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3 08:25:05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1. 개요2. 상세
2.1. 설명 양식2.2. 비교2.3.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
3. 작품 내에서의 모습4. 관련 문서

1. 개요

"어,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
"어,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우리 사회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모두 필요하다. 낙관주의자는 비행기를 만들고, 비관주의자는 낙하산을 만든다.

첫 번째 예시는 낙관주의염세주의(비관주의)의 예시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첫 번째 예시의 상황에 대한 사실 판단은 "해당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다"이고, 저 둘은 그 상황에 대한 각각의 성향이 반영된 가치 판단이다. 이는 자연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적용된다. 아름답고 신나며 경이롭고 조화로운 풍경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안하고 위험할 뿐더러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생존 경쟁의 각축장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식.

두 번째 예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가에 대한 얘기다. 하늘을 날 수 없는 인간이 땅 위에서의 삶에만 안주하며 살았으면 비행기는 발명되지 않았을 것이고, 비행기의 결함이나 자연재해로 인하는 추락과 같은 위험한 상황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낙하산이 발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낙관론과 비관론은 쓸 데 없는 사상이 아니라 인류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상이다.

낙관주의란 세상과 인생에 대하고 밝게 보는 것 또는 앞으로의 일들이 잘 될 것이라고 믿는 태도이며, 비관주의와 염세주의는 반대로 세상과 인생에 대하고 어둡게 보는 것 또는 앞으로의 일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태도이다.[1] 양쪽 모두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믿음이나 기대에 해당한다.

2. 상세

이러한 기대를 거쳐서 낙관주의자들은 더욱 자신감 있고 집요하지만, 비관주의자들은 이러한 기대가 부족하므로 의심이 많으며 망설이는 경향이 많다. 어느 연구에서는 낙관론자들이 현재와 미래를 비슷한 수준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비관론자들은 미래를 다소 밝게 전망하되 현재와 과거를 비슷한 수준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함이 확인되었다. 즉, 낙관론자들에게 현재는 "최고"이고, 이것은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비관론자들에게 "최고"란 아직 오지 않은 것[2]이다. 한편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기보다는 현재에 대한 평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낙관주의/비관주의가 전체적으로 이뤄지기보다 특정 분야나 환경 등에 따라 마구 섞이거나 대조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국가의 현재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비관주의이면서 미래의 경제 전망과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될 가능성에는 대해서 낙관주의가 되는 등이 있다. 그래서 일부 부분에서 낙관주의/비관주의를 보인다고 다른 부분에서도 일관적으로 똑같은 경향을 보인다는 보장도 없으며, 또한 어떤 사람을 일관되게 '비관주의자다, 낙관주의자다' 등으로 일반화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

2.1. 설명 양식

뾰족머리 부장: 우리 회사의 이윤이 감소했네. 좋지 않은 경제상황 때문이라고 하는군.
딜버트: 그러니까... 이윤이 증가하면 부장님 같은 훌륭한 매니저가 있어서고, 감소하면 불황 때문이라는 겁니까?
뾰족머리 부장: 자네가 자꾸 트집을 잡지만 않는다면 회의가 더 일찍 끝날 수 있을 듯한데 말일세.
딜버트: 죄송합니다.
- 《딜버트》, 2001년 9월 4일

설명 양식은 다음의 3차원에서 이해된다.
  1. 이 사건은 내가 원인이 되어 발생했는가? 아니면 외부의 무언가가 원인이 되어 발생했는가?
    • 시험을 망쳤다 → 공평하지 못한 시험이었고, 논란이 있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vs 내가 충분히 대비를 하지 못했다

  2. 이 사건은 일시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항상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인가?
  3. 이 사건은 내 인생에서 제한적인 영향력을 갖는가? 아니면 내 삶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가?
    • 친한 친구와 소원해졌다 → 단순한 친구관계에서의 충돌일 뿐이다 vs 내 전반적인 대인관계 역량의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다

보면 알겠지만 전자는 낙관적 설명양식, 후자는 비관적 설명양식에 속한다. 즉 낙관적인 사람은 좋은 일에 대해서 내 덕분, 항상 있는 일, 내게 중요한 일[3]이라고 생각하지만, 비관적인 사람은 남 덕분, 가끔 있는 일, 시답잖은 일[4]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나쁜 일에 대해서는 설명이 거꾸로 흘러간다. 낙관적인 사람은 남 탓, 다시는 없을 일, 별 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고 떨쳐내지만, 비관적인 사람은 내 탓, 항상 있는 일, 내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이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용어와 관련이 깊다. 회복탄력성은 현재 시련이나 안 좋은 결과를 심리적으로 극복하는 특성이나 능력을 말한다. 한 마디로 '좋은 일'에 실제보다 과장하고 정서적으로 큰 느낌을 갖느냐 '나쁜 일'에 실제보다 과장하고 정서적으로 큰 느낌을 갖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정리한다면 다음의 표와 같다.
  낙관적 설명양식 비관적 설명양식
좋은 사건 1. 내 덕분에 생겼다.
2. 좋은 일은 또 만날 것이다.
3. 내 삶의 모든 면이 좋아졌다.
1. 남 덕분이거나 우연한 일이다.
2. 다시는 없을 행운일 뿐이다.
3. 내 삶에 큰 의미가 없다.
나쁜 사건 1. 내 잘못이 아니다.
2. 이런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3. 내 삶을 위협하지 못한다.
1. 전적으로 나 때문이다.
2. 내게는 항상 있는 일이다.
3. 내 삶의 전부를 무너뜨렸다.
허나 낙관적 설명방식에는 약점이 있는데, 어떤 행동의 결과가 분명히 자신에게 있음에도 그것을 남 때문이거나 환경 탓으로 심리적 정당화를 해서 책임를 회피하거나, '좋으면 내 탓, 나쁘면 남 탓'이라는 논리로 이기주의(이기적 편향)로 발전할 수 있다.

2.2. 비교

어느 쪽이 옳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무조건적인 비관이 답이 아니듯이 무조건적인 낙관도 답은 결코 아니다. "낙관론자들은 힘든 시기가 와도 동기를 잃지 않지만, 비관론자들은 어려움이 닥쳐오면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이며, 일부 무조건적인 낙관론자들이 "비관론자들은 우울증에 취약한 것인지 최선을 다하겠답시고 사전에 기대 수준을 낮추려고 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다"며 비관론자들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높은 목표를 세워서 '잘 될 거야'라고 덮어놓고 낙관부터 하고 시작한 뒤에 수습을 하지 못해 허덕이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있느냐는 반박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낙관주의를 신봉하는 이론에 따르면 비관주의자들은 우울하고 자주 아프며 의욕도 없고 무력한데다 절망에 빠져 있다. 또 비관주의는 부정적 결과만을 가져오고 낮은 기대치는 현실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맥 빠지는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비관주의자들도 있다. 학습된 무기력도 주로 비관주의에서 많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낙관하고 상황을 과신해 자기 멋대로 좋은 방향으로만 해석해 버린 나머지 일을 그르치는 사례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비관주의의 결점이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든다면 낙관주의의 결점은 사람을 지나칠 정도로 무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단순히 마음 속에 막연한 기대감만 품거나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계속하면 정말로 모든 일들이 잘 풀리게 될 거야 라는 류의 비현실적인 믿음은 분명하게 낙관주의가 가진 어두운 면임에 틀림없다. # 오로지 긍정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거부하고 회피하려는 해로운 긍정성(toxic positivity)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부정적인 현실을 무작정 회피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아닌 명확히 상황을 인지한 후에 부정적인 것들조차 긍정적인 결과에 이르는 과정 혹은 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낙관주의의 올바를 태도일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충고는 체형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이즈의 옷을 입으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 모두가 똑같은 사이즈의 옷을 입을 수는 없고 각자 체형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하듯 똑같은 상황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은 성격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고 해결 방식도 분명히 다르건만 무조건 긍정적인 사고와 낙관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러한 충고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 비관하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갖기 때문에 비관하는 것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관주의가 그들의 불안을 다스리는 효과적인 전략(strategy)이 된다. # "상황에 따라서는 비관론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동기의 측면에서는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라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어떤 일을 시작한 이후 그 전개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생각하지도 않고 "되든 안 되든 일단 저지르고 나서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라"는 무책임한 말과도 통하는 것이다.

연구자들 중 일각에서는 한편 우울한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나 방어적 비관주의(defensive pessimism)[5]라는 개념으로 맞서고 있다. 이들은 낙관적 기대가 어쩌면 자신의 통제력이나 성공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고 본다.(낙관주의적 편향, Optimism Bias: 탈리 샤롯: 낙관주의적 편견) 낙관주의자들의 인지도식 상에는 잘못된 신념들이 존재해서, 예를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의견에 동의할 거야"나 "낯선 사람들도 나를 무조건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겨줄 거야" 같은 것이 있다. 오히려 미약한 기분부전이나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주어진 상황을 더욱 신중하게 헤쳐나간다고 본다. 일단 현재까지는 매우 도전적이고 논쟁적인 주제로,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결함이 있음이 발견된 상태이다.[6] 그렇기에 우울한 현실주의 가설은 아직 확신 단계까지는 아니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동아시아 문화권, 특히 중국 등지에서 비관주의가 유독 강하게 발견되고 북미 문화권에서 낙관주의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는 점을 들어서 일종의 문화차가 있음에도 연구자들이 문화의 프레임에 빠져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심리학이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는 미국에서는 낙관주의가 일종의 신앙고백의 수준까지 취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라... 이 부분은 비서구 출신의 심리학자들이 추후 밝혀내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여기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성이다. 낙관주의[7]라도 현실성이 없다면 그것은 망상일 뿐이며, 현실성이 있을 때 개인을 이끄는 강력한 엔진이 된다. 동시에 비관주의라도 현실성이 있다면 그것은 주어진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매사 조심스럽게 대비할 수 있도록 돕지만, 현실성 없는 비관주의[8]는 지각된 현실을 왜곡시키고 혼자만의 고통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미시건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낙관적 생각들》의 기고자 중 하나인 랜돌프 네시(Randolph M. Nesse)는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비관주의는 문젯거리가 아니라 유용한 감정 상태다. 바다로 1마일이나 나간 지점에서 배가 뒤집어졌을 때 해안까지 헤엄쳐 나갈 수 있다고 낙관적 태도를 유지한다면 치명적이다. 허리케인이 다가올 때 열 번 중 아홉 번은 낙관적인 태도를 가져도 괜찮다. 그러다 카트리나 같은 대형 태풍이 몰아친다.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따뜻한 환영을 그 나라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낙관한다면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더 나쁜 쪽으로 바꾸는 대재앙을 일으키게 될 뿐이다...

...거의 언제나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기로 우리가 마음먹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계는 여러 면에서 더 나아질 것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다른 부분에서는 더 나빠질 것이다..."
- 랜돌프 M. 네시

사회 전체를 염세주의, 비관주의, 패배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옳은 태도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부정적인 것 말고 긍정적인 것도 좀 보자는 등의 무조건적인 낙관은 오히려 생존자 편향 내지 SNS에서의 행태만 보고 요즘 세상이 험악하다는 등의 좋았던 옛날 편향이 될 위험도 존재한다.[9] 선인이 없지야 않겠지만 어디서나 그렇듯 악인은 항상 도사리고 있으며 그 수도 결코 적지 않다. 굳이 애써 "인류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무리의 잘못, 실수, 심지어 한계마저 인식하고 느릴지언정 명백히 고쳐 왔던 역사가 있다"고 인류 역사를 운위하며 "인류의 역사에 나쁜 사람이 많아 봤자 중립적이거나 좋은 사람보다 많을 리가 없다"는 낙관론을 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러한 인류 개인 혹은 그 개인이 속한 무리의 과오와 한계를 인식하고 고치기보다 그것을 인식하려는 시도마저 온갖 이유를 들어 부정하면서 나아가 온갖 잔인하고 추잡한 술수로 억압하고 말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동물 역시 인류라는 것 또한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를 판별해서 지나친 낙관 또는 맹목적인 비관 사이에서 적절한 중도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각자의 몫이다.[10]

2.3.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통제소재(locus of control)와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다지 관계는 없다.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는 자신감이나 자괴감을 느끼기 위하는 데에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거나 없다는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은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설명양식(explanatory style)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약간 다르다. 설명양식은 일종의 귀인(attribution)의 차원, 안정성의 차원, 보편성의 차원에서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는 방법이다. 설명양식에도 낙관적인 것이 있고 비관적인 것이 있는데, 이하에서 이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명양식과 분리하여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설명하면, 오히려 무엇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삶의 전반적인 측면에 대해서 확신한다는 쪽에 더 가깝다.

3. 작품 내에서의 모습

3.1. 생활과 윤리

과학기술 윤리를 배울 때 나온다.

4. 관련 문서



[1]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현재를 선호한다.[2] 현재는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고 이것은 미래에도 지속된다고 하면서 최고는 결코 올 수 없다는 것을 비관주의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허무주의이며 관점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낙관주의, 비관주의와는 다르게 옳은 태도가 아니다.[3] 즉 1인칭 관점에서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느낌을 갖고, 실제보다 과장하여 느끼는 경향[4] 3인칭 관점에서 '내 자신'을 해당 사건에서 거리를 어느 정도 둔 중립적 객관적인 관점에서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실제보다 축소하여 느끼는 경향[5] 막연한(비현실적, 순응적 등) 비관주의와 방어적 비관주의가 있는데, 전자가 위험한 상황이나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며 자조적으로 포기하는 개념에 가깝다면, 후자는 위험한 상황이나 현실을 인식하고 그 상황이나 현실을 미리 피하거나 그 상황에 이미 처해있다면 어떻게 해야 그 상황이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적극적으로 시도하려는 개념에 가깝다.[6] 예를 들어 비관주의자들은 실험실 실험에서 자신이 상황을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 빨리 깨닫는 반면, 낙관주의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미신적 행동을 보이는 "통제망상"을 보인다. 비판자들은 이에 대해서 단지 그 상황에 대해 비관주의자들이 빠르게 판단한 결과인지, 아니면 매사 그렇게 빠르게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다고 반박하고 있다.[7] 좋아하는 것을 만능이라고 여기고 싫은 것은 무용론을 펼치는 것 등.[8] 걱정조차 벗어난, 현실성도 없고 근거라 할 만한 것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음모론을 추종하는 등.[9] 각종 청소년 범죄, 가출 문제 또한 SNS가 생기기 전 과거에 훨씬 나빴다. 통계적으로는 요즘에 오히려 탈선을 더 안 하며, 옛날에는 뭉쳐서 집단범죄를 저지르거나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가해자들 마음대로 자신들을 용서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변질된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오프라인의 닫힌 사회가 훨씬 무서울 수도 있다(자세한 내용은 피해자 비난 문서의 피해자다움 문단에 적혀 있다). 집단따돌림이나 자폐증 등의 심리질환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게임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인간승리를 이뤄냈다는 사례도 국내외에서 일부나마 찾아볼 수 있다.[10] 학교/대학/군대/직장생활, 연애결혼, 주거, 취업, 범죄율, 경제, 시민의식, 공정성, 교통 문제, 재능 등에 대한 인터넷 여론과 실제 현황은 다르며 오프라인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여론은 물론, 심지어 통계청, TV 뉴스 같은 공식적 통계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인터넷이나 통계보다) 행복하고 온건하며 희망과 비전, 정이 넘치는 공간이라고 떠들며 인터넷 여론은 실제 여론과는 얼마나 동떨어져 있고, 오프라인에서 힘을 아예 못 쓰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애초에 온라인이나 인터넷 역시 오프라인이라는 현실 세계의 한 일면을 반영하는 곳이다. SNS에서 막말을 들이붓는 게 SNS 때문인 것만이 아니고, 오프라인에서 상대에게 차마 못할 말을 온라인의 익명성을 빌려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며 오프라인에서는 마치 그러지 않는다는 듯이 시치미 뚝 떼고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인간 중 일부의 위선적,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11] 극단적인 낙관주의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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