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디미트리예 료티치 Dimitrije Ljotić | Димитрије Љоти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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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8월 12일 |
세르비아 왕국 베오그라드 | |
사망 | 1945년 4월 23일 (향년 53세) |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 아이도브슈치나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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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이브카 마브리나츠 (배우자) 블라디미르 료티치 (아버지) 류비차 스타노예비치 (어머니) 야코브 료티치 (남동생) |
학력 | 베오그라드 대학교 (법학과 / 학사) |
종교 |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
직업 | 정치인, 변호사 |
별명 | 료타(Љота) |
소속 | 유고슬라비아 국민운동 |
1. 개요
세르비아 왕국의 법무부 장관, 변호사, 파시즘 정당 즈보르(ZBOR)의 지도자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독일 당국과 협력한 인물이다.2. 생애
2.1. 초기와 군 생활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1891년 8월 21일 베오그라드에서 블라디미르와 류비차 류티치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형제자매인 야코브와 옐레나와 함께 성장했다. 가족이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후에는 만 16세도 되지 않아 외무부의 허가를 받아 세르비아 테살로니키 고등학교에서 졸업장을 취득했다. 젊은 시절, 부모의 영향과 독서로 인해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교회에 큰 매력을 느꼈고, 어릴 때부터 전례를 좋아했다. 그의 교회에 대한 관심은 장래 직업에 대한 꿈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장교나 교사가 되고 싶어한 반면, 그는 신부가 되고 싶어 했다. 점차 그의 관심사는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천문학자도 되고 싶어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신부가 되는 것만 고집하지 않아도 되죠? 천문학자도 될 수 없을까요?”라고 물었고, 아버지는 웃으며 가능하다고 답했다. 디미트리예는 어릴 적 사고방식 속에서 천문학적 지식을 배우는 것도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과 같다고 믿었다. 그는 스메데레보에서 고등학교 첫 3년을 마쳤으나, 아버지 블라디미르가 외교관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가족과 함께 테살로니키로 이주하게 된다. 이 시기에 디미트리예의 종교적 태도는 잠시 변화한다. 그는 사춘기 시절 종교적 태도가 크게 식었다. 아버지의 근무 때문에 테살로니키에서 살았고, 16세가 되기 전에 세르비아 학교에서 졸업시험을 치렀다. 터키어도 배웠다. 그때부터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 꿈은 고등학교 4학년부터 법학부 2학년까지 이어졌다. 이런 변화의 주요 이유는 당시 화려하고 다채로운 국제적 삶의 표면적 매력 때문이었다.세르비아로 귀국한 뒤, 그는 베오그라드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했다. 빈과 취리히에서도 수학했다. 디미트리예의 형제인 야코브 료티치 역시 부다페스트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료티치는 공부를 즐기지 못했다. 수업에는 거의 가지 않았고, 성적 확인이나 출석 확인을 위해서만 교수들을 만났다. 30강의 중 단 한 번도 제대로 출석하지 않았다. 대신 항상 국립도서관에 머물며 철학을 주로, 그 외에도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아무 순서 없이 읽으며 톨스토이와 그의 기독교 이해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종교심이 다시 되살아났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그는 톨스토이식의 악에 대한 전면적 저항 거부 개념[1]을 따르는 기독교적 관점을 갖게 되었고, 채식주의자, 금욕주의자, 순결주의자로서 철저히 기독교 윤리를 따랐다. 이때의 료티치는 이념적으로 톨스토이식 아나키스트였으며, 국가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간주하여 국가 자체를 반대했다. 이는 병역 선서를 거부할 정도였으나, 실제로 그가 태어난 때의 연도는 징집되지 않아 실현되지는 않았다. 새로운 신념과 사고방식은 그가 법학 공부를 포기할까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버지 블라디미르의 반대는 오히려 그에게 반항심을 불러일으켰고 법학을 끝내기로 하였다.
제1차 발칸 전쟁 동안,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잠시 동안 불가리아에서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기자 보조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비교적 좌파적 성향은 현지 당국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몇 차례 곤란을 겪은 후 세르비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전쟁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제1차 발칸 전쟁에서 병원 근무 자원봉사를 맞았다. 근무지는 아직 개장하지 않은 산토리움 브라차르였다. 거기서 두 달 정도 머물며 부상자들을 돌보았지만, 부서가 폐쇄되면서 봉사도 끝났다. 짧은 병원 봉사 기간 후, 디미트리예는 집으로 돌아와 학업을 이어갔고, 1913년 여름 제2차 발칸 전쟁 직전에 법학을 마쳤다. 제2차 발칸 전쟁그는 이전처럼 병원 근무만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톨스토이주의를 핑계 삼아 위험을 회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최고사령부의 의무 부서에 가서 콜레라 부서의 병원봉사자로 지원했다. 그는 이번에는 산하 부대의 병원 근무 부서에 지원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발칸 전쟁 당시 세르비아의 병원 체계는 매우 잘 조직되어 있었지만, 당시 세르비아 병원 부대에서 부족했던 점은 콜레라 백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료티치는 첫 임무를 지금의 즈베바츠(Zbevac)였던 지베바치(Zibevač)에서 수행했고, 잠시 스코페(Skopje)에 머문 뒤, 결국 쿠마노보(Kumanovo)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무했다. 1912년 10월 말, 쿠마노보는 오스만 군과 세르비아 군이 격돌한 중요한 전투의 현장이었으며, 이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이 승리하여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의 첫 승리를 기록했다. 쿠마노보에서의 경험은 류티치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그곳 야전병원에서의 체험을 마치 지옥과도 같이 묘사한 부분들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그 뒤의 전쟁에서도 충돌과 전투에 참여해 실제로 사람들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쿠마노보에 있던 도나브스카(두나브) 사단 제2예비대 제3야전병원같은 끔찍한 지옥은 정말 본 적이 없었다… 7월 1일부터 8월 14일까지 927명이 죽었고, 내가 그곳에 있던 동안만도 약 600명이 죽었다. 그것도 어떤 기괴함과 혼란, 절망과 지옥 속에서였는지… 특히 ‘노란 천막’에는 병원장 예프레모비치 박사, 검사관 니코디예비치 박사, 터키인 포로 의사 한 명, 상근 병원병사 한 명, 그리고 나만이 건강한 상태로 들어갔다… 그때는 예방용 항콜레라 주사의 효과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누구나 전염과 죽음의 막대한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만약 내가 콜레라로 죽는다면 아버지의 무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점이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 저녁, 쿠마노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우리는 불가리아와의 부쿠레슈티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건강한 자들과 회복자들 사이에는 기쁨이 일었지만, ‘노란 천막’ 안에는 음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는 그곳―가장 위중하고, 사실상 죽음을 선고받은 이들에게도―좋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진한 어둠, 신맛 나는 물, 그리고 악취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문간에 서서, 밝은 배경 속에서 내 모습이 잘 보일 것이라 확신하며 말했다. ‘형제들이여! 평화가 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바닥―구토물과 배설물로 더럽혀지고 썩은 짚이 깔린 그곳―에서 대답 대신 여기저기서 깊은 한숨과 신음이 들려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신음 같기도 한 울음소리가, 가장 먼 곳에서는 쉰, 거친 목소리가 있는 힘껏 외쳤다. ‘물!’ 나는 솔직히 말해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이 끔찍한 장소의 사람들은 이제 어떤 걱정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아니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다른 종류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13.
…그러던 어느 저녁, 쿠마노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우리는 불가리아와의 부쿠레슈티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건강한 자들과 회복자들 사이에는 기쁨이 일었지만, ‘노란 천막’ 안에는 음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는 그곳―가장 위중하고, 사실상 죽음을 선고받은 이들에게도―좋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진한 어둠, 신맛 나는 물, 그리고 악취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문간에 서서, 밝은 배경 속에서 내 모습이 잘 보일 것이라 확신하며 말했다. ‘형제들이여! 평화가 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바닥―구토물과 배설물로 더럽혀지고 썩은 짚이 깔린 그곳―에서 대답 대신 여기저기서 깊은 한숨과 신음이 들려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신음 같기도 한 울음소리가, 가장 먼 곳에서는 쉰, 거친 목소리가 있는 힘껏 외쳤다. ‘물!’ 나는 솔직히 말해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이 끔찍한 장소의 사람들은 이제 어떤 걱정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아니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다른 종류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13.
1913년 가을에는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여러 차례 페타르 왕이 직접 료티치를 파리로 유학 보내려 했다고 밝히지만, 그는 매번 변명을 들어 그 길을 미뤄왔다. 그러나 왕에 대한 충성심. 혹은 그가 표현한 바와 같이 페트르 왕 자신이 자신에게 보여준 관심이 결국 그를 프랑스로 이끌었다. 이는 당시 국왕 페타르 1세의 권유로 외교관 수업의 일환이었고, 프랑스 유학은 매우 권위 있는 교육 경로였다. 파리에서 그는 근왕주의자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국민 왕조가 있으므로 더욱 왕정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의 생각은 료티치가 파리에서 법학 지식을 넓히고, 세르비아로 돌아와 더 뛰어난 법률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료티치의 계획은 달랐다. 그는 더 이상 법학을 공부하고 싶지 않았고, 사회에 더 유익한 공부를 하고자 했다. 의학, 철학, 농업, 단 법학은 제외였다. 그는 하라는 법학 공부는 안하고 2년 과정의 파리 농업 연구소에 등록하기로 결정했다. 1913년 가을, 료티치는 농학을 2년 안에 마치겠다는 목표로 파리에 갔으나, 입학 시험에서 오해로 인해 필기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음에도, 료티치는 파리에서 9개월을 보냈으며, 자서전에 따르면 이 시기 그의 시간을 채운 것은 학교 외에 세 가지였다. 바로 교회, 도서관, 박물관이었다. 료티치는 다시 세르비아로 돌아왔으며, 이는 사라예보 사건 직후 짧은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다음 가을에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 농학에 재도전할 계획이었다. 그 9개월 동안 그는 자신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파리의 지역들을 돌아보았는데, 그중 가장 큰 관심은 교회였다. 자서전에서 그는 프랑스와 세르비아의 신자들을 비교하며, 프랑스 사회에서 종교가 훨씬 더 생활과 사회에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 방문 외에도 료티치는 박물관 탐방에도 열중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박물관을 통해 프랑스 수천 년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고 기록하며, 이를 계기로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프랑스 혁명은 모든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와 평등권을 부여한 유럽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지만, 료티치는 이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여러 부정적 현상들이 바로 이 혁명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파리의 박물관, 특히 그들의 고대 유물들은 천 년이 넘는 한 민족의 역사를 보여주며, 내가 소위 ‘위대한 프랑스 혁명’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약한 경향을 바로잡아 주었다. 이전에도 나는 톨스토이적 아나키즘 시절에 민주주의에 기울지 않았다. 그것이 저급하고, 가볍고, 내리막길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프랑스 혁명의 흔적 1789년의 대혁명, 1848년의 중간 혁명, 1871년의 마지막 혁명을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자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진정한 인간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동물의 자유다. 진정한 인간만이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누구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그를 가둘 수는 있어도, 그는 그곳에서도 자유롭다. 반면 다른 자유는 감옥에 갇힌 짐승처럼 철창을 부수는 자유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18.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18.
료티치는 결국 파리의 농업학원에는 진학하지 않았지만, 그 9개월 동안 그는 정신적 성장을 크게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 시기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갈망과 사랑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었고, 기독교의 진리가 단순한 교리나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과 체험, 순교자의 증언을 통해 입증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당시 역사 교육이 “진보”라는 개념과 인류 사회의 지속적 발전, 종교 개혁과 혁명을 인간 문명의 특별한 성취로 보는 관점에 치우쳐 있어, 실제 역사적 진실과 일치하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공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료티치는 파리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필요한 교육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세상과 신앙, 역사에 대한 관점을 더욱 견고히 했다. 이 경험은 이후 농업학 진학을 시도하지 않은 그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파리 체류를 끝내고 사라예보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를 거쳐 검문을 받으며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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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 료티치(사진에서 맨 왼쪽) | 맨 왼쪽의 료티치와 중앙의 형제 자코브 료티치 |
디미트리예 료티치가 파리에서의 학업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한 이유는 사라예보 사건과 그 이후 벌어진 일들 때문이었다. 1914년 6월 28일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였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료티치를 포함한 많은 청년들이 학생 징집으로 군 복무에 소집되었다. 발칸 전쟁 동안 이미 세르비아군의 장교 인력이 줄어들었고, 1914년 전쟁 초기의 치열한 전투에서도 많은 장교가 희생되었다. 체르 전투는 세르비아군에게 승리였지만, 이 전투에서 259명의 장교와 16,045명의 부사관 및 병사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료티치는 1914년 9월 1일 군에 입대하여 1,300인의 장교 후보생 중 한 명으로 11월 1일, 하사 계급으로 임명되었고 단 두 달의 훈련만 받은 새로운 장교들은 전투에 투입되었다. 1914년 스코페 학생대대는 당시 죽음의 대대라 불렸으며, 전투 부대로 곧바로 파견되어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선으로 향했다. 우리는 진실을 조금밖에 알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군이 탄약 부족 때문에 후퇴하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러나 크라구예바츠에서 고르니 밀라노바츠를 거쳐 루드니크로 향할 때, 후퇴의 더 깊은 이유를 보게 되었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무리들을 보며, 군대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14년 11월 10일, 나는 제1차 징집 V보병연대 4대대 3소대로 들어가 콜루바르 지역에 배치되었다. 소대를 만났을 때, 그들은 이미 잉가 지역의 참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에게는 한 소대를 맡겼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20.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20.
“하지만 나는 병사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그들은 내게 모욕을 퍼붓는다. 신성한 것은 없었다. 왕도, 조국도 없다. 나는 이유를 들어 설득하려 했지만, 그것은 단지 냉소적인 웃음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나서도 고통스럽고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으로 이 사람들에게 인상을 줄 수 있을까? 별장식? 그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의미가 없었다. 내 두 개의 부하사관 계급장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메모
그의 메모
료티치는 제1차 세계대전 초반 자신이 지휘를 맡았던 경험을 매우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의 사기는 매우 낮았다. 이는 전날까지의 지속적인 전투, 끊임없는 후퇴, 그리고 탄약 부족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료티치의 나이 역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겨우 23세의 나이에 이미 전투 경험이 있는 병사들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병사들의 불신과 불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콜루바르 전투의 대승리 후, 그는 병사들에게 지도자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도 초기 며칠 동안 큰 문제를 일으켰던 사회주의자 병사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입증해야 했다는 것이다. 자료는 많지 않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제5보병연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 내내 복무했다. 또 계획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료티치는 자신이 자란 도시인 스메데레보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스메데레보가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도시 방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전쟁에 대해 쓸 때 주로 알바니아 철수와 살로니카 전선의 사건들을 다루며, 스메데레보 방어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전쟁 중 그는 소위로 진급했고,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1915년 10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세르비아 내륙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세르비아군은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불가리아까지 참전해 세르비아는 사실상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였다. 패배는 피할 수 없는 듯 보였고, 별도의 강화에 대한 논의까지 있었다. 료티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바로 이때 처음으로 열정적 연설을 했다고 밝힌다. 준비 없이 한 연설이었지만 아마도 자신이 한 연설 중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나는 생각에 잠겨 지휘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별도의 강화’라는 단어가 내 의식에 와 닿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울이니 지휘관이 ‘우리 정부가 별도의 강화를 체결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불 속에서 일으켰다. 일어나서 돌며 말했다. ‘아니요, 대위님. 그건 우리 정부가 할 수도,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아마 그날 저녁처럼 내가 그렇게 웅변을 펼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비유와 그림들이 마치 준비된 것처럼 저절로 떠올랐다. ‘대위님,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오늘 나는 마지막으로 태양 빛에 비친 코파오니크 산을 보았습니다.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위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섭리가 우리 민족에게 이처럼 극도로 어려운 역할을 주었다면, 반드시 그 민족에게 특별한 위대함도 부여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고통의 짐을 지고 이 산을 오를 때 나는 그리스도의 골고다 언덕 오름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수난 뒤에는 부활이 와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고난을 온 마음과 영혼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도 영광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41 - 43.
아마 그날 저녁처럼 내가 그렇게 웅변을 펼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비유와 그림들이 마치 준비된 것처럼 저절로 떠올랐다. ‘대위님,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오늘 나는 마지막으로 태양 빛에 비친 코파오니크 산을 보았습니다.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위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섭리가 우리 민족에게 이처럼 극도로 어려운 역할을 주었다면, 반드시 그 민족에게 특별한 위대함도 부여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고통의 짐을 지고 이 산을 오를 때 나는 그리스도의 골고다 언덕 오름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수난 뒤에는 부활이 와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고난을 온 마음과 영혼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도 영광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41 - 43.
1915년 11월 25일, 세르비아 정부와 최고사령부는 별도의 강화 체결 대신 알바니아 해안까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자신의 연대와 함께 이른바 알바니아 골고타를 횡단했으며, 자서전에서는 다소 단편적으로나마 그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대화에서 그는 프랑스 장교에게 스메데레보에서 드라치까지 하루도 기차를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이동했다고 이야기했다. 독일군과 불가리아군을 추격하는 전투 중 오브체 폴레에서 부상을 입었고, 알바니아를 후퇴하며 크르프 섬에서 회복을 거쳤다. 료티치는 1918년 전공을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국왕은 1916년 전쟁에서의 공적과 용맹을 인정하여 료티치에게 금메달을 수여했다.
“우리는 흰 바위에 깊게 파인 참호를 뛰어넘었고, 그곳은 포탄으로 더욱 깊게 파여 있었다. 무너진 은폐물과 뒤엎어진 강철 총진지, 찢어진 모래주머니 사이로 굳어버리거나 부러진 팔과 다리가 드러났다. 기관총이 쓰러져 있었고, 뒤에는 버려진 수류탄 발사기와 산포대포가 서 있었다. 곳곳에 잔해가 흩어져 있었고,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리 두 중대, 제1과 제4 자원중대가 트르나브스카 코사 전 구간의 참호를 처음 점령했다. 제1중대 지휘관인 소위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콘크리트와 강철로 된 깊이 5미터의 벙커에 도달했다. 폭탄을 든 두 병사와 함께 벙커 입구에 나타났을 때, 카바이드 등불 아래에서 15명의 병사와 한 명의 불가리아 장교가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장교는 공포에 떨며 손에 드럼통을 들고 중얼거렸다. ‘형제여, 내가 좀 연주해도 될까요…?’ 이들이 그날 밤 처음으로 생포된 적들이었다.”
Станислав Краков, „Ноћ пред бугарским препрекама од жица,“ Време, 22. септембар 1928.
우리 두 중대, 제1과 제4 자원중대가 트르나브스카 코사 전 구간의 참호를 처음 점령했다. 제1중대 지휘관인 소위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콘크리트와 강철로 된 깊이 5미터의 벙커에 도달했다. 폭탄을 든 두 병사와 함께 벙커 입구에 나타났을 때, 카바이드 등불 아래에서 15명의 병사와 한 명의 불가리아 장교가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장교는 공포에 떨며 손에 드럼통을 들고 중얼거렸다. ‘형제여, 내가 좀 연주해도 될까요…?’ 이들이 그날 밤 처음으로 생포된 적들이었다.”
Станислав Краков, „Ноћ пред бугарским препрекама од жица,“ Време, 22. септембар 1928.
1917년 이후 자료는 점점 줄어들며 1917년 그해 성탄절 전야에는 부디미르치 마을에서 전선 근무를 했으며, 그 전인 1917년 11월에는 솔룬 병원에 입원했음을 밝힌다. 입원 당시 진단은 우측 폐 상부의 카타르[2]였으나 병원에서는 다행히 잘못된 진단으로 판명되었다. 사실 1917년은 솔룬 전선에서 비교적 전투가 적은 해였기에 자료 부족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후반기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세르비아도 빼앗긴 영토를 빠르 속도로 전진하여 수복한다. 료티치는 도보로 300km 이상을 이동하여 스메데레보에 도착했고,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가족 집에는 단 이틀만 머문 후, 부대가 새로운 임무를 수행할 크로아티아 해안의 크랄예비차로 이동했다.
“…그리고 내가 크랄예비차에 도착해, 중위 요반 고스파비치(Jovan Gospavić)를 처음 보았을 때,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아, 우리의 크고 순수한 기쁨이여. 아, 우리가 큰 일에 함께했다는 우리 세르비아인의 자부심이여! 아, 우리를 지켜주시고,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우리 병사의 깃발과 명예에 충실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함께했지만 오늘 이 날을 보지 못한 이들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조국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는 큰 사랑이여! …”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휴전으로 끝나고 1920년 중반까지 군 복무를 계속했는데, 1919년에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과 이탈리아 국경 사이의 바크르 철도역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바크르의 크로아티아 농민들과 군대 내 세르비아인들을 관찰하면서 내린 그의 판단인데, 새 유고슬라비아 건국 초기 며칠 동안은 세르비아인들보다 오히려 크로아티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에 더 호의적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유고에 대한 태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는 그 원인을 유대인들이 기근 시기에 고리대금업을 통해 이익을 취한 데서 찾았다.
1920년 4월 16일, 철도노조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주도 아래 파업을 벌였고, 이는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쿤 벨러 정권에 대한 탄약 수송을 저지하고, 동원 해제를 방해하여 예비군들 사이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료티치가 있던 바크르 구역에서는 단 하루 만에 파업이 진압되었으며, 그는 36명의 철도 노동자를 체포해 당국에 넘겼다. 이 사건은 그의 삶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료티치는 원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며 종교에 전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파업을 직접 경험하고 이를 진압한 사건이 그를 정치적 삶으로 이끌었다. 다시 말해, 종교적 헌신보다는 정치 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싸워야 한다는 결심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는 같은 해 6월 17일에 제대했으며, 바크르에서 평생의 배우자 이브카를 만나 1920년 6월 30일, 스메데레보에서 결혼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 23세에서 29세를 군대에서 보냈다. 전혀 아쉽지 않다. 오히려 행복하다. 파리에서 또 하나의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도 아쉽지 않다. 나는 군대라는 힘들고 고된 삶 속에서 가장 큰 정신적 기쁨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어느 도시, 어느 대학에서도 배울 수 없었을 것들을, 나는 전장에서 열린 눈과 열린 영혼으로 배웠고 내 안에 받아들였다.
여러 번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를 잊어야 하고 한 부분만 지켜야 한다면,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 전쟁에서 배운 것 중 어느 쪽을 택할까? 나는 언제나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버려도 된다. 그것은 전쟁 후에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배운 것은 그 어디서도 배울 수 없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23.
여러 번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일부를 잊어야 하고 한 부분만 지켜야 한다면,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 전쟁에서 배운 것 중 어느 쪽을 택할까? 나는 언제나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버려도 된다. 그것은 전쟁 후에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배운 것은 그 어디서도 배울 수 없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23.
군대 생활은 분명히 료티치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군복을 벗은 뒤, 그는 1920년 가을 크로아티아 해안 지방에서 만난 이브카 마브리나츠와 결혼했다. 1921년에는 첫 아들 블라디미르가 태어났고, 몇 년 뒤 둘째 아들 니콜라와 딸 류비차가 뒤따랐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료티치는 새로 꾸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민간인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향의 농장에서 살아갈 계획이었으나, 곧 그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우리 집안의 농장을 경작하며 그 수확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농장은 이미 기구도, 가축도 없는 상태였다. 집안 사정상 이를 다시 마련할 돈도 없었다. 게다가 첫 2년 동안 특별한 지출과 더불어 여러 곤란이 닥쳐왔다. 그때 나는 법학을 마쳤던 것을 떠올렸다. 공직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 시험을 치르기로 하고, 스메데레보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72.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72.
곧 변호사 생활은 상당히 흥미롭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료티치는 여러 흥미로운 소송에 관여했는데, 그중 하나는 신문에서 며칠간 다룰 만큼 큰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유명한 부호 여성의 유언장이 사라진 사건이었는데, 해당 유언장은 위조 혐의로 조사 중이었다. 이 사건은 스메데레보뿐 아니라 발단이 된 포자레바츠에서도 큰 소동을 일으켰다. 료티치는 이 사건에서 피고인 중 한 사람의 변호를 맡았다. 아마 이 사건이 료티치로 하여금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주 고민하게 만든 계기였을 것이다. 그의 말 속에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실망감뿐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한 환멸이 드러난다. 이 시기 료티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평화 시기에 나는 내 사무실과 법정에서 종종 인간 삶과 영혼의 밑바닥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하루의 일이 끝난 뒤 집에 돌아올 때, 그날의 깨달음으로 인해 가득한 씁쓸함에 젖곤 했다. 오직 신앙과 신앙이 설명해 주는 인간 본성의 의미만이 나에게 삶과 열정을 유지할 힘을 주었다. 인간의 악과 타락의 깊이를 보면서, 나는 종종 인간에 대해 혐오와 두려움을 느꼈다. 외형은 사람 같으나, 그런 이들이 살아가고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매일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나는 보통 사람들의 내적 움직임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74.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74.
그렇다고 해서 료티치가 자신의 일에서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뛰어난 언변과 법률적 기반은 그가 유능한 변호사로 자리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는 스메데레보에서 이름난 변호사 중 한 사람이 되었고, 1925년에는 스메데레보 변호사 협회 이사회 8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1928년 6월 20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의회에서 크로아티아 농민당 의원들을 향해 총격을 가한 푸니샤 라치치의 변호인단에도 포함되었다. 당시 총격은 당수 스티예판 라디치를 포함한 당 지도부를 노린 것이었다. 이 사건을 다룬 언론 보도에서 15명의 변호인 가운데 단 8명의 이름만 언급되었는데, 그 가운데 료티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대중 앞에서 그가 상당한 명성을 쌓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협동조합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2. 즈보르 창당과 탄압
료티치는 정치 생활에도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결코 본인의 바람은 아니었으며, 그의 생각은 가족과 일에만 향해 있었다. 그러나 곧 스메데레보에서는 디미트리예가 아버지처럼 급진파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이제 당국은 나를 급진파로 여기기 시작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이 상황은 2년이나 계속되었다. 마침내,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나의 친구인 약사 지보인 타이시치가 나를 설득해 청년 조직에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두 가지 이유로 거절했다. 첫째, 나는 급진당의 원칙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주의, 의회주의, 국민 주권을 지지하지 않았다. 둘째, 나는 파벌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보편적 국민적 기준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우리 사람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타이시치의 끈질긴 설득이 류티치를 굴복시켰다. 타이시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지금, 조국을 위해 그렇게 많은 희생이 치러졌는데, 그 나라를 최악의 자들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텐가? 너희 전우들은 상점이나 사무실, 밭에서 일하고, 혹은 신도들에게 설교만 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네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류티치에게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던 듯하다. 지보인 타이시치와의 대화 이후 그는 급진당에 입당했고, 그렇게 해서 왕국의 정치 생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급진당의 지도자는 니콜라 파시치였다. 당시 정당은 오늘날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프로그램보다는 지도자 인물에 의해 평가되었다. 파시치는 그 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1903년부터 1918년까지 연속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게다가 그는 두 왕조 아래에서 모두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류티치는 곧 인민급진당 청년조직의 지방 지부 회장이 되었고, 이를 통해 그의 정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당의 외부 경쟁자뿐만 아니라 내부 경쟁자들과도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정치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속한 당 내부의 부패를 인식하게 된다. 그는 법원장 선출 과정에서 기존의 부패에 반대해 동료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항의할 것을 제안했으나, 동료들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혼자서 나섰고, 그 결과 기존 법원장이 퇴직하게 되었다. 당내 동료들은 그를 치켜세웠고, 료티치는 그것이 기분 좋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후임으로 새로 임명된 인물이 역시 급진당 출신이었고, 도덕적 자질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법률적 능력마저도 이전 인물보다 떨어지는 자였다는 사실에 그는 깊은 환멸을 느꼈다. 이러한 사례들과 경험들은 료티치가 정당 정치 자체에 대해 점점 더 적대적인 태도를 갖게 만든 원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급진당에 몸담고 있었음에도 정당 정치에 불신을 키웠으며, 국민의 대표를 통한 정치가 본질적으로 타락했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그는 점차 기생충 없는 다른 형태의 권력, 즉 당파 정치가 배제된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구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드미트리예 류티치는 인민급진당의 당원으로 6년간 활동했다. 그는 1923년에 입당했으며, 자신이 사실상 당을 떠난 시점은 1929년 1월 6일에 선포된 왕정 독재(일명 1월 6일 독재, Šestojanuarska diktatura) 이후라고 회고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26년까지는 규율 있는 당원으로 활동했지만 그 이후에는 점차 이탈자가 되었다.
당 동료들과의 불화는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1927년 1월, 신문 《브레메(Време)》에 실린 기사에서는 류티치의 후보 명단을 급진당 내부에서 “비급진적, 배신적, 이탈파”로 규정했다고 전한다. 같은 해 스메데레보에서 열린 급진당 회의에서도 그는 동료인 자리야 바르야치치와 지반 루키치와 충돌했다. 쟁점은 스메데레보 선거구에서 누가 후보 명단을 이끌 것인가였다. 결국 다수의 의사는 루키치를 지지했으며, 료티치는 마지못해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당의 공식 명단을 따르지 않고, 독자 명단을 들고 선거에 출마했다. 1927년 9월 스메데레보 선거에서 류티치는 5,614표를 얻어 공식 급진당 명단(루키치 명단, 5,452표)을 이기며 지역 차원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선거법상 스메데레보 선거구에는 3석만 배정되었는데, 민주당이 11,754표를 얻으며 3석을 모두 차지했다. 급진당 표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결국 의석을 하나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류티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선거를 회고하며, 나의 이탈파 명단이 공식 명단을 표 수에서 이겼다고 강조했다. 이후 그는 도나우 지방 드나브스카 주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29년 1월 6일 왕정 독재의 선포로 의회가 해산되면서 그의 의원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8년 6월 20일 스테판 라디치와 크로아티아 농민당 의원들에 대한 푸니샤 라치치의 의회 내 암살 사건 이후, 왕국의 정국은 급격히 불안정해졌다. 사실 이 사건 이전에도 국정은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의회 내 총격 사건은 젊은 국가가 안고 있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드러냈다. 의회제도는 정치적 열정에 눈이 먼 이들에 의해 남용되었고, 이는 건전한 정치생활을 저해하며 국가의 명성과 질서를 해쳤다.
이어 1929년 1월 6일, 국정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알렉산다르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금지하며 헌법을 정지시켰다. 그는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고 장군 페타르 지브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 조치가 역사적으로 1월 6일 독재(Šестојануарска диктатура)라 불린다. 드미트리예 료티치는 이 조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비록 이 체제가 민주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새 내각에 기존의 구정치인들이 포함된 것을 비판하며 1월 6일의 정신과 어제까지 부패한 정치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입각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난 료티치는 본래의 계획대로 국민의 문화적, 정신적 계몽에 힘쓰고자 했다. 스메데레보 민중대학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으나, 혁명에 대한 그의 부정적 관점 때문에 당국은 이를 불온하게 보아 곧 금지시켰다. 이에 그는 강연 제목을 삶과 죽음을 마주한 세 명의 위대한 여성: 마리 앙투아네트, 롤랑 부인, 샤를로트 코르데로 바꾸었고, 당국은 강연을 허락했다. 애시당초 내용은 프랑스 혁명을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것이었기에, 강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료티치는 이에 그치지 않고, 길드 기반 국가 체제 같은 개혁도 주장했다.
같은 해인 1929년 10월 3일, 왕국의 국호가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되었다. 이와 함께 행정과 영토 구획도 개편되었다. 기존의 지역 단위는 ‘바노비나’(banovina)라 불리는 새로운 행정 단위로 대체되었으며, 총 아홉 개의 바노비나가 설치되었다. 대부분은 해당 지역을 흐르는 강의 이름을 따랐으나, 프리모르스카(Primorska)만은 예외였다. 최고 권한은 국왕이 쥐고 있었고, 반(지방 총독)은 국왕의 칙령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각 바노비나에는 자문 성격의 기구로 반 평의회가 설치되었다.
료티치가 살던 스메데레보는 중심지가 노비 사드인 두나브스카 바노비나(Dunavska banovina)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1930년 포두나브스키 군을 대표해 반 평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스메데레보를 방문한 장관들 앞에서 그는 연설을 했는데, 새로운 정권에 대해 국가 기구가 지나치게 비대해지지 않도록 하고, 국가 건설이 이루어지되 이 나라가 관리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관리들이 국민의 이익을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연설은 현장에 모여 있던 군중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독재 체제는 료티치의 경력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점점 더 많은 국가적 직책을 맡게 되었고, 스메데레보 시민들 사이에서 그의 의견은 갈수록 신망을 얻었다. 결국 그를 곧 페타르 지브코비치 정부의 신임 장관으로 임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며, 이는 단순히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류티치 자신은 당시 궁정장관이었던 친구 보골류브 예브티치로부터 법무부 장관직 제안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짧은 협의 끝에 장군 페타르 지브코비치가 이끄는 내각에서 법무부 장관직을 맡기로 동의했으며, 비록 실제 임명까지 며칠은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애국심과 왕정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한 알렉산다르 국왕은 1931년 2월 16일 당일에 료티치를 페타르 지브코비치 정부의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류티치는 1931년 2월 16일부터 같은 해 9월 2일까지, 7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만 장관직을 맡았다. 법무부에서의 활동 초반부터 그는 총리 지브코비치와 여러 사안에서 의견이 충돌했으며, 이러한 불화가 결국 그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그는 “나는 실제 업무에서 상당히 제약을 받았다. 내 소관에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단 한 건도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료티치는 자신이 구상한 헌법 초안을 국왕에게 직접 제출했는데, 국왕은 그 초안을 흥미롭게 여겼다. 그래서 료티치는 한 달 안에 최종 헌법안을 완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러한 헌법은 그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기업조합주의적 체제와 유사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탈리아는 이미 거의 10년 가까이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이는 곧 료티치가 어떤 체제를 지향했는지를 암시한다. 바로 이 민주주의의 폐지가 료티치가 새 헌법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들은 새 국가체제를 통해 모든 권력을 두체 즉 무솔리니에게 집중시키려 했다. 비록 명목상 군주제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실제 권력은 무솔리니에게로 향했다. 반면 료티치는 권력을 국왕의 손에 남겨 두기를 원했다. 그의 구상에서 두체는 곧 국왕 자신이었다.
“나는 그 계획을 작성하여 1931년 6월 28일 국왕께 제출하였다. 구체적 현실을 고려하여, 나는 하나의 유기적이고 헌정적이며 세습적인 군주제, 민주적이지 않고 의회주의적이지 않은 군주제를 구상하려 했다. 그것은 국민의 생생한 역량을 경제적·신분적·문화적·자선적 단체로 조직화해 활성화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며, 정부는 정치적으로 오직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고, 사적으로는 국왕과 의회 모두에게 책임을 지며, 지방 자치가 분권적으로 이루어지는 체제였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당시 유럽에서 이런 헌법을 가진 국가는 전혀 없었다. 최초의 기업조합 헌법은 두 해 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집권한 포르투갈에서 제정되었고, 그 다음이 1934년 5월 1일 제정된 오스트리아의 헌법이었다. 6월 28일, 료티치는 국왕에게 새로운 헌법 초안을 제출했다.
국민은 비밀투표로 대표를 선출한다.
후보 추천은 직능 단체, 문화 및 인도주의 단체 등의 대표로 구성된 지역 위원회가 담당한다.
국민은 이 헌법 초안을 자유로운 비밀 투표로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
후보 추천은 직능 단체, 문화 및 인도주의 단체 등의 대표로 구성된 지역 위원회가 담당한다.
국민은 이 헌법 초안을 자유로운 비밀 투표로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
료티치는 점점 정부의 입장과 멀어졌고, 그와 총리 페타르 지브코비치 사이의 갈등이 곧 표면화될 것은 명확했다. 정당 창설과 헌법 제정 논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법무부 장관으로서의 다른 업무도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 불과 7개월간 재임했지만, 그는 여러 법률 제정 과정에 참여했다. 그중 하나가 공증인법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지브코비치 장군과 충돌했다. 또한 세계 대공황으로 불안정해진 경제 상황에서 디나르화를 안정시키기 위한 외화 차관법(안정화법)도 다뤘다. 이 외에도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칙령에 서명했다. 그의 재임 시기 가장 흥미로운 칙령 가운데 하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레포슬라바 교도소에서 마리보르 교도소로 이감한 명령이었다.
새 정당 창당 문제는 1931년 8월 17일 열린 내각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지브코비치는 모든 내각 구성원이 이 문제에서 단합하기를 원했고, 나아가 새 정당이 창립되면 모든 장관이 참여하기를 바랐다. 회의에서 정당 창당 여부를 표결한 결과, 디미트리예 료티치만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당은 심리적 범주이지 기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심리적 이유로 정당에 모인다. 그 정당의 강령과 창립자들이 발표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것을 볼 수 없다. 나는 국왕의 권위에 의해 초청되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내각만을 본다. 물론 국왕은 막대한 권위를 지니고 있고, 우리 역시 그 권위에 의해 정당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우리가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단순히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오늘날 그런 의미의 정당을 만들 충분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 회의에서 료티치는 소수에 머물렀고, 나머지 내각 구성원 모두는 정당 창당에 찬성했다. 이 회의는 이미 가득 차 있던 료티치와 지브코비치 사이의 불화에 마지막 불씨가 되었고, 결국 그는 같은 날, 회의가 끝난 몇 시간 후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국왕 알렉산다르는 1931년 9월 2일 이 사임을 수락했고, 그 사실은 다음 날 공표되었다. 이에 따라 료티치는 장관직에서 사임한다. 장관 연금까지 자진 포기했다. 그의 사임 이유는 세르비아 총대주교였던 가브릴 도지치와의 1934년 10월 16일 니슈카 바냐에서의 대화로도 드러난다. 가브릴 총대주교는 회고록에서 료티치를 정직한 정치인으로 묘사한다.
"폐하, 저는 더 이상 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동료들과 협업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누가 민주당원이고 누가 급진당원인지 분류하고, 판사들을 제멋대로 인사이동시키려 합니다. 제가 법무장관으로서 판사들을 가족 단위로 먼 곳에 이동시키라는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국가에도, 사법 체계에도 큰 손해입니다. 판사가 한 지역의 특성과 사람들을 막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 다른 먼 지역으로 전근시키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폐하의 이상과 정책은 이런 장관들과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1931년 9월 2일, 알렉산다르 국왕은 디미트리예 료티치를 작별 면담을 위해 접견했고, 이 자리에서 국왕은 료티치의 헌법안이 “마치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고 말했다. 이에 료티치는 “폐하가 추진하시는 정책이야말로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저는 제 생각을 세상에 알리고, 그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으겠습니다.”라며 응수했다. 한편, 료티치가 자신의 헌법안을 작성하는 동안, 총리 페타르 지브코비치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 정당은 절대적으로 국왕의 손에 집중된 권력을 다시 일정 부분 의회로 되돌려 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실제 권력은 여전히 국왕의 것이었지만, 정당과 정부, 그리고 국왕 사이에 일정한 책임 분담이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새 정당의 명칭은 유고슬라비아 급진 농민 민주당으로, 모든 진정한 유고슬라브인들을 포섭해 그들이 국왕과 그의 권력을 의심 없이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료티치 - 제가 폐하께서 국가 조직에 대한 기본 사상을 채택해 주시지 못한 불운을 겪었으니, 이제 저는 그 사상들을 공개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상에 힘을 실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폐하께서도 그 사상들이 지금처럼 실현 불가능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폐하,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알렉산다르 - 오히려, 저는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부탁드리며, 그 활동에 대해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117.
알렉산다르 - 오히려, 저는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부탁드리며, 그 활동에 대해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
Љотић, Из мога живота, 117.
이후 그는 스메데레보로 돌아가 다시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1931년 이후 그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다른 활동, 즉 협동조합의 조직과 운영이었다. 료티치는 이미 이 시기 이전부터 협동조합 운동의 지지자였지만, 정부에서 물러난 이후 이 일에 훨씬 더 헌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1931년 9월 이후의 시기는 그의 협동조합 정책이 점차 강화되며 농민들 사이에서 점점 더 큰 인기를 얻게 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언론은 료티치를 가장 저명한 협동조합 활동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주 언급했다. 또한 그의 이름은 협동조합 창립자나 회장의 자격으로 여러 차례 등장했다. 장관직을 떠난 후 처음으로 언급된 사례는 베오그라드에서 창립된 제1 미술가 협동조합의 회장으로 선출된 일이었다. 이어 1932년에는 스메데레보 포도 재배자 수출 협동조합이 창립되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창립 총회를 직접 주재했다. 또한 1931년 스메데레보에서 창립된 고도민 수리 협동조합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료티치 자신은 1931년 가을, 보이슬라브 죠르제비치의 제안으로 세르비아 농민 협동조합 본연맹 집행위원회에 들어가 1937년까지 활동했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차례 다양한 협동조합 창립 총회에서 연설하며 농민들의 결속에 기여했다. 당시 언론은 그를 새로운 협동조합 설립 과정의 주도자이자 가장 큰 공로자로 자주 묘사했으며, 이를 통해 바토치나와 라타리에서 곡물 협동조합 창립에 참여한 사실도 알려진다. 스메데레보에서 열린 한 협동조합 총회에서는 그의 연설이 무려 두 시간이나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그는 스메데레보에서 농업 곡물 협동조합 연맹과 농업 구매 협동조합 연맹을 설립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스메데레보 지역의 농업 생산자들의 관심을 어느 정도 끌어낼 수 있었고, 이들은 료티치가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를 진정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정치적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변호사 업무와 협동조합 조직 업무로 바빴지만, 그의 주요 정치적 목표는 여전히 새로운 유고슬라비아의 체제 수립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 정당 체제는, 즉 정치 정당들이 세운 시스템은, 1931년 9월 옥트로이서 헌법 선포 이후 다시 확립된 시스템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지속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는 당대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참고하여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체제의 중심에는 군주가 있어야 했다. 물러난 직후의 짧은 기간은 그의 정치적 활동이 다소 소극적이었던 시기였지만, 곧 료티치는 자신의 이념적 입장에 가까운 인사들과의 접촉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념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은 보수적 성향을 가진 인사들, 신념에 따른 군주주의자, 가능하다면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단호하게 단일 유고슬라비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9월 헌법이 공포된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료티치는 1931년 11월 8일 치러진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선거에서 의도적으로 투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1931년 선거에 참여할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거 출마를 위한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설령 조건을 충족한 후보가 있더라도, 법 자체가 승리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특히 이 선거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의석 배분 방식이었다. 1931년 법에 따르면,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은 전체 의석의 3/5을 차지하고, 나머지 2/5는 다른 정당들에 배분되었다. 이는 가장 큰 정당이 의회에서 단독으로 과반수를 구성할 만큼의 표를 얻지 못했더라도, 승리 자체로 과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실제로는 오직 페타르 지브코비치의 정당만이 선거에 참여했다. 웃긴 점은, 선거에서 야당의 부재는 물론, 실제 투표 수보다 유효 득표 수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불합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페타르 지브코비치의 정당이 100%의 엄청난 득표율로 승리를 선언하며 선거가 마무리되었다.
비록 국왕 알렉산다르는 정당 창당을 금지했지만, 통합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를 기조로 하는 조직들의 설립은 허용했는데 유고슬라비아 행동(Jugoslovenska akcija, JA), 유고슬라비아 참전용사 연합(БОЈ, Borci Organizacija Jugoslavije), 『즈보르(ZBOR)』와 『오타지브나(조국)』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된 료티치 지지 그룹이 대표적이다. 유고슬라비아 행동(JA)은 1930년 1월 7일 베오그라드에서 창설되었다. 초기에 JA는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직적인 프로그램도 없는 비공개 지식인 모임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조직을 비공개 엘리트 집단으로 유지하고자 하려는 이상주의파와 조직이 공식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대중 앞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행동주의파, 2개의 파벌이 있었다. 결국 행동주의 그룹이 우위를 점하며 초대 운영위원회에는 다닐로 불로비치, 벨리보르 요치치, 알렉산다르 슈툴코퍼, 유라이 코레니치, 일리야 코스트렌치치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회합 시 오른팔을 들어 인사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파시스트적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직능제 국가를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집권당인 유고슬라비아 국민당(YNS)과 충돌하게 되었다.
베오그라드에서 료티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과 거의 같은 견해를 가진 그룹이 헤르체고비나에도 있었다. 이 그룹은 이전에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의 일원이었던 라트코 파레자닌을 중심으로 모였으며,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상황 전반을 비판하고 “유고슬라브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다. 헤르체고비나 그룹은 ‘즈보르(ZBOR)’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파레자닌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이름은 운동의 핵심 프로그램, 활동, 목표를 표현하는 구호를 뜻한다. 구체적으로, Z는 ‘조합적(zadružna)’, B는 ‘투쟁적(borbena)’, O는 ‘조직(organizacija)’, R은 ‘노동(rada)’을 의미한다. 그룹은 이 이름을 채택했고, 곧 같은 이름의 신문이 발간되었는데, 편집인은 보골리우브 콘스탄티노비치 박사였다.
세 번째 신문은 베오그라드가 아닌 당시 페트로브그라드, 오늘날의 즈레냐닌에서 발행되었다. 이 주간지는 파레자닌의 ZBOR 그룹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었으며, ‘부제녜(Buđenje)’라는 이름으로 밀로라드 모이치치가 편집을 맡았다.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이 세 신문 모두에 글을 기고했으며, 편집 방침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 신문들이 지지한 사상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유고슬라브 통일주의,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통합적 유고슬라브주의는 파레자닌이나 료티치와 같은 인물들이 조직한 단체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유고슬라브 민족주의 조직인 ORJUNA는 세 신문보다도 더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1921년 설립되어 료티치가 정치에 입문하기 훨씬 전부터 활동했지만, 독재가 도입되면서 해체되었다. ORJUNA의 사상가들은 타협 없는 전투적 유고슬라브주의를 주장했고, 모든 슬라브인의 인종적 동일성을 믿었으며, 사회적 계급 질서를 옹호하고 강력한 반공주의 입장을 지녔다. 이후 결성된 대부분의 유고슬라브 민족주의 단체들은, 료티치의 운동을 포함해, 크고 작은 차이로 ORJUNA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 오타즈비나 그룹을 결성한 이후, 료티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여러 차례 알렉산드르 왕과의 면담을 언급했다. 이 자리에서의 대화는 주로 왕과 료티치 간 정치적 견해를 교환하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면담에서, 료티치는 왕에게 자신이 대규모 정치 활동을 시작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왕이 독재 도입 이후 발생한 정치적 실수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선의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저는 한 그룹의 친구들과만 이념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폐하께서 계시는 동안, 폐하께서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기에, 저는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며, 가능한 한 빨리 수정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유고슬라비아 참전용사 연합(BOJ)은 1933년 12월 슬로베니아에서 다양한 단체들이 통합되어 설립된 조직이다. 주요 지도자는 아우구스트 크라메르, 스타네 비드마르, 블라디미르 파브얀치치였다. 이들 역시 국왕 권력법을 지지하고 직능국가를 지지했으며, 파시스트 조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들을 방해하자, BOJ는 질서 유지 부대(정리대)를 조직해 자력으로 대응한다. JA, BOJ, 그리고 료티치 그룹은 당국의 압박을 받으며 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ZBOR 및 『오타지브나』 신문을 중심으로 료티치가 이끄는 그룹까지 가세하여 세력 통합의 움직임이 본격화된다.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구상으로 『오타지비나(조국)』, 『부제녜(각성)』, 『즈보르』라는 이름의 신문들을 창간하며 이를 실현에 옮겼다. 그 중 『오타지비나』 제1호는 1934년 2월 25일에 출간되었다. 이 신문 주위에는 유명 인사들이 다수 모였는데, 예를 들면 의사 스테반 이바노비치, 박사 체도미르 마르야노비치, 변호사 밀란 아치모비치, 기술자 안드리야 료랴 등이 있다.
왕 암살 직후 처음 열린 회담에서 조직 통합에 대한 합의가 신속히 이루어졌고, 1934년 10월 13일, 새로운 조직 결성은 막 시작되었다. 새 운동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름이었다. 네 개의 조직인 오타즈비나, ZBOR, 전사 단체, 유고슬라비아 행동은 각기 다른 이름을 원했다. 전사 단체와 파레자닌의 ZBOR는 ‘ZBOR’라는 이름을 선호했고, 유고슬라비아 행동은 ‘유고슬라비아 국민 운동(Jugoslovenski narodni pokret)’을 원했다. 오타즈비나는 논쟁에서 중립을 지켰으며, 결국 새 조직의 이름은 타협안으로 ‘유고슬라비아 국민 운동 - ZBOR’로 결정되었다.ZBOR는 1935년 1월 6일 베오그라드에서 설립되었으며, 이는 1월 6일 독재 선포 6주년 기념일이었다. 운동의 회장으로는 디미트리예 료티치가 선출되었고, 부회장은 자그레브 출신 의사 유라이 코레니치, 총비서에는 베오그라드 출신 교수 벨리보르 요니치가 임명되었다. 새 ZBOR의 상징은 낫과 검이 있는 방패로, 용맹과 농민적 뿌리를 상징했다. 새 운동의 국가 행진곡으로는 이전 유고슬라비아 행동의 행진곡 군대의 교대가 선택되었다. 각 단체의 신문도 통합시켰다.
류블랴나에서 유고슬라비아 국민운동 즈보르가 공식 창립된 것과 동시에, 국회의원 선거가 1935년 5월 5일로 공표되었다. 즈보르 지도부는 국민들이 당시 국가 상황에 깊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판단 아래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즈보르 내부에서는 좋은 선거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즈보르 행동위원회(Акциони одбор)가 구성되어 선거운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는 디미트리예 료티치의 인물적 권위,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와의 연관성, 그리고 페타르 지브코비치 내각에서 보여준 정치적 청렴성을 중심으로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즈보르는 선거 후보 등록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 이유는 선거법이 여당인 유고슬라비아 국민당을 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거법에 따르면, 정당의 후보 명단은 최소 30명의 제안자를 확보해야 하며, 그 제안자들은 반드시 행정구역 절반 이상, 그리고 9개 바노비나 중 최소 6개 바노비나에서 나와야 했다. 또한 전국 명부(지명후보)는 각 선거구마다 선출될 의원 수만큼 후보자를 내야 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5만 표 이상을 획득해야만 1석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앞에서 언급했듯 최다 득표 정당은 전체 의석의 3/5을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즈보르는 창립 초기여서 조직력 부족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본격적으로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4월 초, 그는 라트코 파레자닌과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를 돌며 유세를 벌였다. 이 지역은 즈보르가 가장 취약한 곳이었고, 특히 몬테네그로에서는 지지 기반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시간이 촉박했던 상황에서 선거 운동은 이 지역들에 집중되었으며, 스메데레보, 구나, 드라바, 방노비나 같은 지역에서는 이미 3만 표 이상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해 별도의 유세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매우 어두웠다. 불과 1년 전 우스타샤에 의해 국왕이 암살되었고,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으며, 국가 체제 개편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왕 알렉산다르의 전제 체제가 도입되기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혼란이었다. 여당에게 가장 큰 위협은 통합 야당이었는데, 이는 민족 협정 블록의 국가 차원의 야당 명부였다. 이들은 특히 블라트코 마체크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농민당을 중심으로 연방제 개편을 요구했다. 이 구상은 지방 자치권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사실상 단일 유고슬라비아 체제의 종식을 의미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료티치와 즈보르는 통합 야당과 협력할 수 없었으며, 물론 여당 명부를 이끄는 보골리우브 예프티치와도 함께할 수 없었다. 다만 료티치는 개인적으로 예프티치를 친구로 여겼다.
1935년 4월 19일, 디미트리예 료티치가 대표로 있는 전국 명부가 베오그라드 대법원에 공식 제출되었다. 이 명부는 9개 바노비나의 234개 군구에서 후보자와 예비후보를 등록했으며, 총 8,190명의 제안자 서명을 확보하였다. 다른 군구에도 후보자들이 일부 등록되었다. 이 명부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는 자그레브의 의사 유라이 코레니치 박사와 류블랴나 산업계 인사 아우구스트 크라메르가 참여하였으며, 그들의 예비위원으로는 베오그라드의 위생연구소장 스테반 이바니치 박사와 농업금융조합연합 이사장 안툰 노바코비치 박사가 포함되었다. 1935년 4월 21일, 대법원은 디미트리예 료티치의 전국 명부를 최종 승인하였다. 하지만 여당 명부의 대표인 보쉬코 예브티치는 료티치의 전우이자 대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권은 즉시 즈보르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즈보르의 선거 유세는 정부 측 인사들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즈보르에 가해진 정치적 압박은 심지어 야당연합보다 더 강했다.
즈보르 행동위원회와 야당연합은 모두 부정선거를 주장했다. 즈보르는 실제로 35,000표를 더 얻었으며, 총 약 6만 표를 획득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표가 도난당하거나,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방해받았다고 했다. 특히 베오그라드에서는 불법 행위가 빈번히 발생했다고 기록되었다. 야당연합도 부정을 주장하며 당선된 국회의 활동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 선거 결과는, 디미트리예 료티치의 즈보르가 전국적으로는 아직 미약한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두나프스카 바노비나(특히 스메데레보 지역)와 드라브스카 바노비나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지를 얻었고, 이는 해당 지역에 BOJ(보랴츠카 조직, 참전용사 조직)의 뿌리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징후이기도 했다. 그 외 바노비나에서는 즈보르의 지역 조직조차 없었기에, 더 나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료티치의 지방 유세와 연설은 의회 진출로 이어지지 못했다. 즈보르는 이 선거에서 참패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즈보르는 25,709표, 전체의 0.89%를 얻었는데, 이는 료티치가 의원으로 당선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체적으로는 2,881,915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이는 73.6%의 투표율이었다. 여당인 보골리우브 예프티치의 명부는 1,748,024표(60.65%)를 얻어 압승을 거두었다. 통합 야당은 1,075,389표(37.32%)를 확보해 제1야당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즈보르의 명부는 25,709표, 보지다르 막시모비치의 구 급진파 명부는 32,797표(1.14%)를 얻는 데 그쳤다. 디미트리예 료티치의 국회 입성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국민의회 의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 5만 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35년 5월 5일 선거에서 보골류브 예브티치가 승리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총리직에 머물지 못했다. 전에 언급한 선거 부정 문제 때문에 야당 대표들이 자신의 의석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이 의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곧 드러났다. 결국 이른바 5월 5일 의회에는 보골류브 예프티치 명부에서 나온 인물들만 참석하게 되었으며, 정확히 말하면 여당의 의원 303명만이 남았다. 이렇게 불완전한 5월 5일 의회도 오래가지 않아 두 파벌로 분열되었다. 비록 의원들은 모두 예프티치가 이끄는 명부에서 나왔고, 처음 며칠 동안 의회에서는 예프티치를 칭송하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1935년 6월 19일 의장단이 선출되자마자 예프티치의 사퇴가 요구되었다. 결국 예프티치를 지지한 의원은 95명만 남게 되었고, 새 지도자로 밀란 스토야디노비치가 선출되어 6월 24일 새 정부를 구성했다. 이 사임은 디미트리예 료티치의 즈보르에게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며, 즈보르의 기관지 오타지비나(Otačbina)에서도 이를 언급하며 사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스토야디노비치와 디미트리예 료티치 사이에는 심한 반감이 있었고, 그 긴장은 1937년 7월 23일, 스토야디노비치가 국회에서 콩코르다트[3] 비준안을 통과시켰을 때 극에 달했다. 이 바티칸과의 조약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바티칸에 국가 권력보다 우선하는 권리를 인정한다는 이유로 유고슬라비아 사회 전반에서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정통 세르비아 정교 신자로서, 통합 유고슬라비아주의자로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갖는 것에 반대했으며, 이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입장과도 일치했다. 그러나 이는 즈보르가 정교회의 정치적 대리인이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즈보르 내에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도 다수 있었고, 이들 또한 콩코르다트가 크로아티아 국민을 성직자 중심 사회로 몰아가며,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내 이익에 반한다고 보았다.
정부에게 콩코르다트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이는 크로아티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일환이었으며, 스토야디노비치 자신도 콩코르다트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언급했다. 그는 콩코르다트를 거부하면 크로아티아 내, 즉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서 분리주의적 경향을 촉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콩코르다트를 둘러싼 공공의 반대는 베오그라드를 중심으로 폭발했다. 스토야디노비치 정부가 국회에서 비준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여러 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세르비아 정교회 수뇌부도 강하게 반발했으며, 당시 총대주교 바르나바는 정교회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는 콩코르다트 위기 한가운데서 병에 걸렸고, 그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독살되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1937년 7월 19일, 정교회는 바르나바의 쾌유를 위한 기도행렬을 개최했다. 이 행렬은 정교회 주교들이 이끌고 베오그라드 시내 중심부로 향했으며, 수천 명의 시민들이 합류했다. 즈보르 당원들도 신자와 정교회 신도로서 이 행렬에 참여했다. 그러나 카톨릭 풀신의 내무장관인 안툰 코로샤츠의 명령으로 헌병대가 행렬을 성당으로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헌병대는 신자들과 충돌, 주민들과 주교들을 폭행했으며, 특히 샤바츠 교구의 시메온 스탄코비치 주교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성당 깃발, 성물, 주교관 등이 훼손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총대주교 바르나바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정교회와 가까운 세력 내부에서는 당시 총대주교 바르나바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니콜라이 벨리미로비치 주교가 베오그라드에서 병든 총대주교를 위한 기도 행진을 조직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국내 상황에 대한 항의 성격도 띠었다. 이 행진은 사실상 스토야디노비치 정부에 대한 저항이었고, 곧 시위는 폭력적으로 변하여, 헌병과 정교회 관계자 및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경찰이 성직자들을 향해 돌진하고, 성직자들이 십자가를 무기로 사용하며 권력의 탄압에 맞선 사건은 ‘피의 행렬(krvava litija)’로 기억되었다. 피의 행진 소식이 전해지자,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스메데레보의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연설을 하며 성직자와 시민에 대한 폭력을 강력히 규탄하고, 국회의원들에게 콩코르다트 비준 거부를 촉구했다. 그러나 대중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콩코르다트 비준안을 통과시켜 상원에 넘겼다. 1938년 초, 정부가 콩코르다트를 상원에서 최종 비준하려 하자, 다시 한 번 대중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스토야디노비치는 1938년 1월 21일,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회의에 해당 법안이 최종적으로 의제에서 철회되었다고 통보했다. 이 사건은 디미트리예 료티치와 밀란 스토야디노비치 간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으며, 이는 결국 료티치의 체포로 이어졌다.
1935년 6월 24일, 밀란 스토야디노비치가 유고슬라비아 왕국 정부의 수반이 되자,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정치 및 외교 노선이 추축국에 뚜렷하게 가까워졌음을 의미했다. 그는 집권 초기에 크로아티아 문제 해결과 경제 위기 타개를 약속했지만, 우파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즈보르의 디미트리예 료티치와는 모든 주요 정치 사안에서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다. 실제로 집권 첫날부터, 스토야디노비치는 정치 기구 전체를 동원하여 즈보르와 그 당원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료티치는 후일, 자신의 소책자 「파시스트 견습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밀란 스토야디노비치에게)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37년 초, 베오그라드의 주요 일간지들(「브레메」, 「폴리티카」, 「프라브다」)의 지면을 가득 채운 사건이 바로 ‘테크니카 우니야(Техничка унија, Technika Unija) 사건’이었다. 이 스캔들의 중심에는 디미트리예 류티치와 그의 정치 조직 즈보르가 있었으며, 독일이 ‘테크니카 유니아’라는 회사를 통해 류티치와 즈보르를 비밀리에 재정 지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였고, 나치즘은 점점 더 여러 유럽 극우 단체들의 본보기로 여겨지고 있었다. 많은 민족주의 운동은 나치즘과 이탈리아 파시즘을 부패하고 매수된 민주주의자들로 인해 약화된 국가를 다시 강하게 만들 정치적 모범으로 보았다.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같은 인접국들에도 히틀러와 유사한 사상을 공유하는 운동이 있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다수의 유고슬라비아 정치인들도 히틀러 독일에 최대한 접근하려 했는데, 정치적, 경제적으로 올바른 길에 들어선 듯 보였기 때문이다.
류티치의 즈보르 역시 독일에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류티치는 여러 차례 즈보르가 파시스트적이거나 히틀러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부정하려 했지만, 두 운동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는 「파시즘도, 히틀러주의도 아니다!」라는 글에서 두 운동이 동일시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일부 겉보기에 비슷한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동일시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류티치는 히틀러와 그 정당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다. 실제로 그는 1935년 선거 이후 스위스로 건너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대표자들과 접촉했으며, 즈보르의 일원들은 뉘른베르크 집회에도 참석해 더 밀접한 협력을 도모하려 했다. 이러한 즈보르와 나치당 간의 긴밀한 관계가 바로 ‘테크니카 유니아 사건’이 터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은 1937년 1월 30일, 국민의회 재정위원회 회의에서 농민당의 의원 지보타 밀라노비치의 연설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즈보르가 외국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증거로는 어떤 감사 보고서를 제시했다. 그 보고서에는 즈보르의 장부에 “한 외국 국가의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5천~1만 마르크가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신문 「폴리티카」는 곧장 밀라노비치의 발언을 보도했고, 그렇게 해서 사건은 본격적으로 전국적 논란으로 번져 나갔다.
“즈보르는 사실상 활동을 못 하고 있다. 6월과 7월에 신고된 212건의 즈보르 집회 중, 허가받은 것은 단 두 건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금지되었다. 우리의 신문은 도적처럼 몰래 인쇄되어야만 발행된다. 스토야디노비치가 우리 활동을 완전히 금지하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더라도 이제 놀랍지 않을 것이다.”
스토야디노비치는 실제로 즈보르 활동을 금지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즈보르는 쓸모없다. 당신들이 모든 법적 요건을 충족시키고, 그 이상을 갖춘다 해도, 활동은 허가받지 못할 것이다. 즈보르는 반드시 금지된다! 다른 이들은 활동할 수 있다. 연합 야당? 그들은 나이든 신사들이라 놔두고 자유롭게 활동하게 두며, 내 언론사들에겐 그들의 집회도 보도하라 명한다. 그러다 대중의 관심이 올라가면, 내가 바늘로 한 방 찌르기만 해도 그들의 활동은 벌룬 터지듯 수그러들 것이다. 하지만 즈보르는 안 된다. 왜냐하면 즈보르가 원하는 것, 나도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즈보르는 설 자리가 없다. 올가을엔 내가 청년들을 제복 입히고 군사 훈련을 시킬 것이며, 이후 선거에 나설 것이다.”
이에 대해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스토야디노비치가 즈보르의 이념을 실현할 수 없으며, 그럴 의지도 없다고 반박했다. 스토야디노비치는 파시즘과 나치즘을 흉내 내려 했지만, 료티치는 그러한 체제들이 위에서 명령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아래 민중 속에서부터 성장해 올라온 것임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1937년 5월, 스토야디노비치가 로마와 베를린을 방문하여 무솔리니와 히틀러 체제를 배우겠다고 나서자, 료티치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우리의 사상도 파시즘이 아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 사실을 우리는 말했고 증명했다. 스토야디노비치가 로마에 가서 파시즘을 베끼든, 베를린에 가서 히틀러주의를 따라 하든, 그는 우리의 사상이 아닌 남의 사상을 택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정권 언론은 료티치를 연설 중 히틀러처럼 행동하는 자로 조롱하며, 정치 유니폼에 ‘LJ’라는 표지와 벨트만 차면 히틀러와 똑같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료티치는 스토야디노비치를 '국민 없는 정부의 수장'이라고 규정하며, 그가 알렉산다르 국왕 암살 음모에도 연루되었다고 공개 비난했다. 즈보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으며, 료티치 본인도 투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즈보르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1938년 2월, 박해가 한창일 때 료티치는 스토야디노비치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며 비판했다.
“오, 밀란 스토야디노비치여, 너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네가 가진 모든 권력과 수단으로도 우리는 우리 길, 즈보르의 길을 막을 수 없다. 우리 집회와 신문을 금지했지만, 우리는 그것에 감사한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욱 강하게 벼리게 하였기 때문이다. 강철 칼날은 거센 불과 단단한 장애물을 통해서만 단련된다. 너는 우리에게 활동 금지를 명하고 즈보르 해산을 명했다. 하지만 누가 저 자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멈출 수 있는가? 즈보르의 사상은 스스로 생겨났고, 네 눈 앞에서 성장하여 모든 곳, 특히 청년들 사이에 뿌리를 내렸다. 그 누구도 청춘의 폭풍을 막을 수 없다.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옛 정당들도 네가 해산시키지 못했는데, 과연 너는 즈보르를 해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1938년 10월 10일, 국회가 해산되었고, 새로운 총선이 같은 해 12월 11일로 예정되었다. 이 선거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스토야디노비치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와 그의 반대자들, 특히 즈보르가 주장한 정책 비판이 얼마나 국민적 공감을 얻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회였다. 이로써 즈보르와 스토야디노비치 정권 간의 갈등은 정점으로 치달았고, 향후 즈보르의 정치적 기반 확장 혹은 억압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선거 결과에 달려 있었다.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자신의 선거운동을 밀란 스토야디노비치에 대한 비판에 집중시켰다. 한 선거 전단에서는 스토야디노비치를 콘코르다트 체결, 바르나바 총대주교 사망, 소앙탄트(작은 협상국) 붕괴, 알렉산다르 왕 암살의 책임자로 지목했다.
“나는 독자적으로 출마한다. 왜냐하면 오직 나만이 다음을 실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1. 농민 200명 이상과 직능별 노동자·장인 70명을 국회에 들여보내 국민대표로 만들겠다.
2. 이들 국민의 어깨 위에 세워진 국가를 위해 빈민과 대중을 위한 최고의 법을 제정하겠다.
3. 세금 부담을 공정히 재조정하겠다. 불공정한 세제로 인해 우리 아들들의 재산과 목숨이 너무 많이 희생당했다.
4. 모든 농민과 노동자에게 생계 수단을 보장하겠다. 지금까지처럼 세금과 부과금 때문에 굶어죽게 두지 않겠다.
5. 부의 축적에 상한선을 두겠다. 자본은 국내 산업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만 허용하겠다.
6. 외부 자본을 국내 자본으로 전환하겠다.
7. 국내로 민족 자본을 되돌려오겠다.
8. 518명에 이르는 전직 장관들의 연금을 폐지하겠다.
9. 국민과 국가 재산에 해를 끼친 자는 누구든 재판에 넘겨 처벌하겠다.
10. 이 나라에 마침내 정의와 정직이 통치하게 하겠다.
정직한 사람, 훌륭한 국왕, 그리고 통합된 유고슬라비아를 바라는 사람은 우리 운동에 동참하라!”
료티치의 선거전단
1. 농민 200명 이상과 직능별 노동자·장인 70명을 국회에 들여보내 국민대표로 만들겠다.
2. 이들 국민의 어깨 위에 세워진 국가를 위해 빈민과 대중을 위한 최고의 법을 제정하겠다.
3. 세금 부담을 공정히 재조정하겠다. 불공정한 세제로 인해 우리 아들들의 재산과 목숨이 너무 많이 희생당했다.
4. 모든 농민과 노동자에게 생계 수단을 보장하겠다. 지금까지처럼 세금과 부과금 때문에 굶어죽게 두지 않겠다.
5. 부의 축적에 상한선을 두겠다. 자본은 국내 산업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만 허용하겠다.
6. 외부 자본을 국내 자본으로 전환하겠다.
7. 국내로 민족 자본을 되돌려오겠다.
8. 518명에 이르는 전직 장관들의 연금을 폐지하겠다.
9. 국민과 국가 재산에 해를 끼친 자는 누구든 재판에 넘겨 처벌하겠다.
10. 이 나라에 마침내 정의와 정직이 통치하게 하겠다.
정직한 사람, 훌륭한 국왕, 그리고 통합된 유고슬라비아를 바라는 사람은 우리 운동에 동참하라!”
료티치의 선거전단
선거 이후 연합 야당과 즈보르 모두 선거 과정과 결과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비록 스토야디노비치가 형식적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예상보다 저조한 지지율로 인해 1939년 2월 4일 실각했고, 새 정부는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가 구성했다. 츠베트코비치 내각은 크로아티아 문제 해결과 유고슬라비아의 외교 정책 노선 명확화를 우선시하겠다고 밝혔으나 료티치는 이 두 가지 방향에 대해서도 전 정권과 마찬가지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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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의 디미트리예 료티치 |
1939년 8월 26일,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와 블라트코 마체크 간의 협정을 통해 이른바 '크로아티아-세르비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사브스카, 프리모르스카 지방 전체와 제츠카, 브르바스카, 드린스카, 두나브스카 지방의 일부를 포함하는 크로아티아 지방정부가 신설되었다. 초대 바노비나 총독은 이반 슈바시치가 임명되었으며, 그 대가로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인사들이 유고슬라비아 왕국 정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블라트코 마체크는 부총리직에 올랐다. 8월 28일, 즈보르는 이 협정에 대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협정으로도 마체크 씨는 유고슬라비아를 자신의 조국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고슬라비아가 운명적으로 중요한 국가라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가 인정한 최대치는 단지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베니아인의 독립과 발전을 위한 최선의 보증자’라는 표현뿐이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진실은, 유고슬라비아가 ‘최선의 수단’이 아니라, ‘유일한 구원’이라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 없이는 크로아트와 슬로베니아인은 완전히, 세르브인은 부분적으로 독립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마체크 씨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크로아티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런 조건에서 체결된 협정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우리가 말하지 않겠다. 그것은 내일이 말해줄 것이다.”
8월 26일 협정의 해악을 정부에 설득하지 못하자,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섭정인 파블레 왕자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는 위기의 심각성을 전달하기 위해 파블레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세 차례 거절당했다. 이후 1940년 중 세 차례에 걸쳐 공개서한을 발송했으며, 이는 당시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편지 내용에는 파블레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었고, 이는 즈보르의 향후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공개서한은 1940년 2월 22일 발송되었으며, 료티치는 왕실이 영국과 프랑스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했다. 그는 이들 국가가 폴란드, 핀란드, 1915년의 세르비아조차 보호하지 않았으며, 세르비아를 구하는 데는 단 세 개의 사단만 필요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왕정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수호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원인을 8월 26일 협정에서 찾았다. 료티치는 또한 군부대는 세르브인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크로아트 및 슬로베니아인으로만 구성, 나머지 민족은 노동 부대에만 포함시키고 협정 실험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파블레가 다시 면담을 거절하자, 료티치는 그를 향한 정치적 공세를 강화했다. 그는 파블레가 연방주의에 굴복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폐하, 당신은 이오시프 스탈린보다 더 유고슬라비아의 볼셰비즘화에 기여하셨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러시아에 열광하고 있으며, 국가가 이를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료티치는 파블레에게 볼셰비즘화와 국가 해체의 흐름 차단, 크로아트 실험 즉각 중지, 군대 재편을 요구했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자,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철저한 중립 노선을 주장했다. 이 입장은 군부 내 동조자였던 밀란 네디치 장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네디치는 11월 1일, 정부에 유고 왕립 육군의 실태 보고서를 제출하고, 철저한 중립정책 채택을 요청했다. 그러나 파블레 왕자는 즉각 반응했고, 11월 8일, 네디치는 장관직에서 해임되고 감시 대상이 되었다. 곧이어 정부는 1940년 10월 24일, 즈보르의 활동 자체를 금지시켰다. 1935년 11월 8일에 승인되었던 즈보르 창립 허가는 철회되었다. 이 모든 조치는 1940년 10월 23일, 베오그라드 공과대학교에서 벌어진 즈보르 학생들과 공산주의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을 구실로 진행되었다. 1940년 10월 24일, 총리이자 내무장관 대행인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의 결정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민족운동 즈보르의 존재 자체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공격이 정부로부터 처벌받는 이유가 될 수 없는 시대였기에, 이는 이념적, 정치적 목적의 결정이었다.
당시 유럽은 이미 전운이 감도는 상황이었다. 1940년 11월 5일, 이탈리아 공군이 마케도니아 지역의 비톨리를 폭격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전쟁의 문턱에 서게 되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친영(親英) 성향을 가진 정치인인 미하일로 콘스탄티노비치, 브란코 추브릴로비치, 스르잔 부디사블례비치 등은 역시 친영 노선을 견지하던 섭정 파블레 왕자에게 압력을 가하여, 독일과 가까운 성향의 단체였던 즈보르를 제거하도록 요구하였다. 실제로 즈보르 금지 결정 이전부터 정부는 즈보르의 지방조직 설립 문서의 서명 진위를 조사하는 등 이미 사전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1940년 11월 3일 베오그라드 시청은 즈보르 본부에 들이닥쳐 구성원들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별다른 서면 통보도 없이 건물을 봉인한 뒤 헌병을 배치하였다.
10월과 11월 사이 즈보르 회원 16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청년 조직의 지도자 라트코 지바노비치, ‘백색 독수리단’의 핵심 인물 시메온 케레츠키와 블라디미르 레나츠, 베오그라드 지부장 벨리미르 다닐로비치 등이 구금되었다. 그러나 정작 즈보르의 지도자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체포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모든 동선을 감시했고, 방문조차 금지당했으며 그의 집은 정보요원들이 상주하면서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료티치가 "내가 체포된 것이냐, 아니냐"고 항의하자, 정부는 "당신은 자유인이나, 상부의 명령상 감시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이에 류티치는 자신의 집을 떠나 고향인 스메데레보로 피신했으나, 거기서도 감시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11월 15일 이전에 감시망을 뚫고 사라졌다. 정보요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갑작스럽게 사라져 행방불명"되었고, 이후 베오그라드 시청은 전 유고슬라비아에 무전통신문을 보내 그를 긴급 수색하라고 지시하였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료티치는 스렘 지방의 한 여성 수도원에 은신하고 있었으며, 축구선수 출신의 즈보르 지지자가 정보요원들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도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정부가 자신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켜 정치적으로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도피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즈보르 회원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폭행과 고문을 당했고, 이후 일부는 추방되거나 브루스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으며, 나중에는 스레브레니차, 이바니차, 스메데레브스카 팔랑카의 이른바 노동부대 수용소로 분산되었다. 마지막 즈보르 회원이 석방된 것은 1941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금지조치 이후에도 즈보르의 내부 회보는 여전히 인쇄되었고, 심지어 섭정 파블레 왕자와 각료들, 베오그라드 시청에까지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1940년 12월 25일, 즈보르에 대한 탄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파블레 왕자에게 세 번째 공개서한을 보냈지만 이 역시 아무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즈보르에 대한 탄압은 그로부터 석 달 뒤, 1941년 3월 27일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까지 계속되었다.
1941년 3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총리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의 주도로 비엔나에서 추축국 삼국 동맹에 가입하였다. 이는 이미 3월 23일, 왕실 협의회가 그에게 정식 권한을 부여한 데 따른 조치였다. 즈보르의 지도자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이 결정을 두고 뼈아픈 비유를 사용하며 비판하였다. 그는 "정부가 유고를 내리막길로 몰아넣었고, 그 끝에는 절벽이 있었다. 삼국 동맹은 그 벼랑 끝에 겨우 자라난 나무였고, 왕자 파블레는 결국 그 나무를 붙잡았다. 그러나 모두가 그 나무에 매달린 채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며, 이 나무를 자르려는 세력들이 등장하면 왕자도, 우리도 모두 함께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다음 날인 3월 26일, 료티치는 즈치카 주교 니콜라이 벨리미로비치와 달마티아 주교 이리네이 조르제비치에게 서신을 보내 삼국 동맹 반대 활동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이미 동맹이 체결된 상황에서 "강력하고 국민의 신뢰를 이끌 수 있는 권위 있는 정부"가 시급하다고 보았으며, 만약 반대 활동을 계속한다면 이는 국가를 파멸로 이끄는 책임을 그들 자신이 져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 호소가 그들의 손에 전달되었을 무렵, 베오그라드 근처 제문의 공군사령부에서는 쿠데타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3월 27일 새벽, 친영파 장교들과 정치인들의 주도로 쿠데타가 단행되었고, 파블레 왕자와 츠베트코비치 내각은 실각했다. 그 자리는 미성년의 페타르 2세 카라조르제비치가 계승하였다. 이 쿠데타에는 영국 특수작전부(SOE)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으며, 이는 반독일, 친영 세력의 권력 탈환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처음에 료티치는 이 쿠데타가 단순히 파블레 왕자에 대한 반발이라고 생각하여 그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즈보르를 대표하여 퇴역 대령 밀로슈 마살로비치는 새 정부에 축하 인사를 전했고, 그는 즉시 국왕 친위대 보병연대장으로 재임명되었다. 또한 주교 니콜라이 벨리미로비치의 조언을 받아 료티치는 한때 새 내각에 참여할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도 했다. 심지어 육군 총사령관 두샨 시모비치 장군도 료티치에게 직접 입각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 정부가 급격히 친영 노선을 드러내자 료티치는 즉시 입장을 철회하고 내각 참여를 거부하였다. 그의 입각을 막은 또 다른 요인은 브란코 추브릴로비치와 미하일로 콘스탄티노비치 같은 강성 친영파 정치인들이 료티치의 참여에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즈보르의 내부에서는 3월 27일 쿠데타에 대한 평가가 갈렸다. 즈보르 활동가 스탄리슬라브 크라코프는 쿠데타를 "불필요하고, 파멸적이며, 심지어 범죄적인 행위"라 규정하였다. 또 다른 즈보르계 지식인이자 정치 이론가였던 디미트리예 나이단노비치는 이 날짜를 "유고슬라비아 역사상 가장 기이한 날"이라 평하며, "그것은 정치적 어리석음의 결정체였고, 근시안과 비전의 부재를 보여주는 날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3월 27일 쿠데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서 외교 노선을 완전히 바꾸었으며, 유고슬라비아가 독일의 공격을 받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이 날짜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최후를 결정짓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남게 되었다.
2.3. 독일과의 협력과 사망
1941년 4월의 패배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사실상 그 존재 기반을 상실했다. 국회는 해산되었고, 군대는 항복했으며, 주로 공군에 해당하는 일부 부대만이 가까스로 연합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국왕 페타르 2세와 정부 역시 나라를 떠났다. 5월이 되어서야 유고슬라비아 국내에서는 드라골류브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조국 내 유고슬라비아 군이라는 저항의 핵이 형성되었고, 미하일로비치는 국왕으로부터 유일하게 합법성을 인정받은 내정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행정 기구, 특히 관료 체계와 헌병대로 구성된 경찰 조직은 대부분 자리를 유지하며 현상 유지를 꾀했다.점령된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 이전의 경계를 기준으로 하되, 광물 자원이 풍부한 코소보-미트로비차 지역과 곡창지대인 바나트를 포함하는 형태로 조정되었다. 이 지역은 독일군 사령부의 직접 통치 하에 놓였고, 히틀러는 헬무트 페르스터 항공대장을 세르비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페르스터의 지휘부는 군사 및 행정 양 부문으로 나뉘었는데, 군사 부문은 치안과 질서를 담당하고, 행정 부문은 점령지 관리를 담당하였다. 행정 책임자는 히틀러의 신임을 받던 하랄트 투르너 장군이었다. 투르너는 모든 정당, 그중에서도 JNP 즈보르의 활동을 전면 금지하였다. 전쟁 발발 당시 즈보르 지도자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자신에게 부여된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비옐리나에 배치되었으며, 즈보르 전 구성원에게도 군복무에 임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즈보르의 총서기에게는 신규 회원 등록부를 폐쇄하라고 명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료티치는 자신의 고향인 스메데레보의 영지로 돌아갔다.
한편, 투르너는 민간 행정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전직 유고슬라비아 관료 및 정치인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는 밀란 아치모비치와 베오그라드 경찰국장 출신 드라기 요바노비치와 가장 먼저 접촉했고, 그들과 함께 세르비아 내 자치 민간 행정 기구 수립을 논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베오그라드에서 다른 세르비아 정치인들과 회동하였고, 즈보르 지도자 료티치와의 협력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아치모비치가 직접 스메데레보로 료티치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고, 료티치는 이에 응하여 베오그라드로 향했다. 그는 협상 과정에서 밀란 아치모비치와 함께 세르비아 측 대표로서 독일군과 교섭하였으며, 그 결과 모든 정치 세력을 포괄하는 '코메사르스카 우프라바(위원행정청)'를 구성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1. 국제법 조항의 준수,
2. 유고슬라비아의 민·형법 및 사법체계 유지,
3. 세르비아 정교회의 조직 및 활동 보장,
4. 자국 재정에 대한 관리권 보장 및 피난민, 전쟁 포로 가족에 대한 지원 가능성 확보,
5. 위원행정청 구성원은 각 부처의 ‘코메사르’(위원)로 호칭하고 국민의 대표로 기능,
6. 예배 중에도 국왕 페타르 2세 및 총대주교 가브리엘의 이름을 기도문에 포함,
7. 민가 내 국왕 사진 보관 허용,
8. 법원이 여전히 ‘페타르 2세의 이름으로’ 판결을 선고할 수 있도록 허용.
세르비아측이 독일측에 보낸 선언문
2. 유고슬라비아의 민·형법 및 사법체계 유지,
3. 세르비아 정교회의 조직 및 활동 보장,
4. 자국 재정에 대한 관리권 보장 및 피난민, 전쟁 포로 가족에 대한 지원 가능성 확보,
5. 위원행정청 구성원은 각 부처의 ‘코메사르’(위원)로 호칭하고 국민의 대표로 기능,
6. 예배 중에도 국왕 페타르 2세 및 총대주교 가브리엘의 이름을 기도문에 포함,
7. 민가 내 국왕 사진 보관 허용,
8. 법원이 여전히 ‘페타르 2세의 이름으로’ 판결을 선고할 수 있도록 허용.
세르비아측이 독일측에 보낸 선언문
투르너는 4월 29일의 회담에서 제8항, 즉 국왕의 이름으로 판결 선고를 하는 부분만을 제외한 나머지 조건을 수용하였다. 이날 회의에는 정당 대표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투르너는 료티치에게 직접 행정부 참여를 요청하였다. 특히 농업·경제 관련 부처 수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며, "세르비아 민중에게 빵을 제공할 인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료티치는 "빵만으로는 민족의 운명을 구할 수 없다. 유고는 과거에도 빵은 충분했지만 망했다"고 일축하며 거절했다. 그는 자신이 외부에 남아 공공의 정당성을 지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즈보르 측에서 두 명의 대표를 행정청에 파견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들은 기술자 밀로사브 바실리예비치와 박사 스테반 이바니치였다. 그리하여 1941년 4월 30일, 독일 점령 하의 세르비아에서 첫 번째 코메사르스카 우프라바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코메사르스카 우프라바(위원행정청)가 가동되기 시작하자, 료티치는 독일 군정에 두 통의 공식 서한을 제출했다. 첫 번째 서한에서 그는 우스타샤, 불가리아, 헝가리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 중인 수천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석방하고, 세르비아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과 박해를 중단해 줄 것을 촉구했다. 같은 요청은 위원행정청 차원에서도 문서, 사진 등 증거자료를 첨부한 별도의 보고서 형태로 독일 측에 전달되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료티치는 또한 베오그라드의 가톨릭 주교 우이치치에게도 별도의 서한을 보내 가톨릭 교회의 세르비아인 개종 활동을 중단하고 무고한 민중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가톨릭 측은 문서를 충분히 검토한 뒤 대응하겠다는 형식적인 답변만을 내놓았다. 두 번째 서한에서 료티치는 세르비아군 장병들이 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대신, 그리스 사례처럼 귀가 조치되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우스타샤의 잔학 행위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나 이를 막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회신하며, 실질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1년 6월 5일, 료티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스메데레보 요새에 있던 탄약고가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도시의 재건을 위해 위원행정청은 료티치를 ‘스메데레보 재건 특별코메사르’로 임명했고, 그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여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부관으로는 즈보르 회원 안드리야 류올랴가 임명되었다. 료티치는 즈보르 하부 조직을 동원해 자재 확보와 자원 봉사자 모집에 나섰고, 독일군 총사령관 루트비히 폰 슈뢰더는 6월 17일에 료티치에게 100만 디나르를 재건 자금으로 지원했다. 료티치는 즈보르 청년단과 애국자들에게 스스로 자원 노동에 참여하라 호소했고, 약 350명의 청년들이 집결해 ‘노동 분견대’로 구성되었다. 이들을 수용한 캠프의 지휘관은 즈보르 청년단장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나츠였다. 이 분견대는 후일 자원 전투부대 조직의 핵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위원행정청은 출범 초기부터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슈뢰더는 위원행정청에게 유대인 탄압법 제정을 요구했으며, 이미 게슈타포는 베오그라드 및 세르비아 전역에서 유대인 체포를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에 위원행정청은 해당 요구를 거부하였고, 결국 점령 기간 동안 세르비아에는 별도의 반유대법이 제정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하게, 위원행정청은 바나트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에게 판체보 사탕수수 농지를 매각하라는 요구도 거절하였다.
료티치는 직접 개입해 판체보 감옥에 수감돼 있던 1,200명의 세르비아인, 주로 민족주의자들을 석방시켰고, 이들 가운데에는 스메데레보 시장 라이코비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원행정청의 행정력은 주로 도시나 큰 마을의 관리, 경찰, 마을 경비단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광범위한 농촌 지역에서는 이미 5~6월부터 무장 저항 세력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무장 세력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분화되었다.
첫 번째는 드라골류브 미하일로비치가 라브나 고라에서 조직한 저항군으로, 그는 4월 항복 당시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고 보스니아에서 탈출해 라브나 고라에 정착했다. 그는 5월 13일을 무장 투쟁의 개시일로 삼았다. 두 번째는 장군 류바 노바코비치가 이끄는 부쿨랴 산지의 무장 조직, 세 번째는 보이보다 코스타 페찬차가 주도하는 체트니크 운동이었다. 그러던 중 7월이 되자, 독일-소련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중심의 무장 세력도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으며, 특히 슈마디야와 서세르비아 지역에서 공산당 무장대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위원행정청의 행정력은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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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교육 기관을 떠나는 료티치 |
디미트리예 류티치는 1942년경 스메데레브스카 팔란카에 청소년 강제 교육 기관을 설립하도록 주도했다. 그는 이 기관을 길 잃은 청소년들을 올바른 국가적 길로 되돌리는 장소로 보았으며, 실제 운영과 교육 내용을 직접 관찰하고 여러 차례 방문하여 강연을 하기도 했다. 관 책임자는 남성 측에서 밀로반 포포비치(Milovan Popović)였고, 여성 부문 책임은 그의 아내 드라고일라 포포비치(Dr. Dragojla Popović)가 맡았는데, 대부분의 교사, 교관들은 Zbor 소속이거나 그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료티치의 반대파들은 이 연구소를 강제 수용소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구소 내에서 자유가 제한되고 육체노동이나 고된 생활, 때로는 체벌까지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부분은 당시 일반 학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교육 방식이었다. 또한, 강제 수용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성들이 이 연구소에서는 나타났는데, 예를 들어 가족 방문이 허용되었고, 학생들이 일시적으로 외출하거나 스포츠 및 문화 행사를 위해 다른 도시를 방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의료 치료가 제공되었고, 저명한 공인이나 존경받는 학자들이 직접 와서 강연을 해주기도 했다. 또한 일부 전원(퇴원자)은 퇴소 후 자발적으로 돌아갔고, 어떤 부모들은 실제 강제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녀를 이곳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기관의 교육 내용은 명백히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성격을 띠었다. 교사들은 반공주의적, 국가주의적 교습을 행했고, 수용 대상은 주로 공산주의 저항운동과 연루되었다고 여겨진 청소년들이었다. 류티치와 그의 측근들은 설득과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의 정치적 지향을 바꾸려고 한 반면, 실제 운영에서는 통제, 노동, 징계가 병행되었고 점차 압박적인 성격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료티치 자신도 공산당을 위해 자금을 모금했던 고등학생들을 일반 수용소 대신 이 연구소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그가 이들을 비교적 죄가 가볍고 좋은 가정 출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연구소는 단순한 강제 수용소라기보다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재교육을 목적으로 한 독특한 시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료티치는 추종자들로 구성된 세르비아 의용군(Serbian Volunteer Corps)를 창설했는데, 1941년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한 직후 점령하 세르비아에서 탄생한 현지 협력 준군사조직이었다. SVC는 1942년 동안 점차 확대되었고, 1942년 기준으로 약 172명의 장교와 3,500명대 병력을 보유한 것으로 보고된다. 원래 정치조직 즈보르의 청년층과 친연 있는 인사들이 모여 형성된 이 집단은, 급박한 치안 상황과 반레지스탕스 작전의 필요성 속에서 독일 점령 당국의 실무적, 전술적 지원을 받으며 빠르게 군사적 역할을 띠게 되었다. 조직은 공식적으로는 자원대라는 이름을 썼지만 현실적으로는 즈보르의 이념을 무장으로 실현하는 기능을 수행했고, 반공과 치안 유지, 파르티잔·레지스탕스 소탕 같은 임무에 동원되었다. 초기 편제는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1942~43년을 거치며 수천 명 단위로 확대되어 지역별 대대급 편성을 갖추는 수준으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충성심과 군사적 효율성 사이의 긴장도 함께 커졌다.
SVC는 단순한 민병대가 아니라 정치적 성격을 지닌 준군사조직이었다. 료티치는 이 조직을 통해 즈보르의 반공·국가재생 이념을 강제적으로 구현하려 했고, 조직 내부에서는 군사훈련뿐 아니라 정치교육이 병행되었다. 따라서 SVC의 활동은 치안 유지의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동시에 지역사회에 즈보르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몬테네그로의 체트니크 사령관 파블레 듀리시치는 료티치와 접촉을 시작했다.
1944년 중반,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독일군이 세르비아를 떠날 것이 분명해지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요청에 따라 붉은 군대가 세르비아에 진입하게 되자, 드미트리예 료티치는 세르비아 내 모든 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통합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같은 결론에 이른 인물은 드라고리우브 미하일로비치였다. 이러한 결정의 주요 원인은 도나우 강변의 소련군 뿐 아니라, 8월 중순에 제1 및 제12 코르푸스 소속의 강력한 파르티잔 부대가 급속히 세르비아에 진격해 들어온 사실이었다. 이들은 불과 열흘 사이인 8월 20일부터 9월 1일까지 우지체–포제가 전선까지 돌파에 성공했다. 상황이 급변하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9월 1일에 전면 동원령을 선포했고, 9월 6일에는 모든 민족주의 세력의 통합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자원군(SDK)은 기존 지휘관과 조직 체계를 유지한 채, 서부와 남부 두 개의 강습 집단으로 재편되었다.
세르비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는 9월 9일 차차크 인근 옐로바 고라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파르티잔 부대는 민족주의 진영에 전면적인 패배를 안겼으며, 이는 세르비아의 향방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9월 13일, 파르티잔은 후퇴 중인 체트니크 최고사령부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를 제1 연대 3대대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구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르티잔 측은 이 과정에서 체트니크 최고사령부의 전체 문서 기록을 노획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패배 이후 대부분의 체트니크 부대는 보스니아로 철수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44년 9월 27일, SDK 지휘부는 슬로베니아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사실상 드미트리예 료티치가 고안한 계획의 실현이었다. 그에 따르면, 모든 민족주의 세력이 슬로베니아로 집결해 공산주의에 맞서 전선을 구축하고, 그곳에서 서방 연합국과 접촉을 시도하며 국왕 페타르 2세를 초빙해 유고슬라비아 연방 단위 슬로베니아를 선포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후에는 나머지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해방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계획에 따라 보스니아의 미하일로비치 휘하 체트니크, 몬테네그로의 파블레 듀리시치 휘하 부대 또한 슬로베니아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미하일로비치는 이 계획을 거부하고, 연합군이 아드리아 해안에 상륙할 것이라는 영국 측의 허위 신호에 기대어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의 계획 실현을 위해 료티치는 1944년 10월 4일 라트코 파레자닌이 이끄는 사절단을 몬테네그로로 파견해 듀리시치를 설득하려 했다. 이들은 베오그라드를 출발해 크랄레보와 라슈카를 거쳐 진입하려 했지만 길이 막혀, 라슈카–미트로비차–즈베찬–프리슈티나–쿠크스–슈코더르 경로로 우회했다. 사절단은 몬테네그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일부는 전투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1944년 말 독일군이 몬테네그로에서 철수하자 듀리시치는 철군을 시작했고, 결국 프리예폴레에서 슬로베니아로 향하지 않고 보스니아의 미하일로비치에게로 향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에 따라 사절단은 그를 떠나 슬로베니아로 향했다.
1945년 4월 22일, 드미트리예 료티치는 모믈로 듀이치(Momčilo Đujić)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내용은 가브릴로 총대주교와 니콜라이 주교가 그와 면담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자동차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기에 료티치는 다음 날인 4월 23일 오후 2시, 고리차(Gorica)로 출발했다. 차량에는 총 4명이 탑승했고, 료티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운전자인 라트코 지바디노비치(Ratko Živadinović)는 심각한 근시였으며(근시 -11), 주행 중 여러 번 도로 가장자리에 차량을 부딪쳤다. 료티치는 농담 섞인 말투로 "내 머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조심히 운전해줘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차 지붕에 머리를 자주 부딪히는 불편함을 묵묵히 참으며 목적지를 향해 갔다.
해가 저물고 시야가 어두워졌을 무렵, 그들은 아이도브슈치나에서 슬로베니아 군 순찰대에게 정지 명령을 받았다. 한 슬로베니아 소위가 먼저 다가왔고, 탑승자 전원이 하차했다. 이 소위는 료티치를 알아보고 이렇게 물었다.
소위: “회장님, 이 밤중에 어딜 가시는 겁니까?”
료티치: “자네, 나는 임무를 띠고 가는 길이네.”
소위: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러나 오늘 밤은 더 이상 이동하실 수 없습니다. 나머지 구간은 이미 파르티잔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시고, 내일 아침에 저희가 정찰대를 보내겠습니다.”
료티치: “내 아들아! 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전쟁 중에는 임무를 완수해야 하며, 설령 그것이 죽음을 부르더라도 말일세!”
료티치: “자네, 나는 임무를 띠고 가는 길이네.”
소위: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러나 오늘 밤은 더 이상 이동하실 수 없습니다. 나머지 구간은 이미 파르티잔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시고, 내일 아침에 저희가 정찰대를 보내겠습니다.”
료티치: “내 아들아! 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전쟁 중에는 임무를 완수해야 하며, 설령 그것이 죽음을 부르더라도 말일세!”
이리하여, 이동은 계속되었다. 순찰대가 떠난 후, 차량은 약 10분간 더 주행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들이 탄 차량은 연합군의 공습으로 반파된 다리의 남은 구조물에 충돌한 뒤 다리를 이탈해 2~3미터 높이의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료티치는 목이 부러져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다음 날 새벽, 류티치의 시신은 고리차로 운구되었고, 가브릴로 총대주교와 니콜라이 벨리미로비치 주교의 집전 하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첫 번째 헌화는 드라골류브 미하일로비치가 바쳤다. 한 헝가리 귀족의 폐허가 된 지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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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디미트리예 료티치 |
3. 사상과 평가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논쟁적인 역사적 인물로 남아 있으며, 세르비아에서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 매체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오늘날 공적 담론 속에서 그는 열렬한 지지자들에게는 위대한 애국자이자 영웅, 순교자로 칭송받는다. 반면, 다른 이들에게는 파시스트, 배신자, 범죄자로 비난받는다.디미트리예 료티치가 누구였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문서 보관소를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 류티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협력주의자로,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특히 세르비아 내 진보적 진영에서는 그의 이데올로기를 세르비아식 나치즘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사회학자 네보이샤 포포프는 류티치의 직계 후계자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라고 주장한 바 있다. 대부분의 세르비아 사람들이 료티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들이 료티치를 한목소리로 비판한다.
그러나 실제로 히틀러가 채식주의자였다고 해서 채식주의자 모두가 나치라는 주장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디미트리예 료티치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모두 포퓰리스트라며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논리 모두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전후의 역사적 평가와 기억은 극명하게 갈린다. 공산정권은 그를 명백한 협력자·배신자로 규정했고 강한 비판을 가했으며, 반면 망명자·지지자·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그의 애국심, 종교성, 반공 입장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티토 정권 시기의 역사학자 믈라덴 스테파노비치는 국영 정보기관(국가안전보장국)의 지원을 받아 쓴 자신의 책에서, 디미트리예 류티치와 그의 추종자들은 재평가의 여지가 없는 자들이며, 그들은 파시스트이자 반혁명분자이며 끝장난 자들이라 단정했다. 1937년 2월 즈보르는 독일의 자금을 지원받고 있으며, 유고 왕국 내부의 제5열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평가는 이후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독일 아카이브에 따르면, ZBOR는 이념적으로는 독일과 가까운 집단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독일은 굳이 유고슬라비아 정부와의 관계를 끊을 위험을 감수하며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베오그라드 정부가 불만을 표하자 독일은 즉시 접촉을 끊었고, 자금 지원 자체는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류티치와 즈보르는 철위대같은 유럽 극우파들과 이념적으로 많은 유사점을 공유했는데, 대표적으로 자본주의, 공산주의, 유대인이라는 세 요소를 공통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나치즘과는 결정적인 차이점도 존재했다. 특히 인종주의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그는 명백한 협력자이자 강렬한 반공, 반유대주의자였지만 초기에는 종교적 담론에 더 가까웠고 나치 독일처럼 인종 우열을 주장하는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하지는 않았다. 료티치는 공개적으로는 학살을 비판하지 않았고, 때때로 예상 가능한 보복이라는 식으로 이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깊이 실망했으며, SS 병사들을 두고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경악한 것으로 전해진다.
4. 여담
- 류티치의 조상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적이었다. 그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료티치는 급진당(Radical Party) 인사였으며, 젊은 시절 니콜라 파시치처럼 사회주의에 경도되었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세르비아어로 최초 번역한 인물이기도 하다. 드미트리예 료티치 역시 정치 활동을 급진당 내에서 시작했지만 곧 독자 노선을 걷는다. 그는 본래 권위에 순응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적 권위를 지지하는 이념을 주장하면서도 스스로는 상명하복을 견디지 못했다.
- 료티치 가문은 전통적으로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충실한 지지자였다. 제1차 세르비아 봉기 당시 이 가문은 부유한 집안으로서 처음부터 카라조르제의 편에 섰으며, 카라조르제가 스메데레보에 올 때마다 그들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심지어 카라조르제가 터키인들로부터 스메데레보 성의 열쇠를 받았을 때도 바로 그들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 Hearts of Iron IV의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승전한 독일의 속국인 세르비아 독립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950년대 경제 위기 이후 세르비아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게임 시작 시점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우스타샤 정권 하에 있던 크로아티아에서 피난 온 세르비아인들의 난민들로 인한 위기와 인구 대다수가 기본적인 생필품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의 개판이 되어버린 세르비아를 이끌다가 히틀러가 사망하면 세르비아 민족 해방 전선에 의해 암살당한다.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세르비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정치권에서 왕정독재 시대에 국왕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정치인 중 하나였다는 설명으로 짧게 등장한다.
- 전쟁 중 그와 그의 어머니 간에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있다, 첫 번째 편지는 1916년 10월 17일자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 편지로 여러분의 7장의 엽서를 받았습니다… 모두 살아 있고 건강하다는 소식에 너무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건강합니다. 3월 이후 소작지에서 지내고 있으며, 비록 작게 경작되었지만 우리가 살아가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새로 돈을 보내지 마세요. 여러분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세요. 삼촌과 이모, 드라가는 아직 프리슈티나에 있습니다. 편지를 보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불가리아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베라를 통해 편지를 보내세요. 그녀의 엽서는 옐레나가 받습니다. 건강히 지내며 살아 있어야 우리가 다시 만나고 껴안을 수 있습니다.류비차. V. 료티치, 스메데레보.”
같은 해 11월 말자의 두번째 편지“…9월 중순 이후로 여러분에게서 아무 소식도 받지 못했습니다. 매우 걱정됩니다. 이모에게서도 소식이 없습니다. 신문을 통해 연락해 주세요. …여러분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엄마가.”
5. 참고 자료
- Тинтор, Милош. *Димитрије Љотић – живот и политика*. Завршни рад, Филозофски факултет, Универзитет у Новом Саду, 2020.[4]
- Kurzydlowski, Christian. Ideology and Politics of Dimitrije Ljotic and the ZBOR Movement. 2017.
- Janjetović, Zoran. (2018). Dimitrije Ljotić and World War II. Istorija 20. veka. 36. 93-118. 10.29362/IST20VEKA.2018.1.JAN.93-118.
- Lompar, Rastko. Димитрије Љотић: учитељ или фарисеј. Београд: Катена мунди, 2022.
- Vladimir Dimitrijević, Синови Светог Саве, Catena Mundi.
- Фашизам Димитрија Љотића: нова истраживања
- Ко је био Димитрије Љотић? – Растко Ломпар
- Да ли је Димитрије Љотић имао подршку СП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