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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덕수궁 정관헌 德壽宮 靜觀軒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수량 / 면적 | 1동 지상 1층, 지하 1층, 바닥면적 297.1㎡ | |
건축시기 | 1897년 ~ 1901년 사이 (창건) | |
설계자 |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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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정관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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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 동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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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 야경[3] |
1. 개요
<colbgcolor=#e3ba62> 정관헌 영상 |
덕수궁은 근대에 지어진 황궁인 만큼 경내에 여러 채의 서양식 건물, 즉 양관(洋館)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바로 정관헌이다.
다만, 정관헌은 다른 양관들과 달리 한국 전통 가옥의 일부 요소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러시아 제국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4]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정관(靜觀)'은 '조용히(靜) 바라본다(觀)'라는 의미이다.
2. 용도
정관헌의 정확한 용도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던 카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관헌은 카페가 아니다. 오히려 공식 기록을 통해 보면, 정관헌은 다른 중요한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는 정관헌에 관한 기록이 오직 어진(왕의 초상화)과 관련된 기사만 등장한다. 1901년(광무 5년) 2월에 태조의 준원전 본 어진을 이곳에 모시라는 기록을 시작으로##[5],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6]를 보관하고#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순종실록부록》의 기사도 1912년에 여기 있던 어진들을 중화전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7] 《승정원일기》에서도 신하들을 접견하거나## 봉심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지만,## 커피나 여흥과 관련된 기록은 전혀 없다. 이는 정관헌이 단순한 여가 공간이 아니라, 왕실의 공식적이고 엄숙한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정관헌이 완전히 엄숙한 용도로만 쓰였던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1920년 5월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자규(子規)야[8] 우지마라 주인(主人) 일흔[9] 덕수궁(德壽宮)을 백량동작생황진[10]이 옛이야기가 아니로구나〉에 따르면, 고종이 어린 영친왕과 여름 더위를 식히던 장소로 묘사된 바 있다.# 또한, 1915년 덕수궁 실측 자료인 《덕수궁 원안》에 따르면, 정관헌 내부에는 서양식 욕실과 주방이 설치되어 있어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구조였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점들은 정관헌이 황실의 생활 공간으로도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관헌의 실제 용도는 이후 연구와 전시를 통해 보다 명확해졌다. 덕수궁관리소는 2025년 4월 22일부터 7월 13일까지 열린 〈대한제국 황궁에 선 양관–만나고, 간직하다〉 특별전에서, 정관헌이 황실의 보물을 보관하던 '보물 수장고'로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정관헌을 비롯한 양관들은 화재에 강하고 견고한 자재로 건립되어,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덕수궁관리소의 학예연구사는 "정관헌은 벽으로 둘러싸인 폐쇄형 건물로, 도면과 사진을 통해 수장고 용도였음이 확인된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기록과 연구, 전시를 종합해 볼 때,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여가를 즐기던 카페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활용된 장소였음이 분명해진다. 정관헌은 왕실의 존엄을 상징하는 어진을 임시로 봉안하고, 황실의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수장고로 기능했으며, 때로는 황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서양식 건축 기법을 적용하여 기능성과 안전성을 높인 점에서, 대한제국기 궁궐 양관 건축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따라서, 정관헌은 왕실의 문화와 생활을 지탱했던 역사적 공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3.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덕수궁의 건물 중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은 1897년(건양 2년) 이후에 신축되었고, 1901년(광무 5년) 작성된 태조 어진의 정관헌 봉안 기록을 고려하면, 1897년과 1901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11] |
<colbgcolor=#e3ba62> 일제강점기 정관헌[12] |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덕수궁은 한동안 비어 있었다.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각을 철거했으나, 정관헌은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후 찻집과 카페로 활용되면서, 본래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어 있던 건물의 벽체가 철거되고 개방형 연회장처럼 변형되었다. 이로 인해 정관헌이 처음부터 카페였다는 오해가 생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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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1973년 덕수궁 휴게실로 쓰이고 있는 정관헌 | <colbgcolor=#e3ba62> 1998년 정관헌에서 다과회를 연 모습 |
1977년 개봉한 윤정희 주연의 영화 〈야행〉에는 카페로 운영 중이던 정관헌의 내부 모습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현재와 달리 칸마다 쇼윈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현대식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2004년 2월 6일, 문화재청은 정관헌을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덕수궁 전체가 이미 사적 제124호로 관리되고 있어 영역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지정이 해제되었다.
2025년 4월 22일에서 7월 13일까지 덕수궁 특별전 연계 현장 연출의 일환으로 1933년 이전까지 있던 벽체의 모습을 컬러로 그린 구조물이 가설되었다.
4. 구조
이 포스팅을 참조. 자세하게 정리를 잘 해놓았다.5. 여담
- 건물 동남쪽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관헌 촉각 모형이 있다.
<colbgcolor=#e3ba62> 〈2020년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행사 영상
대한제국 관련 문화 행사를 많이 연다. 2010년부터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행사를 매년 개최한다.
<colbgcolor=#e3ba62>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행사를 개최한 10년 간 시민 2만명이
참관했다는 내용을 다룬 2018년 9월 28일 자 YTN 뉴스 '
또한, 대중들에게 고종의 카페로 알려져서 그런지,[B] 스타벅스[14]에서 시민들에게 명사들의 강연 프로그램과, 커피와 간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행사를 2009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이곳에서 진행한다.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들이 직접 만든다고 한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이동에 이름이 같은 '정관헌'이란 카페가 있다. 실제로 덕수궁 정관헌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며, 카페 분위기도 이에 걸맞게 클래식한 것이 특징이다.##[B]
[A] 2008년 6월 23일 지위 박탈, 사적 124호로 통합.[A] [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널리 불린다. 근대기 서울과 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5] 저 당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불탔기 때문에 태조의 어진을 베껴 그리려고 함흥의 준원전에 있던 그림을 잠시 덕수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태조 어진을 실제로 여기에 모시진 않았고, 경운당이란 건물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베껴 그린 직후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6] 당시 순종은 황태자였기에 그의 초상화는 어진이 아닌 예진(睿眞)으로 불렸다.[7] 《고종실록》, 《순종실록》, 《순종실록부록》은 일제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제가 교묘하게 진실을 왜곡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며, 단순한 사실까지 왜곡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주요 사실들은 《승정원일기》 등 다른 사료와의 교차검증을 통해 어느 정도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다.[8] 두견새.[9] '잃은'의 당시 표기법.[10] 柏粱銅雀生黃塵. "잣나무 서까래 구리로 만든 새는 누런 먼지만 내고 있네"라는, 당나라 시인 왕발(650 ~ 676)의 시 〈임고대편(臨高臺篇)〉에 등장하는 구절로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이다.[11] 당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불탔기 때문에 태조의 어진을 베껴 그리려고 함흥의 준원전에 있던 그림을 잠시 덕수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태조 어진을 실제로 여기에 모시진 않았고, 경운당이란 건물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복제본을 그린 직후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1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 상술했듯이 실제 정관헌은 카페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14] 2009년 문화재청과 ‘문화재지킴이’ 협약을 맺고 현재까지 다양한 문화재 보호활동을 실천한다.[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