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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gold> 조선 태조의 왕자 덕안대군 | 德安大君 | ||
이름 | 방연(芳衍) | |
봉호 | 문안군(文安君)1409년(태종 9) 덕안대군(德安大君)1872년(고종 9) | |
본관 | 전주(全州) | |
부왕 | 태조 고황제 | |
모후 |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 |
부인 | 없음[1] | |
자녀 | 양자 1남 금산군 이중군(金山君 李仲窘)[2] | |
생몰기간 | 1370년대 초중반[3] ~ 1388년경 |
1. 개요
조선 초기의 왕족. 태종 이방원의 형제들 중 유일한 동복 동생이다.2. 생애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사이에서 여섯째 아들이다. 1385년(고려 우왕 11) 을축방(乙丑榜) 문과에 동진사 14위로 급제한 뒤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었는데, 바로 위의 형 이방원처럼 과거에 합격한 뛰어난 인재였던 듯하다. 이성계는 이방원이 문과에 급제한 것에 이어 이방연까지 급제하였으니 엄청나게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전후로 사망했다.2.1. 처형설
이방연은 위화도 회군 때 우왕에게 잡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명태조실록 권193 홍무 21(1388)년 8월 13일 기사를 보면 ‘왕이 노하여 성계의 자식을 죽였다\王怒殺成桂之子]’는 서술이 등장하는데, 이성계의 자식들 중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1388년 이후로 후대 기록이 없는 인물은 이방연뿐이므로, 만약 이 서술이 사실이라면 이방연은 우왕에게 살해당한 것이 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성계를 재촉하기 위해 우왕이 머무르던 평양에 인질로 잡혀 있던 이방우와 이방과는 탈출에 성공했고, 개경에 머무르던 이방원도 남은 가족들을 챙겨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나 방연은 탈출에 실패하고 분노한 우왕에게 화풀이 대상으로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조선 측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게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명나라의 기록은 직접 고려에 상황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고려 천호 진경의 증언을 적은 것이고, 천호직 특성상 중앙의 사정을 제대로 알기도 어려우니 우왕이 이방우를 비롯한 이성계의 식솔들을 죽이려 든 것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 고로 이방연은 위화도 회군 이전 시기에 이미 병이나 사고로 요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모로 조선 측 기록은 죽음의 시기가 위화도 회군 즈음이라는 분명한 정황이 있으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방연이 질병이나 사고로 요절했다면 오히려 사망 원인을 분명히 기록했을 것이다. 나이로 보면 혼인을 했을 연령대인데, 숙종 때 완성된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4]에는 혼인을 하지 못했다고 언급된다.
기록이 없어 추측할 뿐이지만 만약 우왕이 이방연과 그의 처자부터 처가까지 몰살했다면,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핏줄이라고 주장하여 폐위하고 참살한 주된 이유일 수도 있다. 우왕의 신돈 사생아 설은 김저와 정득후의 이성계 암살 미수와 우왕 복위 시도 이후 창왕마저 폐위시키기 위해, 소위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라는 폐가입진을 뒷받침하는 명분이었지만 이방연과 연계해 생각하면 아들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일 수도 있다. 역적은 일가를 몰살하고 그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거는 것이 기본 조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런 셈.[5]
위화도 회군 이후 개경을 함락하고 저잣거리에 내걸려서 효수된 이방연의 목을 본 이성계는 우왕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상태가 되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똑같이 돌려주려면 가장 먼저 우왕과 창왕 일가의 왕족 예우부터 박탈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왕족은 폐서인이 되어도 처형을 시신이 보존되는 사약으로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저와 정득후의 이성계 암살 미수 이후 우왕은 상왕 자리에서마저 폐위되어 이전의 유배지보다 더 먼 강원도 강릉시로 유배갔고, 이윽고 신돈의 핏줄로 몰려 아들인 창왕까지 폐위되자 아예 고려 왕씨인 것마저 부정되어 왕을 참칭한 대역죄인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양왕 즉위 후 이성계측 대신들은 적극적으로 우왕과 창왕의 처형을 주청하여 그들을 모두 참수시키고, 사후 장례는 커녕 시신도 수습하지 않은데다[6] 신돈의 핏줄이자 반역자로 기록하여 죽어서도 편치 못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우왕의 정비이자 창왕의 모후인 근비 이씨도 폐서인시키고 근비의 아버지이자 우왕의 장인인 이림도 위의 김저와 정득후 사건에 연루시켜 유배 보내버리면서 우왕의 처가도 박살냈다.
1392년 아버지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는 이미 죽은 상태여서 봉호를 내리지 않았으나, 이후 특이하게도 고려 초기의 관위 원윤(元尹)에 추증되었다. 1409년에는 형 이방원에 의해 문안군(文安君)에 추증되었고, 1872년 고종에 의해 '덕안대군(德安大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영종정경(領宗正卿)에도 추증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한국 사극에서도 여지껏 등장한 작품이 하나도 없고, 아울러서 셋째 형 이방의보다도 존재감이 낮다. 방의는 비중은 낮더라도 그나마 직접적으로 등장한 작품도 여럿 되는데 말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조와 신의고황후 사이의 자식들을 모두 모아놓은 컷이 있는데, 그 와중에 컷 한 구석에 "여섯째는 어려서 죽었다."라고 적어놓기만 할 뿐 등장조차 못 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그가 죽은 뒤인 위화도 회군(1388)부터 작품이 시작하는 탓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3화에서 형제 싸움을 벌인 아들들에게 어머니가 "죽은 방연이를 봐서라도 우애 있게 지내거라."고 당부하며 언급되는데 그나마 이름이라도 나온 현재까지 유일한 작품이다. 또한 18화에서도 셋째 형에게 언급된다.
[1] 『선원보략』에 의하면 장가를 가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2] 넷째 형인 회안대군의 4남이자 서자. 1872년(고종 9) 자녀 없이 죽은 덕안대군의 양자로 삼아졌으나, 이후 취소되었다.[3] 1387년에 지어진 이자춘신도비에서 신의왕후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혼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복누이 경순공주보다도 어린 것으로 보인다.[4] 이전에도 선원록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소실되는 바람에 현 시점에 확인 가능한 본은 숙종 때 복구하며 오류를 고치고 보완하는 작업을 거친 족보다. 때문에 왕조에 약점으로 여겨질 만한 부분이 인위적으로 삭제되었을 수도 있다.[5] 이를테면 인조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괄의 가족들의 목을 베고 효수하였다.[6] 이렇다 보니 현재에도 우왕과 창왕의 무덤 위치는 불명이다. 이성계가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 참수한 것이기에 아예 무덤조차 만들지도 못하게 방해했을 것이고 우왕과 창왕의 참수된 수급이 효수당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효수당한 수급은 당연히 까마귀나 맹금류들의 한끼 식사가 되었을 것이고 목이 잘린 남은 시신들은 숲이나 들판에 버려서 산짐승이나 들짐승들이 뜯어먹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