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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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환이 민원식을 암살한 사건.
1.1. 사건의 배경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자치권, 참정권 운동가 민원식은 계속해서 조선인에게 참정권 허용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거절했다1.2. 사건의 전말
1921년 그는 세 번째 청원서를 제출하고 제국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기영'이라는 청년이 그를 면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날 오라고 하였다.2. 사건 발생
2월 16일 정오경 비수를 겉옷 안 주머니에 숨긴 뒤 청년은 우선 동우회에서 환영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여 민원식을 안심시켰으며 다시 국내상황을 물었다. 민원식은 국내는 아주 평온하다고 답을 하였다. 청년은 이때 큰 소리로 "지금 온 겨레가 모두 일어나서 독립을 부르짖는데 어찌 평온하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조선사람 아닌가? 당신은 정말 우리나라를 배반하는 자이다"하고 언성을 높였다. 민원식은 반박하며 "독립운동이라고? 상해에 있는 놈들은 모두 폭도이다. 이 자들이 어떻게 독립을 시킨다는 것이냐"라고 반박했다. 청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품속에 감추었던 칼을 뽑아 민원식을 찔렀다. 그렇게 민원식은 생애를 마감한다3. 범인의 정체
양근환의 모습. |
청년의 진짜 이름은 양근환이고 일본인 부인과 자식까지 둔 고학생이다.
양근환은 항구로 가서 상하이로 피하려다 체포된다. 양근환은 목수라고 자칭했지만 거친 일을 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고운 손이었던 점이 일본 경찰에게 의심받아 체포당한다.
4. 그 직후
민원식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숨졌다. 이 사건으로 도쿄를 방문한 방정환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조선 독립이나 민원식 암살 가담자로 지목되어 수사,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당했다.한편, 양근환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2년을 복역하고 1933년에 출소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한민당의 창당과 우익 운동에 참여했는데, 한때 송진우와 여운형 암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의심 받아[1] 미군정 재판정에 오르기도 했다.
우익 인사로 활동한 전적 때문에 한국전쟁 시기에 인민군에게 잡혀 처형 당했다.
1980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5. 그 외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치호는 그를 살해한 양근환을 영웅시하는 시각을 비판했다.[1] 여운형 암살 사건의 공범인 김훈에게 권총을 제공했는데, 양근환은 단순히 호위용으로 준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