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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제2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 水野 錬太郎 | Mizuno Rentarō | |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출생 | 1868년 2월 3일 |
사망 | 1949년 11월 25일 |
위계 | 정3위 |
훈등 | 훈1등 |
1. 개요
일본의 내무관료이자 정치인. 내무대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문부대신, 귀족원 의원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2. 생애
아키타 번의 번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키타 중학교(현재 아키타 현립 아키타 고등학교), 제일고등중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1895년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1919년, 수상이었던 하라 다카시가 미즈노에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자리를 권유한다. 정무총감이라면 조선총독부의 2인자 자리로 조선의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하는 직책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차관급이었다. 대신을 지낸 그로서는 좌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밖에는 적임자가 없었던지, 하라 수상의 삼고초려 끝에 그는 정무총감 자리를 승낙하였다. 노부모의 허락, 조직과 인사에 간여하지 말 것, 예산을 마음대로 줄 것이라는 조건을 걸어서. 그렇게 그는 1919년 9월 2일, 조선 경성역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미즈노는 강우규의 폭탄 투척을 경험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겨냥한 이 의거는 수행원과 호위 경찰, 기자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데 그쳤지만, 3.1 운동의 여운이 남아있던 당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놀랍게도,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미즈노는 그날 당일부터 야근모드로 들어가 비상근무를 섰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1920년대 일제의 조선 통치를 2년 10개월간 전면에서 지휘했다. 그는 어떤 일을 할 때 꼼꼼히 살폈고 꽤나 열정적이었다. 한 예로 조선에 있으면서 한학자를 초빙해 주3회 조선어 과외를 받았고, 다섯 달 만에 조선어로 연설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하지만 그를 당시의 조선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1920년 4월 20일 동아일보의 다음 기사가 잘 보여준다.
정무총감 수야련태랑(미즈노 렌타로) 씨는 조선에 드러온 후에 조선사람 선생을 청하야 조선말을 공부하얏는데 요사이는 공부가 어지간히 느러서 "진지잡으솟스무니까"를 다 게되얏디나 / 그것은 제법이지만은 "요보"라는 개소리는 행혀나 배호지 마랏스면 엇더할는지 그것도 진정 배우고십흐면 억지로 말나는것은아니지만은 ...
사이토 총독 바로 아래에서 충실히 조선통치 업무에 전념하면서 하라 총리와 담판을 벌여 조선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늘렸고 2000만엔 공채 발행도 승인받았다. 사이토 휘하에서 보좌를 하면서 산미증식계획 입안과 한국사 왜곡, 식민 교육 정책과 언론 정책등 식민지 조선에서 부정적인 정책을 입안하면서 문화통치의 교활함과 이면성을 잘 보여주었다. 미즈노는 1922년 다시 내무대신으로 영전해 조선을 떠났고, 다음해 관동 대지진을 겪으며 조선인 학살을 지시했다. 그 내용을 보면 미즈노는
비탄과 패닉에 빠진 인민들이 정부에 대한 분노를 폭발하기 전에 터트릴 다른 곳을 마련해 줘야 할 것이야.
그래서 내무부는 전국의 지방장관과 총독부 등에 전문을 보냈는데 내용을 보면
도쿄 부근의 진재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여 현재 도쿄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조선인의 행동에 대하여서는 엄밀한 단속을 가해주기 바란다.
그래서 관동대학살에 대한 비극이 시작되었다.
여러 모로 한국과는 악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인물인 셈이다.
1924년,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이 성립 하면 다시 내무대신이 되어 제도 부흥원 총재 도 겸임했다.
1927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대장대신에서 사임한 후, 미츠치 추조가 전임하였고 그 후 미즈노가 문부대신에 붙었다. 미즈노는 반대해 자신은 사임한다고 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미즈노는 쇼와 천황에게 찬양해, 총리에 대해 사표를 내려 건네는 것 정말로 공포에 참아야 한다 취지를 말씀드렸다. 미즈노는 칙설 강하에 따라 유임 했다.
다나카 내각의 총사직 후, 미즈노는 대신이 되지는 않았지만, 대일본 음악 저작권 협회 회장 , 대일본 흥아 동맹 부총재, 대 일본 산업 보국회 고문 등 많은 직책에 겸임했다. 1945년 12월 2일 GHQ는 미즈노가 대일본 흥아동맹 부총재, 익찬 정치회 고문 이 된 것 등을 이유로 체포 명령을 내렸다. 미즈노는 병환 중이 었기 때문에 수감되지 않았지만 1947년 9월 1일에 감시가 풀렸다. 그리고 2년 후 미즈노 렌타로는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여담
1899년 일본 최초로 <저작권법著作權法>을 발의한 인물이 바로 당시 내무성 관료였던 미즈노 렌타로였다.'저작권'이라는 한자 단어를 처음 쓴 것도 그라는 설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22년 처음 거행된 조선미술전람회(이른바 선전鮮展)도 미즈노 회고에 따르면 정치에 열을 올리는 조선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볼거리를 만들어주고자 한 그의 작품이었다.
어쨌건 그런 사람이었던 미즈노 렌타로, 그의 글씨를 얼마 전 처음 보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표구도 일본식이고 글씨도 일본풍이다. 아주 잘 썼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필력이 상당하고 획에 망설임이 덜하다. 그의 성격이 그랬던 모양이다. 비백飛白이 많은데 이 무렵 일본 글씨 중에 뻣뻣한 붓을 써서 획에 끌린 기가 있는 것이 적지 않다. 끝에는 향당학인새香堂學人鈢라고 낙관했는데, 그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참 역설적인 호 아닌가.
글의 내용은 양웅(揚雄, BC 53~AD 18)이 지은 <법언法言>의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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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닦아 활을 삼고, 생각을 바로잡아 화살을 삼으며, 뜻을 세워 과녁을 삼아 겨냥한 뒤 쏜다면, 쏘는 족족 반드시 명중하리라.
修身以爲弓 矯思以爲矢 立義以爲的 奠而後發 發必中矣
修身以爲弓 矯思以爲矢 立義以爲的 奠而後發 發必中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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