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0 01:16:17

노스롭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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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경제 관련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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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 개요2. 사건 전개
2.1. 두 명의 로비스트2.2. 거액의 커미션2.3. 성능 미달의 신형 기종2.4.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2.5. 후일담
3. 관련 문서

1. 사건 개요

노스롭 항공사(현 노스롭 그루먼)가 대한민국 공군F-20 전투기를 팔기 위해서 벌인 대형 로비 스캔들이다.

2. 사건 전개

2.1. 두 명의 로비스트

F-5로 한동안 두둑한 수익을 벌어들인 노스롭은 후계기종 F-20을 자체개발하여 기존 F-5의 운용국에 수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F-5의 주요 운용국이던 남베트남은 이미 망했고 최다 고객이 될거라 믿었던 대만 판매가 미중수교로 무산된 데다[1] 여타 동맹국들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몸이 단 노스롭은 F-20의 전신격인 F-5 전투기를 가장 많이 운용하던 한국 수출에 사활을 걸게 되었다. 노스롭은 한국 판매를 성사시키기 위해 2명의 에이전트를 고용했다.

첫 번째 에이전트는 지미 신이란 이름의 재미교포로, 본래 한국 해병대 출신이었으나 이후 미국에 건너가서 하와이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이다. 그는 이후 노스롭의 태평양지부 홍보 마케팅 담당의 고위급 인사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나중에는 한국 판매 에이전트를 담당하게 됐다.

두 번째 에이전트는 바로 피스톨 박이라고 불리던 박종규였다. 박종규는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한때 정권의 2인자 소리까지 듣던 거물급 인사였으나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인해 공직에서 물러난 뒤 대한사격연맹회장 겸 IOC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박정희 피살 이후 전두환신군부에게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당해 일부 재산을 강제헌납하는 등의 일을 겪었으나, IOC 위원으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큰 공헌을 하면서 당시 정재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2]

2.2. 거액의 커미션

사실 이 두 사람을 에이전트로 고용하는 것은 노스롭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노스롭은 이미 1970년대 한 차례 로비 스캔들 이후 '법적, 정치적으로 문제시 될 만한 인물들은 해외 에이전트로 뽑지 않는다.'는 사내 규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미 신은 그렇다 치고 박종규는 에이전트로 삼기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노스롭 이사진은 박종규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나 당시 F-20 판매에 모든 걸 걸었던 노스롭의 사장 조운즈는 일을 밀어붙였다.

당시 박종규는 F-20 한국 판매 계약 성사 시 5,500만 달러의 커미션[3]을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당시 노스롭이 에이전트들에게 지불하던 금액의 10배나 되는 액수였다.

또 한국 내 F-20 판매 에이전트 회사로 동양고속을 지목했다. 동양고속은 고속버스를 운영하는 운수업체로, 방위산업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 사장인 이민하 사장이 박종규의 처남이었으며 실질적인 동양고속 소유주도 박종규 본인이었기 때문에 이 회사를 에이전트 회사로 지목한 것이다.[4]

게다가 박종규는 당시 노스롭 서울지부 사무소장인 웰코 가시크에게 판촉비 명목으로 50,000달러의 현금을 요구했으며 더 황당하게도 박종규는 노스롭에게 '오프셋(절충교역)' 조건으로 '아시아문화여행개발'이란 회사에 625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인 오프셋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오프셋은 거래 성사 이후에 하는 것이며 대부분 무기 생산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오프셋하거나 돈의 투자나 부품 구매 대신 기술 이전을 하기도 한다.[5] 혹은 국가 대 국가라면 다른 투자 약속 등이 뒤따르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아시아문화여행개발'은 이런 것과 하등 관계가 없는 호텔 업체였다.

아무리 노스롭이 F-20 판매에 사활을 걸었어도 무기 개발 업체도 아니고 호텔 업체에 투자하란 요청은 무리였기에 이사회는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노스롭 사장 조운즈는 이미 이 돈을 홍콩에 있는 밀리 킴이라는 여성의 개인계좌에 보낸 뒤였고 조운즈는 이 사실을 이사회에 숨겼다. 밀리 킴은 박종규와 친분이 있던 사이로 이 돈은 당연히 박종규, 이민하에게 전달되었다.

주로 고위급 인사는 박종규가, 중/하위급 인사는 지미 신이 만나서 로비 활동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량의 금품이 살포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현금 거래 내역은 이후 알려지지 않았다. 노스롭 사장 조운즈는 이제 진짜 '고갱님'을 만날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박종규에게 고갱님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바로 전두환이었다. 조운즈 사장과 전두환이 만남을 갖기에 앞서 박종규는 좀 더 극적인 '쇼'를 준비하였다. 바로 F-20 쇼였다.

2.3. 성능 미달의 신형 기종

노스롭은 1984년 10월 수원 비행장에 전두환 이하 각계 고위 인사가 자리를 잡은 가운데 F-20 전투기의 시범비행을 선보였다. 그러나 급강하 후 급상승 기동을 선보인 기체는 정점을 찍은 후 별다른 후속기동이 없었다. 이후 뒤집어진 상태에서 실속에 빠진 F-20은 천천히 낙하하더니 결국 근처 논바닥에 추락하고 말았다.



추락 당시의 영상. 플레이타임 30초 이후에 실속에 빠져 추락한다.

기체 결함은 아니고 G-LOC[6]이 원인이었는데, G-LOC의 발생 가능성을 낮추는 방법은 있어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아직도 없기 때문에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사고였다. 그러나 한국 고위 인사들 앞에서 시연하던 전투기가 추락해 버렸으니 노스롭 입장은 상당히 난처해졌다. 이후 박종규와 지미 신은 악재를 수습하기 위해 때로는 강압적으로, 때로는 금품 등을 이용해 유화책을 써 가며 각계 인사들에게 더 열심히 로비 활동을 벌였다. F-20 사고 당시 이들이 쓴 로비 자금은 대략 한 달에 한화로 1억원 가량이었다. 이는 1984년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7]

결국 박종규, 지미 신은 조운즈 사장과 전두환의 회동을 성사시켰다. 이들은 하와이에서 대략 30여분 정도 회동했고 조운즈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으며, 이로 인해 박종규를 더 신뢰하게 된다. 한편 당시 전두환은 노스롭에게 F-20 도입 조건으로 800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요구를 했다고 전해진다.[8] 조운즈 사장 및 노스롭 이사회는 박종규가 또 다시 요구한 오프셋도 받아들였고 박종규 소유[9]의 홍콩 내 무역 회사에 9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였다.

2.4.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그러나 노스롭에는 악재가 겹쳤다. 일단 1985년 7월 파리 에어쇼를 앞두고 캐나다에서 시범비행을 연습 중이던 F-20 한 대가 또 다시 추락한 것이다. 이번에도 원인은 G-LOC이었지만 이미 두 번이나 떨어진 전투기에 대한 신뢰성도 추락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같은 해 12월 박종규가 덜컥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로비를 해줄 사람이 없어져 버리자 노스롭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최악의 악재는 바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한국 등 2등급 동맹국에 대한 무기 수출 규제를 완화한 것이었다. 사실 F-20이 국제 무기 시장에 등장한 이유가 전임 지미 카터 정권이 F-16 최신형의 '2등급 동맹국'[10]에 대한 해외 판매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지미 카터 정권은 세계적인 군비 경쟁을 막겠다는 취지[11]로 미국의 주력 전투기와 동급의 전투기를 해외에 팔지 않는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그 일환으로 F-16에 탑재되던 대용량 F-100엔진의 수출을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2등급 동맹국이 F-16을 도입하려면 한 단계 낮은 구형 J79 엔진을 탑재한 다운그레이드 사양(F-16/79)만 가능했다. 그래서 F-16/79보다 성능, 가격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고 판단된 F-20의 해외 수출에 나선 것이었다.[12]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서 판매규제를 풀어 버리면서 한국에도 당시 미 공군이 사용하던 기종과 똑같은 사양의 F-16 블록30/32형 모델 판매를 허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공군은 굳이 F-20을 살 이유가 없어졌다. 실제로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피스브릿지(Peacebridge) 사업과 이후의 KFP 사업을 통해 F-16을 도입했다. 결국 노스롭은 거금만 쓴 채 한국에 대한 F-20 판매에는 실패했다.

2.5. 후일담

지미 신과 이민하 사장은 노스롭에 입막음조로 다시 돈을 요구하면서 노스롭의 입장에서 일이 더욱 황당하게 돌아갔다. 결국 노스롭은 동양고속에게 150만 달러를 추가로 지불하여 한국에 대한 악연을 마무리했다. 이후 지미 신은 다시 이민하에게 추가로 돈을 받아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입막음료까지 지불한 것도 무색하게 1988년에 월스트리트 저널의 표지를 장식하면서 노스롭의 로비가 폭로되었다. 더불어 대한민국에도 당시 '5공비리 척결 특별수사'를 통하여 이 내용이 알려졌고, 이민하 사장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기소 된다.

그러나 로비의 핵심이었던 박종규는 이미 사망하였고 지미 신은 애당초 재미교포여서 한국에 없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5공비리 척결 특별수사'도 군부정권의 연장선인 노태우 대통령 집권 시기의 일이라서 대부분 용두사미식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이민하는 1심에서 1년의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으로 감형되어 풀려났다.

한편 노스롭에서는 "우리 너희한테 속았다. 우린 그거 로비하라고 준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동산 투자금으로서 주었단 말이다!"라며 오프셋으로 건네주었던 625만 달러를 도로 돌려달라는 소송을 걸었다. 그럼에도 1991년 대한민국 법원은 이런 막대한 돈을 단순한 투자자금이 아닌 비리 목적으로 주고 받았기 때문에 반환할 이유가 없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노스롭이 패소했다.

관련 기사: 어느 민초의 반세기 전투기 5 : 양 김(金)과의 인연

3. 관련 문서



[1] 미국의 외교 무게중심이 대만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중국과 적대 관계인 대만에 대한 신형 무기 판매를 꺼리기 시작했다.[2] 박종규는 유신정권 시절 사격연맹회장으로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했는데 이게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최한 세계구급 스포츠대회였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IOC 위원으로 국제 스포츠계에서 유일하게 통하던 한국인이었다. 부정축재자로 지목당하면서 한동안 은둔 생활을 했으나 전두환 정부가 올림픽 유치에 정권의 사활을 걸면서 국제스포츠계에서 유일하게 통하던 박종규가 다시 실세로 부상한 것이다. 김운용은 박종규가 사망한 뒤 한국 몫의 IOC위원 자리를 승계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3] 2020년 기준으로 한화 654억이다. 참고로 당시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이 800원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지금 물가로 약 4,000억 정도를 요구한 것이다.[4] 이런 행태는 작게는 21세기에도 가끔 적발되고 또 기사화되고 있지만 공무원이 퇴직했다는 등의 이유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제대로 해먹고 납품 완료한 경우는 내막을 알 길이 없고 언론이 기사화하는 경우는 사업이 뭔가 잘못되어 내분이 생겼거나 정부가 어떤 조치를 공개했을 때 냄새 맡은 기자들이 탐사해 보도하는 것이다.[5] KFP 사업으로 F-16을 도입하면서 록히드마틴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아 T-50 골든이글을 공동 개발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의 절충교역은 이런 식이다.[6] 즉, 파일럿이 중력 가속도를 못 이기고 기절했다.[7] 당시에도 최고급 아파트로 꼽히던 압구정 현대아파트 48평도 1억이 안 됐다. 21세기로 따지면 강남의 최고급 신축 50평대 아파트 수준이었다. 월 수십억 원을 로비자금으로 쓴 것이다.[8] 다만 전두환의 금품 요구는 지미 신의 주장으로 이후 벌어진 수사 등에서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실이 아닌 아닌 지미 신의 주장 수준에서 머문다.[9] 명의 자체는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10] NATO, 일본,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제외한 기타 동맹국으로 미국의 무기수출에 있어 2등급 동맹국은 일반 국가에 준하는 대외 군사판매 절차를 밟아야 했다. 한국은 1980년대 2등급 동맹국으로 분류되었고 일본, 호주, 이스라엘과 같은 1등급 동맹국의 대우를 받게 된 것은 2008년 한미 정상 간의 구두 합의 이후의 일이다.[11] 미국이 고성능 무기를 우방국에 공급하면 소련 역시 거기에 맞춰 공산권 진영에 고성능 무기를 지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공산권 진영의 군사력을 강력하게 만들어 평화를 저해하고 미국의 국익에도 손해를 끼친다는 논리였다.[12] F-20이 당시 F-16 초기형에는 없었던 AIM-7 운용 능력을 가지는 등 우위를 점한 부분도 있었지만 장착된 레이더의 탐색거리 자체는 더 짧고 기체도 소형이다보니 무장에 한계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여러모로 F-16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정적으로 F-16은 이미 미 공군이 운용하면서 검증된 기종이었지만 F-20은 미군에서도 운용하지 않은 수출전용 기체였기 때문에 성능에 대한 검증을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