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8 08:13:18

마고 바르카

마고 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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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o Barca[1] | Μάγων Βάρκας
<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기원전 243년
고대 카르타고[2]
사망 기원전 203년 (40세)
지중해 해상
국적 카르타고
가족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
한니발 바르카 (첫째 형)
하스드루발 바르카 (둘째 형)
매형 잘생긴 하스드루발, 보밀카르
조카 한노
지위 카르타고 사령관
참전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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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하스드루발 바르카의 동생으로, 한니발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해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칸나이 전투 후 카르타고로 귀환하여 지원을 요청했다가, 데르토사의 전투 후 위기에 빠진 히스파니아 속주를 구원하라는 카르타고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히스파니아로 가서 둘째 형 하스드루발과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로마군과 대적했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하여 히스파니아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된 뒤, 한니발을 지원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제노바에 상륙했으나, 로마군의 반격으로 중상을 입고 고립되었다. 이후 본국의 귀환 명령을 받고 카르타고로 돌아가던 중 지중해 해상에서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2. 생애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시칠리아 전선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한 명장 하밀카르 바르카의 세번째 아들이다. 큰 형 한니발 바르카, 둘째 형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있었다. 또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 형제가 있었는데, '잘생긴 하스드루발'과 결혼하여 한노를 낳았다. 그의 유년기 및 장군이 되기 전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며, 언제 히스파니아로 넘어갔는지도 불확실하다. 다만 폴리비오스가 그를 "어릴 때부터 군사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기술한 것을 볼 때,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여 전투 경험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그는 이에 가담하여 기병대를 지휘하였다. 카르타고군이 론 강에 이르렀을 때, 반대편 강둑에 켈트족 군대가 집결하여 카르타고군이 건너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니발은 마고에게 기병 분견대를 이끌고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그곳에서 강을 건너서 매복하게 했다. 이후 한니발이 강을 건너서 켈트족과 맞붙는 사이, 그는 텅 빈 적진을 급습하여 불을 지르고, 뒤이어 적의 배후로 쳐들어가 혼란을 야기했다. 그 결과 켈트족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하였고, 카르타고군은 무사히 강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보밀카르의 아들 한노가 이 역할을 담당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그가 공적을 세운 게 사실인지는 불확실하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뒤,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11월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상대로 승리하고 부상을 입혔다. 이때 마고도 이 기병전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니발은 트레비아 강을 사이에 두고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의 로마군과 대치하다가, 누미디아 기병대로 하여금 적진을 기습하게 하고, 마고에게는 별도로 기병 1,000명과 보병 1,000명을 거느리고 인근 숲에 매복하게 했다. 이후 로마군이 트레비아 강을 건너와서 아군과 격돌하자, 그는 즉시 출격하여 로마 보병대의 후방을 급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트레비아 전투에서 최대 2만 명의 로마군이 전사했다.

기원전 217년 봄 카르타고군이 북이탈리아에서 에트루리아로 남하했다. 이때 로마 측은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를 아펜니노 산맥 쪽의 통로인 아레티움(오늘날 아레초)에 주둔시키고,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의 군대를 아드리아 해 연안 가도에 위치한 아리미눔(오늘날 리미니)에 주둔시켰다. 그들은 한니발이 둘 중 한 곳으로 내려오리라 보고, 한니발이 한 쪽으로 가면 다른 쪽이 즉시 달려와서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두 사람의 예상과는 달리 아펜니노 강과 아르노 강 주변의 거대한 늪지대를 강행 돌파했다. 이때 마고는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고 갈리아 병사들의 후방에서 따라가면서,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탈주하는 걸 막았다. 이후 벌어진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그의 역할은 알려지지 않았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전체 기병대 지휘는 마하르발이 맡았다고 한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마고는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부관을 맡았다.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는 한니발과 함께 중앙에서 로마 군단병을 대적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오른쪽 측면을 지휘했다고 한다. 칸나이에서 완승을 거둔 뒤, 그는 분견대를 이끌고 삼니움 또는 브루티움의 여러 도시를 돌며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한니발은 마고를 카르타고로 보내 칸나이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를 보고하고 지원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마고는 카르타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20만 이상의 적을 죽이고 5만 이상을 포로로 잡았으며, 4명의 집정관 중 2명을 죽이고 1명은 부상당했으며, 나머지 한 명은 50명의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가까스로 도주했다."라고 상당히 과장된 보고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투에서 쓰러진 로마의 기병과 원로원 의원들에게서 노획한 반지를 바닥에 쏟아부었다. 의원들은 그의 보고에 환호성을 터트렸고,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4,000명의 누미디아 기병, 40마리의 코끼리,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히스파니아에도 2만 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을 모집하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215년, 마고는 보병 12,000명, 기병 1,500명, 코끼리 20마리, 은화 1,000 달란트를 확보했다. 그는 60척의 전함의 보호 아래 이탈리아로 수송하려 했지만, 하스드루발이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완패하고 여러 이베리아 부족들이 로마 편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원로원은 마고의 군대를 히스파니아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뒤 둘째 형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합세했다. 그들은 함께 베티스 상류에 있는 일리투르기스 시를 포위했지만, 로마군의 역습으로 패퇴했다. 뒤이어 인디빌리스 전투에서 재차 맞붙었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 13,000명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손실이 과장되었다고 보지만,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한 건 분명하다고 본다.

기원전 214년, 하스드루발과 마고는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베리아 부족들을 물리쳤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아크레 레브카에 도착하여 그들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베리아 부족들은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후 카르타고군은 두 번의 접전에서 로마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히고 일리투르기스 시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동생을 구하러 달려온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언덕 위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도중에 합세한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찰이 벌어지면서 통합된 지휘를 하지 못했고, 세 장수는 각기 다른 진영을 세우면서 개별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그나이우스는 이 틈을 타 일리투르기스에 특공대를 보내 동생과 연락을 취했다. 다음날 스키피오 형제는 카르타고군을 협공하였고, 카르타고군은 대패했다. 이후 하스두르발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문다 전투와 아브링가 전투에서도 연이어 패배했다.

하지만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로마군이 공세를 멈추면서, 세 장수들은 히스파니아의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기원전 213년,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를 배신하고 로마 편에 붙은 누미디아 왕 시팍스를 응징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마시니사의 협조하에 시팍스를 상대로 승리한 뒤, 마시니사가 이끄는 3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했다. 한편, 스키피오 형제는 그동안 확보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2만 명의 켈티베리아인을 용병으로 새로 고용했다.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2만여 로마군을 이끌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치기로 했고,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1만여 로마군에 2만의 켈티베리아인 용병을 합한 3만여 명으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치기로 했다.

둘 중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그나이우스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하스드루발은 그나이우스의 주력이 로마인이 아닌 켈티베리아인들인 것을 파악하였고, 용병의 습성을 이용하여 이들을 매수할 계획을 세웠다. 이윽고 로마인 몰래 열린 켈티베리아 족장과의 회담에서 하스드루발은 그들이 철수하는 대가로 상당한 양의 보수를 주기로 약속했다. 켈티베리아인들은 다음날 로마군이 보는 앞에서 군기를 내리고 철수했다. 그나이우스는 2배나 많은 용병대를 무력으로 저지할 수 없었기에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켈티베리아인들은 고향에서 전쟁이 나서 집에 간다고 둘러대며 그대로 캠프를 떠나버렸다. 이로 인해 그나이우스는 한순간에 전력이 급락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한편,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족장 인디빌리스의 7,500명 이베리아군을 푸블리우스의 로마군 쪽으로 파견했다. 당시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의 유격전에 시달리던 푸블리우스는 그들이 합류하면 끝장이라고 여기고, 그 전에 급습하기로 했다. 2천의 병력을 티베리우스 폰티우스에게 맡겨 진영 수비를 담당하게 한 뒤 전 병력을 이끌고 인디발리스를 추격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행군한 로마군은 인디빌리스의 군대를 따라잡고 공세를 개시했다. 그런데 전투 도중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들이닥쳐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였고, 로마군은 이로 인해 큰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각각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면서, 로마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푸블리우스는 어떻게든 활로를 뚫고자 사활을 걸고 싸우다가 한 기병이 내지른 창에 찔러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가 죽자 로마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고, 적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살육을 자행했다.

그 후 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 마시니사는 재빨리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합세하여 그나이우스를 공격했다. 그나이우스는 한밤중에 몰래 캠프를 버리고 철수했지만, 아침에 하스드루발이 급히 파견한 누미디아 기병이 이들을 추격하여 낮에 따라잡았다. 로마군은 누미디아 기병대의 훼방으로 인해 진군 속도가 느려지자 일로르카 언덕 위에 숙영하기로 했다. 그날 밤 하스드루발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이끄는 카르타고 총 병력이 집결해 언덕을 에워쌌고, 다음날 아침 총공격을 감행해 로마군을 섬멸했다. 그리하여 스키피오 형제는 목숨을 잃었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로마군 8천명은 에브로 강 북쪽에 집결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통합된 지휘체계의 부재와 지휘관들간의 불화로 인해 로마군을 완전 섬멸하기 위한 통합된 공세를 가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이끄는 1만 병력이 도착하여 패잔병들과 합세했다. 하지만 네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새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기원전 209년, 스키피오는 3명의 카르타고 사령관들을 일일이 격파하기 위한 공세를 벌이는 척하다가, 적이 방심한 틈을 타 전군을 함선에 태운 뒤 해상을 통해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속주 수도인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반나절만에 함락시켰다.(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당시 중부 이베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을 토벌하고 있던 그는 적의 전광석화같은 공세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스키피오의 관용 정책에 감화된 이베리아 부족들이 대거 로마군에 붙으면서 세력이 안달루시아로 축소되자,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가 안달루시아를 침공할 수 있는 과달키바르 상류 계곡의 카스툴로를 점령했다. 그러나 208년 초 바이쿨라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배했다. 그래도 전열을 유지한 채 철수한 덕분에 주력군을 보전할 수 있었다. 마고는 형이 이미 패퇴할 때 전장에 나타났지만, 로마군이 언덕을 장악한 걸 보고 상황을 금세 눈치채고 철수했다.

이후 형 하스드루발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앞으로 어찌할 지 논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 회의에서 자신이 3만 장병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세할 테니, 두 사람은 히스파니아에 남아서 스키피오와 전투를 지속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이 점거한 피레네 산맥의 동쪽 고개를 피해 서쪽 고개를 건너 크게 우회하여 알프스로 진격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베티스 계곡으로 이동했고, 마고는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발레아레스 제도로 향했다. 기원전 207년 아프리카에서 파견된 한노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부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1만 로마군의 기습으로 크게 패했다. 한노는 포로로 잡혔고, 그는 기병만 추스려서 하데스로 도피했다.

기원전 206년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50,000~70,000명의 보병과 4,5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하여, 스키피오를 상대로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일리파 전투) 그는 기병대로 로마군을 기습하려 했지만 격퇴되었고, 이후의 대규모 접전에서 스키피오의 탁월한 지휘에 힘입은 로마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추격을 피해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던 카르타고인은 불과 6,000명이었다고 한다.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소수의 측근만 거느린 채 배를 타고 하데스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은 로마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하데스에서도 로마군에게 도시를 넘기려는 음모가 있었으나, 마고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공모자들을 체포해 카르타고로 보냈다.

마고는 히스파니아를 탈환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라고 요청했지만, 카르타고 원로원은 이탈리아로 건너가 가능한 한 많은 갈리아인을 모집하여 한니발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고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돈을 받았고, 하데스에서 찾은 모든 금과 은을 몰수했다. 이후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해봤지만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하데스로 귀환했을 때 도시에 들어가는 게 허용되지 않자, 도시의 최고 관리들을 유인하여 십자가형에 처한 뒤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떠났다. 이후 메노르카 섬에서 겨울을 보내고, 기원전 205년 봄에 보병 12,000명과 기병 2,000명을 이끌고 리구리아에 상륙했다. 그는 전투 없이 제노바를 점령하고 갈리아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에트루리아를 거쳐 남쪽으로 이동하여 형 한니발과 합류하려 했지만,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총독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과 격돌했다.(인수브리아 전투) 그는 전투 코끼리를 활용하여 그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로마군이 코끼리를 향해 투창을 집중적으로 던져 무력화시키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그는 전투 도중에 허벅지에 중상을 입었고, 제노바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기원전 203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를 위협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은 스키피오가 제시한 평화 조약을 승인하고 한니발과 마고에게 귀국을 명령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프리카로 귀환하던 중 지중해 해상에서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고 한다. 반면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그는 한니발이 망명할 때 함께 망명했다가 난파선에서, 또는 노예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리비우스의 기록이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추정한다.


[1] 페니키아어로 마고는 '바알이 보낸 자'를, 바르카는 '번개'를 의미한다.[2] 튀니지 튀니스아밀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