이 이 모든 일의 원흉으로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 군대가 오고 있는데, 그 수도 많을뿐더러 힘도 막강합니다. 여선을 죽여서 한나라 장군들에게 귀순한다면 요행히 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여선을 함께 죽인 건성후 오, 요왕 거고는 그 무리를 이끌고 횡해장군 한열에게 항복하면서 민월은 멸망했다.

2.5. 멸망 이후

요왕 거고는 동성후(東成侯)로 식읍 만호(萬戶)에 봉해졌으며, 건성후 오(敖)는 개릉후(開陵侯)에, 월연후 오양(吳陽)은 북석후(北石侯)에 봉해졌다. 동월의 장수인 다군(多軍)은 한나라 군대가 도착하자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항복해서 무석후(無錫侯)에 봉해졌다. 과거 구락(甌駱)의 장수 좌장 황동(黃同)은 서우왕(西于王)을 참한 공을 인정받아 하부후(下鄜侯)에 봉해졌다.

한나라군으로 종군한 횡해장군 한열은 안도후(案道侯) 에, 횡해교위(橫海校尉) 유복(劉福)은 요영후(繚嫈侯)에 봉해졌으나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공을 세우지 못해서 책봉받지 못했다.[2]

한무제는 투항한 거고, 오, 오양, 다군을 제후로 봉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횡해장군 한열, 횡해교위 유복을 제후로 봉했다. 그리고 "동월은 땅이 좁고 험하며 민월 사람들의 성정은 사납고 여러 번 배반하였다"는 이유로 민월 사람들을 장강과 회수 사이의 지역에 옮겨살게 했다. 이 여파로 동월(東越) 땅이 텅 비어버렸다고 한다.

이후 산으로 들어간 민월인들이 산월로 불리게 되었으며, 산월족은 삼국시대(중국) 시기까지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았다. 그러나 오나라에게 여러 차례 토벌당하면서 크게 약화된 이후 한족에게 동화되었다.

3. 역대 군주

대수 이름 재위기간 비고
초대 무제(無諸) 기원전 202년 ~ ? 초대 국왕
2대 영(郢) ? ~ 기원전 135년 2대 국왕. 무제의 아들.
3대 축(丑) 기원전 135년 ~ ? 무제의 손자. 한무제에 의해 임명됨.
- 여선(餘善) 기원전 135년 ~ 기원전 110년 무제의 아들로, 영의 동생. 동월왕에 임명됨
말대 거선(居股) ? ~ 기원전 110년 마지막 국왕.

4. 인물

  • 유자구: 민월로 망명한 유비(오왕)의 아들.
  • 유자화: 민월로 망명한 유비(오왕)의 아들.
  • 추력(騶力: ? ~ ?): 한-민월 전쟁 당시 여선으로부터 탄한장군(呑漢將軍)으로 임명되어 한나라를 공격했다.
  • 순북장군(徇北將軍: ? ~ 기원전 110년): 이름 미상. 관직명으로 알려져 있다.
  • 오양(吳陽)
  • 오(敖)
  • 다군(多軍)
  • 서우왕(西于王)

[1] 사기 동월열전에서는 월후가 과선장군과 하뢰장군이 되어 약사와 백사에서 출격시켰다고 기록했다. 청나라 고증학자 양정남(梁廷楠)의 남월오주전(南越五主傳)에서는 과선장군과 하뢰장군은 각각 정엄, 전갑으로 한나라에 귀의해서 열후가 된 남월인으로 파악했다.[2] 유복은 원래 성양공왕(成陽共王)의 아들인데, 이전에 해상후(海常侯)였다가 법을 어겨서 후작직을 잃었었다. 종군한 지는 오래 되었으나 공을 세우지는 못했는데, 종실인 까닭에 후에 봉해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