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李仁模 Ri In-mo | |
출생 | 1917년 8월 24일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일본령 조선 함경남도 풍산군 |
사망 | 2007년 6월 16일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북한 |
가족 | 처 김순임 딸 리현옥 손자 2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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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인모는 1993년 북한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이다.2. 생애
1917년 10월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화전민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 사망하여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그 후 일본 동경공업고등학교[1]에 다니다 중퇴를 한 후 고향인 풍산에서 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해방을 맞았고, 해방 후에는 북조선노동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나섰다.그 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이 시기 행적이 불분명하다. 북한에서는 인민군 종군기자로 전선취재를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북한문제 전문가 이기봉이 1992년에 입수한 1952년 광주고등군법회의 '피의자 신문조사', '예심조사보고' 등에 의하면 조선로동당 경남도당 군사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재직하며 인민군이 장악한 지역 일대에서 의용군을 강제모집해 전선에 투입하고 서울 수복 후에는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국 전쟁 중인 1952년 빨치산 토벌대에 의해 잡혀 7년 간의 형기를 마치고 1959년 출소했으나 19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혐의로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아 대전교도소로 재수감된 후 1968년 광주교도소, 1975년 대전교도소, 1978년 청주보안감호소를 각각 거치면서 1988년 석방 시까지 도합 36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 후 경남 김해에서 농사를 짓는 김원상씨의 집에서 지내왔다.
리인모의 송환 문제가 점화된 시기는 그가 병상에서 가족을 그리워 하는 심정을 담아 쓴 수기 및 <북의 어머님께>란 장문의 편지 1991년 월간 말 등의 잡지에 실린부터이며 제5차 고위급회담 때 서울에 온 북측 기자가 리씨 부인의 답장을 남측 보도진에게 전달하면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생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북한에 살던 부인과 딸이 '우리 남편을 돌려주세요'라는 호소를 로동신문에 실었고 북한 정부도 1992년 1월 남북교류협력 분과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송환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정부는 1992년 7월 7.7 선언 4주년을 맞아 남북 간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이산가족의 희망지역 정착을 제의했고 그는 그 대상으로 포함됐다. 이어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관계를 염두에 둔 '인도적 차원'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그는 휠체어를 탄 채 42년만에 북한으로 송환될 수 있었다. 당시 정부는 리인모가 북한으로 송환되기는 하지만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을 감안해 '장기방북'이라는 형식을 취했으며 그가 소지하고 있던 주민등록증을 회수했다.
북송 후, 그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고위간부들에게 제공되는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부인인 김순임과 살아왔으며 슬하에 외동딸 리현옥씨 부부, 외손자와 손녀가 각각 1명씩인 것으로 알려졌다. 딸 리현옥는 평양의 한 중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리인모는 2004년 인천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발표 4돌 기념 우리민족대회'에 북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하다가 2007년 6월 사망하였는데 북한에서 밝힌 사인는 ‘남조선의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 시체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3. 북한의 리인모 띄워주기
2008년 세워진 평양직할시 통일거리에 세워진 리인모의 동상 |
4. 여담
- 리인모 띄워주기도 그의 말 한마디로 중단되었다는 설이 있다. 리인모가 북한의 교화소를 둘러보고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후 그를 활용한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됐고 이후 그는 사회와 고립돼 외롭게 연명하다 2007년 6월 생을 마쳤다는 설이다.
- 리인모 사후 조계종 소속의 중이자 시인인 진관은 152페이지 분량의 '리인모 선생을 그리워하며' 추모 시집을 2014년 4월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