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마이클 잭슨
화려했던 전성기의 마침표[1]
1990년 말, 마이클은 지난 18개월 동안 새 앨범 작업을 해 왔으나 여전히 일부 사운드에 만족하지 못했었다. 지금까지 녹음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최고이며 현대적인 무언가를 찾았고 사운드 엔지니어 Bruce Swedien는 마이클이 원하는 건 '젊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지금 인기있을 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은 테디 라일리라는 젊은 프로듀서를 그 사운드를 새 앨범에 가져올 수 있는 사람으로 지목했다. 테디는 80년대 후반 뉴욕에서 파생된 뉴 잭 스윙 사운드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뉴 잭 스윙은 R&B의 댄스와 힙합의 박자를 섞은 것이다. 마이클은 자신의 여동생 자넷 잭슨의 명반인 Rhythm Nation 1814에서 귀에 띄는 뉴 잭 스윙 사운드와 앨범의 베이스에 감명을 받았었는데 이는 Jimmy Jam과 Terry Lewiw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마이클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Rhythm Nation'과 'The Knowledge'을 꼽았고 잼과 루이스가 자신의 앨범에서 작업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자넷과의 우정을 생각 거절했다. 마이클은 1991년 1월을 출시 목표일로 잡았으나 놓쳤고 앨범은 여름으로 밀려났다. 곧 마이클은 테디가 만든 음악을 들어야 했고 사운드 엔지니어 Way도 동석한 상태에서 3명은 스튜디오에서 모여 노래를 재생했다. 전형적인 hard-hitting로 뉴 잭 스윙 스타일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테디와 Way는 마이클이 좋아할까?라며 긴장했다. 그리고 마이클은 곡을 매우 좋아했는 데 이것이 Blood On The Dance Floor였다. 테디는 자신의 작업물이 마이클 마음에 드는 지 알아볼 유일한 방법은 그가 춤을 추냐는 것이었다. 실제 퀸시도 그랬듯 마이클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고 춤에 따라 앨범에 들어갈 곡을 결정하기도 했었다. 프로듀서가 마이클의 음악 트랙을 만들고 있을 때도 마이클은 항상 멜로디를 만드려고 했고 테디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마이클은 갑자기 새로운 앨범에 들어갈 'Remember The Time'의 초석이 될 멜로디와 코러스 훅을 만들었고 테디는 그것에 압도당했다고 회고했다.
1991년 3월 소니 뮤직은 마이클과 15년 동안 6개의 앨범을 발매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를 받았다고 한다. 예트니코프는 거래가 다소 무모한 것이 아니냐 생각했지만 소니의 경영진인 Michael Schulhof는 마이클이 과거처럼 작업을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표는 언론에서는 마이클이 10억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토미 모톨라는 "우리는 마이클에게 결코 10억 달러를 지불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마이클이 10억 달러를 받았다는 보도 자료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이클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은 당대의 스타들과 항상 듀엣을 하려 했는 데 이번에도 역시나 였다. 대상은 마돈나였다. 마이클은 1991년 3월~4월 마돈나와 식사를 했고 최소한 3번 만났으며 언론은 그들이 커플이 아니냐는 소문을 냈다. 마이클은 마돈나에게 in the Closet이라는 신곡에 같이 듀엣을 하자고 제안한다. 테디는 'in the Closet'이 될 강렬한 비트를 만들었었고 마이클은 감명을 받았고 멜로디와 가사를 넣었다. 사운드 엔지니어 Rob Disner는 마돈나를 회의에 초청했었는 데 그들은 개인적인 방에서 잠깐 시간을 보냈었다 , 마이클에게 그녀의 방문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는 마돈나가 자기를 무서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으며 우리 모두 그녀가 그에게 'Move(아마도 마돈나 특유의 섹스 어필을 뜻하는 것 같다.)'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하지만 ... 마이클은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마돈나는 훗날 인터뷰에서 마이클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다시 하고 싶다고[2] 말했는데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훗날 마이클은 2000년대 지인과의 사석 이야기에서 녹음된 것을 들어보면 마이클은 마돈나를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토로했었다. 아무튼 이 곡은 Grace Kelly와 Stinphanie가 함께 했다.
마이클은 리멤버 더 타임과 인 더 클로짓을 작업했고 테디와 더 작업하고 싶어했는 데 테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CD 샘플을 이용해 'She Drives Me Wild'를 작곡했고 마이클은 가사를 썼는 데 Brad Sundberg은 이 곡을 처음 들을 때 트랙이 별로라고 생각했으나 마이클은 여러 가지를 추가했고 지루한 트랙에서 음악 작품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Can not Let Her Get Get Away'도 테디의 CD 샘플을 이용했고 제임스 브라운의 사운드를 상기시키는 곡으로 곡의 모든 것을 나 혼자 연주했다며 테디는 자신은 멀티-연주자라고 자화자찬 했다. 또한 테디가 아닌 다른 제작자와 함께 만든 'Jam'과 'Dangerous'도 마이클은 테디가 사운드를 새롭게 하기를 요청했고 테디는 열심히 작업했다. Bruce Swedien는 테디를 매우 전문적이라고 칭찬했다. Epic의 마케팅 담당 Larry Stessel는 'Dangerous'에 대해 평가할 때 이렇게 말했다. "마이클은 비틀즈는 리더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을 존경했어, 비틀즈는 다른 모든 일들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이 만드는 것을 만들어 왔지 그리고 마이클과 나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 했어" 라면서 테디 라일리를 통해 마이클이 다른 아티스트들의 리드를 따라가려고 한 첫 번째 앨범이었다고 평가했다.[3]
마이클은 일부 트랙에 다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테디가 몇 달 전에 팀에 합류하면서 앨범의 방향이 바뀌었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Bad 발매 이후 무려 4년이 지난 상태였고 소니는 어떻게든 추수 감사절 이전에 앨범 완성을 목표로 마이클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앨범의 완성이 늦어진 것은 'Bad'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이클은 완벽주의자로 자신의 귀에 맞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시 작업했다. 그의 목표는 남녀노소 피부색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걸작이었다. 즉, 자신이 완전히 만족하지 않으면 레코드 사에 앨범을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오프 더 월과 스릴러 제작 때는 매우 빠르게 제작했지만 배드 때부터 음악 제작에 대한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이었다. Thom Russo는 마이클의 완벽주의를 경험하며 보컬도 매우 느리게 하며 그는 완벽주의자이기에 음반사를 좌절 시켰지만 어쨌거나 완벽함이 아니면 아무 것도 그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Way는 마이클은 준비가 될 때까지 보컬을 하지 않았다며 마이클의 편집증과 같은 모습에 동의했다. 9월에는 마이클은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1분의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4백만 달러가 투자됐으며 다시 존 랜디스와 합작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든 뮤직비디오 2위였다.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전 세계 27개국에서 동시 방영됐는데 당시 시애틀 타임즈의 보도에 의하면 약 5억 명 이상이 동시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고 후에 2015년에는 뮤직비디오 역사상 가장 많은 TV 시청자 수를 기록한 업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Heal The World'는 1989년 가을에 떠오른 아이디어로 'Earth Song'의 창작 의도에 연장선상에 있는데 마이클은 지구 온난화 등에 크게 염려를 했으며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그런 곡들을 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유명한 영장류 학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마이클이 특히, 침팬지[4]의 위험에 영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10월 'Keep the Faith'를 녹음하던 중 처음 두 구절을 부른 후 그는 녹음 부스에서 나와 사무실 구석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상심했다. 왜냐하면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는 손상됐고 높은 음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스튜디오 직원들은 모든 구성을 변경하여 낮은 음정으로 보컬을 부를 수 있게 했다. 10월 29일에는 마지막 믹싱이 이뤄졌다. Dangerous의 마스터 사본은 전 세계 공장으로 전달됐으며 소니의 추수 감사절 출시일 기준을 잘 준수했었다. Epic의 부회장은 앨범이 놀랍게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스릴러의 숫자에 접근하지 못했기에 마이클은 행복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제일 첫 번째로 발매된 싱글 'Black Or White'는 팝과 록이 절묘하게 섞인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7주간 1위를 차지하며 Dangerous의 성공을 촉진했다. 그러나 싱글 차트 성적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전 앨범들에 비해 좋지 못했으나 앨범은 불티나게 팔려나가 1992년까지 1500만장을 팔아치웠고 현재는 30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운 것으로 추정되는 베스트 셀러가 됐다.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의 판매량은 전작들에 비해 꽤 낮아졌지만 오히려 유럽 지역과 오세아니아에서 높아졌다.
지나치게 많이 팔린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앨범은 훅 기법이 너무 이류적이고 그의 보컬 매너리즘은 종종 거슬리지만, [Off The Wall](오프 더 월)이후 가장 일관성 있는 앨범이고 [Bad](배드)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Teddy Riley(테디 라일리)는 혼자서 이렇게 불쾌하게 예측불허인 비트를 만들어 낸 적이 없고, 더군다나 그러한 비트를 능가할 가수는 배출한 적이 없다. 만약 10살짜리 아이가 원하는 만큼, 쉽게 다가오는 곡이 아니었다면 언제나처럼 그건 Michael(마이클)이 리듬적인 순간을 타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비틀즈보다 인기있다고 확신하는, 보이지 않는 남자(Invisible Man)의 연애사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그럴듯한 섹스와 로맨스를 외치며 팔고 있다. 'In The Closet(벽장 속에서)'에서 그는 그의 신비의 여인에게 그들의 욕정을 숨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곧 그는 흥분하거나 예전 모습에 대한 간절한 향수를 재연한다. 그리고 그는 꽉 다문 입술 사이로 'Can't Let Her Get Away (그녀가 떠나게 할 수 없다)'라고 반복하여 내뱉는다.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미국의 음악저널리스트이자 락 비평가 Dangerous 앨범 평점 : A-,1991년, 멜론 번역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미국의 음악저널리스트이자 락 비평가 Dangerous 앨범 평점 : A-,1991년, 멜론 번역
평론가들은 전작 'Bad'와 비슷한 평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단점도 뚜렷하다는 것이다. AllMusic은 Bad보다 훨씬 선명하고 오프 더 월과 스릴러의 일관성에 근접하지만 몇몇 곡은 완벽하지 않고 지나치게 러닝 타임(74분)이 길다고 지적했으며 LA타임즈는 앨범의 후반부가 가벼운 리듬의 팝으로 Bad 앨범의 속편 즉, 퀸시와 함께 했을 때의 히트곡과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Heal the World는 최악의 곡으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릴 곡이라고 지적하며 Who is it은 빌리 진의 라인을 따랐다고 지적했다. 이는 1992년 1월 9일 롤링 스톤이 마이클 잭슨 컴백 기념으로 보도한 기사에도 지적하는 것인데 Heal The World는 전작 We Are The World를 Who is it은 Billie Jean의 움직임을 고대로 따내 앨범 수록곡의 절반이 이전 작품을 모방한 대중 호소적인 앨범으로 테디를 데려와 최첨단 사운드로 만들어 냈다고 지적하며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마이클에게서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한 가지, 마이클은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창조하는 유능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끝맺었다. 이런 매너리즘이 비판의 주 이유였으면서도 Dangerous가 잘 만든 팝 앨범인 것은 사실이기에 긍정적인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Dangerous는 다시 마이클 붐을 일으켰고 마이클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1992년부터 'Dangerous Tour'를 진행한다. Dangerous 투어는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동유럽에서도 진행할 수 있었는데[5] 러시아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을 미국의 제왕으로 생각해 왔던 공산주의 국가 사람들은, 마이클이 러시아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말하기도 하였다.[6]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진행된 공연은 미국의 케이블 채널인 HBO에서 구매하여 방영되었고 해당 중계는 무려 21.4%라는 시청률을 거두며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부카레스트 공연은 2005년 DVD로 발매되었다. 루마니아 공연 당시 공연티켓 가격이 루마니아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 4분의 1에 달할 정도로 매우 비쌌으나 이마저도 금방 매진됐고 마이클 잭슨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한 고아원에 들릴 때는 루마니아 대통령이 직접 나왔다고. 또, 총리와 여러 정치가들이 공연을 보러 왔으며 공연의 광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신되고 고막이 파열돼 수술받아야 할 사람이 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잭슨의 공연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새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의외로 투표율이 저조한 이유 중 하나가 유권자들이 '잭슨 후유증'에 빠져서 그런 거라는 추측도 있었으니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유명하고 인기가 많았는 지 알 수 있다. 이때 남미국가들을 투어에 추가시켰는데 멕시코의 아즈텍 스타디움에서 5일간 50만명을 끌어모으는 위엄을 보여줬다.
1992년에는 'Heal The World Foundation' 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또 다시 조지 부시에게 'Point of Right' 라는 상을 받는다. 부시 대통령은 마이클을 흑인의 본보기라며 치켜세웠다.
1993년 1월 16일에는 빌 클린턴의 초청을 받고 클린턴갈라쇼의 메인 게스트로 나와 'Gone Too Soon'과 'Heal The World'를 공연했다.[7][8]
1993년 1월 30일에는 미식축구의 결승전 슈퍼볼 하프타임에 나와 역사적인 공연을 선보였는데. 전년도 하프타임에 비해 시청률이 8.6% 상승했다. 마이클이 나온 이후에는 많은 가수들이 홍보를 위해 슈퍼볼 하프타임에 나오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후에는 오프라 윈프리와 텔레비전에서 1시간 이상 인터뷰를 했다.[9] 9천만 명의 이상의 미국인들이 시청하며 시청률은 47.9%로 미국 TV 역사상 가장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 9위 (현재까지도)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마이클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살아있는 전설 상을 받으며 커리어에서 최절정을 이뤘고, 음악 활동 외에 자신을 모델로 하는 초콜릿 바를 만들어서 수억 원을 버는 등 앞으로도 걱정이 없을 듯싶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하였다.
슈퍼볼에서의 마이클 잭슨
1991년 데인저러스를 발매하고 1차투어를 끝낸 1993년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단순히 팝스타가 아니라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같은 존재였고[10] 그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절정의 커리어를 이룬상태였다. 마이클은 신격화 된 연예인이었고 미국의 대통령들은 마이클 잭슨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백악관으로 초청하기 까지 했으며 LA 시장 'Tom Bradley'는 마이클 잭슨의 날을 선포할 정도였다. 마이클 잭슨의 신화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1] 뒤에 나올 아동 성추행 논란으로 그의 이미지가 타격을 많이 입었고 음악적으로도 실패했다.[2] 마이클 잭슨의 특유의 코스튬을 다시 하고 싶다는 말[3] 아마도 비틀즈는 항상 대중음악의 선구자로 음악 산업을 이끌었다면 마이클은 Dangerous 앨범부터 다른 아티스트들이 이끄는 흐름에 참여하려 했다는 뜻인 듯[4] 아마 자신이 키우는 애완동물 침팬지[11]와 관련된 것 같다.[5] 대표적으로 추가된 국가가 루마니아, 러시아.[6] CNN에 나온 한 러시아 PD의 증언.[7] 이때 곤 투 순은 당시 미국에서 엄청난화재였던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는 의미로 짧은 연설을 하고 불렀다.[8] 또한 이날 대통령부부가 공연내내 마이클잭슨에게 엄청나게 느끼한진지한 눈빛을 보냈다.[9]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가 잭슨에게 타블로이드 내용들과 연관 있는 무례하고 성의없는 질문을 하거나 도중에 대화를 중단을 하는 등의 뜻밖의 행동을 취해서 대단히 논란이 많은 토크쇼였기도 했다.[10] 펩시는 마이클 잭슨으로 인해 청량음료 시장에서 2%의 몫을 더 증가[12]시켰는데 이 가치가 무려 당시금액으로 1조원에 달하는 9억 4천만 달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