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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FC9DE><colcolor=#fff> 밀라노 공국 제7대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 Ludovico Sforza | |
| |
이름 |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Ludovico Maria Sforza) |
출생 | 1452년 8월 3일 |
밀라노 공국 밀라노 | |
사망 | 1508년 5월 27일 (향년 55세) |
프랑스 왕국 로슈 성 | |
재위 | 밀라노 공국의 공작 |
1494년 10월 21일 ~ 1499년 9월 6일 | |
배우자 | 베아트리체 데스테 (1491년 결혼 / 1497년 사망) |
자녀 | 마시밀리아노, 프란체스코 |
아버지 |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 |
어머니 |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 |
형제 | 갈레아초 마리아, 이폴리타 마리아, 필리포 마리아, 스포르차 마리아, 프란체스코 갈레아초 마리아, 아스카니오 마리아, 엘리사베타 마리아, 오타비아노 마리아 |
종교 | 가톨릭 |
1. 개요
밀라노 공국의 제7대 공작. 형인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암살당한 이후 어린 나이에 밀라노 공작이 된 조카에게서 실권을 가져가 밀라노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보다 별명인 '일 모로'로 주로 불렸다.2. 생애
2.1. 밀라노의 지배자
1452년 8월 3일 밀라노에서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의 4남으로 태어났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어두운 색의 피부로 인해 무어인이라는 뜻의 '일 모로(il Mor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계승 순위는 낮지만 밀라노 공작의 자식들 중 가장 뛰어나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466년 아버지 프란체스코가 사망하자 형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루도비코는 모르타라 백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1476년 형 갈레아초가 암살당하고 7살 된 조카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공작이 되었다. 루도비코는 빠르게 밀라노를 장악하고 섭정단의 머리였던 치코 시모네타를 참수, 잔 갈레아초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사보이아의 보나를 섭정직에서 쫓아낸 뒤 자신이 섭정이 되어 밀라노의 실권을 손에 쥐었다.
비록 섭정이라는 명목의 찬탈자나 다름없었으나 능률적인 통치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우선 광대한 농장과 가축사육장을 통해 농업과 축산업을 육성하고 각종 제조업을 지원했다. 그리고 무역과 사람들의 편의를 촉진하기 위한 도로를 확장했다. 2만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견직물 산업은 피렌체를 위협할 수준이 되었다. 또한 훌륭한 예술가들을 밀라노로 데려오고 지원해주었다.
2.2. 결혼과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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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공작부인 베아트리체 데스테 |
1489년 밀라노의 위신을 위해 조카 잔 갈레아초를 자신의 또다른 조카인 나폴리의 이사벨라와 결혼시켰다. 이사벨라는 공작인 남편에게 실권이 없다는 것을 불만스러워하고 루도비코와 갈등을 빚었다. 이사벨라는 자신의 할아버지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실권을 잔 갈레아초 부부에게 넘길 것을 주장하며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루도비코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잔 갈레아초의 여동생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를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시집보내기로 하고 공작위와 권력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평소 나폴리를 노리던 프랑스의 샤를 8세와 동맹을 맺은 뒤 나폴리를 침공하라고 꼬드겼다. 샤를 8세가 군대를 움직여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이 개시된 1494년에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다소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 요절했다. 루도비코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2.3. 비극의 시작
나폴리를 점령한 프랑스는 이어서 밀라노를 향한 야욕을 드러냈다. 샤를 8세의 매형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는 자신의 할머니가 밀라노의 공녀 발렌티나 비스콘티라는 것을 근거로 밀라노 공작위를 요구했다. 루도비코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는 아내가 밀라노 공작의 딸이라는 명분으로 혼란기에 밀라노 공작이 되었지만 그의 아내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는 서출이기 때문에 오를레앙 공작의 계승권이 우선이라는 것이 프랑스의 주장이었다. 1495년 3월 루도비코는 신성 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를 위시한 이탈리아의 각국들과 베네치아 동맹을 맺어 밀라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1496년 아내 베아트리체 데스테가 세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이때 루도비코는 루크레치아 크리벨리라는 애인을 두고 있었는데, 베아트리체가 임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레치아 또한 임신했다. 베아트리체는 매우 분개하며 루크레치아를 내쫓으려 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남편과의 사이가 냉랭해졌다. 1497년 1월 2일 베아트리체는 아이를 사산하고 숨을 거두었다. 루도비코는 크게 자책하고 슬퍼하며 매일 아내의 묘를 찾았다.
2.4. 몰락
1499년 7월 프랑스가 밀라노를 침공하면서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1498년 샤를 8세가 숨을 거두고 오를레앙 공작이 루이 12세로 즉위했다. 루이 12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자신의 친척과 결혼시켜 교황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이고, 크레모나의 영유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았다. 이렇게 힘을 모은 루이 12세는 루도비코를 조카를 독살하고 공작위를 빼앗은 찬탈자라고 주장하며 밀라노를 공격했다.체사레 보르자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루도비코는 밀라노에서 도망친 뒤 군사를 모아 반격을 시도했다. 1500년 노바라에서 스위스 용병을 포함한 양측 군대가 대치하게 되었다. 휘하의 스위스 용병들이 동포와의 싸움을 거부하며 배신하자 궁지에 몰린 루도비코는 스위스인으로 변장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프랑스 군에 붙잡혔다. 프랑스로 연행된 루도비코는 1508년 로슈 성의 지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3. 대중매체에서
미국 드라마 더 보르지아에서 짧게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미켈레토 코렐라와 체사레 보르자에게 살해당한다. 배우는 이반 케이.드라마 레오나르도에서 제임스 다시가 연기했다.
4. 기타
- 키가 6피트[1]가 넘는 장신에 살집이 있었으나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 루도비코가 지원한 예술가 중에는 불세출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있었다.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알아보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일 모로의 보물'이라고 불리며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최후의 만찬〉이 있다. 또한 도나토 브라만테도 루도비코 아래에서 건축가, 화가로 활약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은 루도비코의 연인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그린 초상화다. 흰 담비는 스포르차 가문의 상징인데, 이 작품에서 체칠리아가 안고 있는 담비가 루도비코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
[1] 약 183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