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8 19:29:32

문명 7/지도자/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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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Augustus
문화 중심 | 팽창주의
특유 능력
임페리움 마이우스
(Imperium Ma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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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 안건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
(Restitutor Or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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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국에 '''도시'''가 있는 문명을 좋아하고, '''마을'''이 있는 문명을 싫어합니다.

1. 개요2. 역사적 배경3. 지도자 특성4. 운영5. 연관 문명6. 대사 모음

1. 개요

아우구스투스
로마의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분열되었던 공화정을 북해에서 이집트까지 이르는 제국으로 통합했습니다. 폭군의 등장에 대한 로마인들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는 겉보기에는 옛 공화국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교묘하게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속주와 재편된 군대를 통해 국경을 확장했고 세법을 개혁했으며, 황제 숭배의 막을 열었습니다. 현대 로마 제국의 이미지는 대부분 아우구스투스가 설계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화정 시기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로마 제국의 초대 임페라토르인 아우구스투스로 문명 5에서 지도자로 등장했다.

2.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 [ 펼치기 · 접기 ]
>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대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그에 관해 다룬 글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고, 후세에 등장한 인더스 강 서쪽의 거의 모든 '위대한 지도자'가 그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제호) 자리에 있었으며, 지금 우리가 아는 드높은 로마의 이미지를 확립한 인물입니다. 생각건대,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종조부이자 양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보다는 대담함이 덜하며 방법론을 따르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이룬 업적이 더 크다는 건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비제국명)는 기사 집안(에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혈연관계였기 때문에, 황가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본인은 최고위 신분의 로마 귀족 출신은 아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죽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결코 배려심이 많다고는 할 수 없었던 남자와 재혼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조용하고, 생각이 깊고, 실용적인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추구했으며 당시 유명하던 삼촌과 가까워지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스페인에서 전쟁을 벌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만나고자 전선까지 배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배가 침몰하고 맙니다. 하지만 끝내 그는 적대 지역에서 전선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모험은 황제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청년에게 호감을 느꼈고 곧 그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양아들로 지명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왜 이렇게 했는지는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동시대인들과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 소년이 카이사르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로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카이사르가 정욕에 따라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유럽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들어오기 전에 군대의 행군을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만하고 무능한 원로원, 그들의 명백한 멸시, 그리고 자기 재산을 향한 공식 재무 조사에 질린 카이사르는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습니다. 카이사르가 황제라는 농담과 루머가 로마 전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카이사르가 승전보와 함께 돌아올 것처럼 보이자 원로원에서는 그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투옥될 것이 두려웠던 카이사르는 이에 따르지 않았고,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자신을 독재관으로 선포했고, 일련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국 원로원의 친구와 적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자 대규모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시민들은 분노했으며,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은 그리스로 달아났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기병대 사령관인 레피두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를 비롯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들과 친구들은 복수를 꾀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처음에 카이사르 암살자들의 사면을 허가했기 때문에 시민들 사이에서는 안토니우스보다 옥타비아누스가 더 인기 있었습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이미 권력자가 된 양 행동하며, 옥타비아누스의 가문과 카이사르와의 특별한 관계를 무시하는 것에 반감을 가진 원로원 위원들이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처단한 뒤에도 정치적 상황은 험난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아내의 딸과 결혼했지만, 결국 그녀와 이혼했고, 그녀는 복수를 위해 안토니우스에게서 달아났습니다. 세 명의 후계자로 인해 동쪽의 안토니우스, 서쪽의 옥타비아누스, 아프리카의 레피두스, 이렇게 제국은 세 개로 갈라졌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밀회를 맺고 그녀를 우상화하면서 로마에서 아군을 잃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봉인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열었을 때, 그가 제국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계획이 밝혀지면서 안토니우스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패배 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습니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고, 원로원을 서서히 장악하며 권력을 정당화했습니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꿨습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또 다른 이름은 '승리한 사령관'을 뜻하며 황제(Emperor)의 어원이 되는 임페라토르(Imperator)였습니다. 이 칭호를 통해 히스파니아, 발칸 반도, 유대(Judea, 현대 가나안 지방 남단을 일컫는 옛 지명)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지만, 독일에서 큰 패배를 겪기도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개인이 가진 권력의 대부분은 가장 수익성이 높은 영토를 개인적으로 장악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는 로마가 아닌 그의 소유였습니다. 엄청난 부를 누린 이 지역에서 얻은 수익은 그의 개인 장부로 흘러 들어갔고, 이후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14년에 사망했습니다. 지병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내인 리비아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리비아의 암살설이 인기는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녀가 결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은 '난 내가 맡은 배역을 잘했던가? 그렇다면 나에게 박수를 보내다오'였습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는 언제나 폭정으로 퇴보한다고 썼습니다.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산은 플라톤의 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작은할아버지인 카이사르처럼 대담한 모험가는 아니었지만, 그는 로마 권력의 고삐를 쥐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똑똑하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거의 전 유럽에 영감이 될 문명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군사 영웅이자 원로원과는 척을 졌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전 세계 쿠데타 지도자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라면,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그리고 게임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로마는 수 세기에 걸친 평화의 시대, 팍스 로마나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3. 지도자 특성

4. 운영

5. 연관 문명

6. 대사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