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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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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당시 반응
3.1. 조선인들의 반응3.2. 일본인들의 반응
4. 유전적 유사성5. 인터넷 용어6. 비슷한 사례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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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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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일체 포스터[1][2]
위의 문구는 協力一致 世界の優者(협력 일치 세계의 우승자)

내선일체()는 일본 제국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내놓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이자 일제강점기의 표어다. 자매품으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가 있다. "내지(內地)와 조선[3]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비슷한 예로는 1930년대일만일체[4]청나라에서 나온 만한일체[5]도 있으며 괴뢰 국가 만주국을 만들면서 내세운 오족협화(五族協和)[6]도 마찬가지다.

2. 설명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일본인 중의 한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말은 전적으로 사견임을 먼저 알아주십시요.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일본정책의 결과가 어찌될 것인가를 나에게 개인적으로 묻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목적을 알려드리릴 수는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몇 세대가 걸리겠지만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일본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고 일본의 생활 습속대로 생활할 것이고 우리의 일부분을 이룰것입니다. 식민지 통치에는 오직 두 가지의 길이 있을뿐입니다. 하나는 상대 민족을 외국인으로 그대로 간주한 채로 통치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조국인 영국은 인도에서 이와같은 방법으로 통치했으며 결국 이와같은 제국은 오래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인도는 당신들의 지배를 벗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두번째 방법은 상대 민족을 동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을 취할 작정입니다. 우리는 한민족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우리의 제도를 이곳에 이식함으로써 그들을 우리와 일체가 되도록 만들 것입니다.[7]

이것이 곧 일본의 자비심 많은 계획이다. 한국의 국토를 병탄하고, 모든 산업을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토착민들을 벌목꾼이나 물지게꾼으로 만들어서 정복자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려는 것은 가장 일반적으로 취해지는, 그러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한국인은 일본인과는 수준이 전적으로 다른 나약한 겁장이라고 그 일본인은 생각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을 형편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생각속에서 한국인을 다루고 있다.
-프레더릭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일제의 동화정책은 1910년까지 논의와 조사의 단계, 1910~19년까지 무 력을 동원하여 일체화를 시도한 단계, 1920~30년까지 문화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일본화의 가능성을 탐색한 단계, 1930년 이후 황민화를 강요한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8] 일제는 日鮮同祖論에 근거하여 합방 이전에 문화와 관습을 조사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군부가 강화되어 합방을 실행 할 단계에서는 異化政策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이 내지에 동화될 때까지 제국과는 다른 통치를 할 필요가 있다”라는 寺內총독의 표현처럼 동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잠정적인 조처였다. 3.1운동 후 일본내에서 총독부의 통치와 군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또 동화론자인 原敬과 그의 신임이 두터 운 齋藤實이 수상과 총독으로 부임하자 동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朝 神社의 건설 등 포교정책이 추진되고, 식민시정자료에 제공할 무속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조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 민상사에 대해서는 일본의 법을 적용할 것을 전제로 하여 관습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화정책은 지방 행정에 조선인의 참여 등 친일파를 양성하는 등 제한적인 것이었다.[9]

본격적으로 이 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6년 미나미 지로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다. 다만, 내선일체라는 단어를 정말로 먼저 쓰기 시작한 건, 전설적인 친일파였던 선우순이다. 1927년에 이미 그 단어를 만들었다. 사실상 일제강점기 말기에 민족말살정책의 기본적인 이념으로 작용한 개념으로 내선일체의 개념에 따라 천황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하고 신사참배를 의무화했으며 창씨개명을 추진했다.

一成은 자치를 허용하는 식민지가 지배국에 협조적임을 간파하고 또 조선의 파탄은 일본에도 위협이 됨을 인식하여 농촌진흥운동을 펼쳐 이를 바탕으로 동화정책을 추진하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은 식민지배 정책에 일대전환을 가져왔다. 병력자원이 부족한 일제는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적에게 무기를 주는 꼴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동화된 “皇國臣民”이라야 가능하였다. 만주사변 후 조선총독에 취임한 南郞은 "천황의 행차와 징병제 의 실시”를 그의 통치목표로 삼았다. 황국신민화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만, 중일전쟁의 개전을 전후로 한 “육군특별지원병령(1938. 2. 공포), 조선교육령의 개정(1938. 3), 창씨개명 (1940. 2. 시행)"이 세 기둥이었다[10]

징병제의 준비로 마련된 지원병제는 황국신민화의 전초사업이었다. 훈련을 통하여 일상생활에까지 일본의 정신을 침투시켜 민족의식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1938년 조선교육령의 개정은 “내선공학의 일원적 통제”를 실현하여, 완전 한 일본인화를 위한 획일적 교육이 실시되었다. 조선군의 요구와 南郞 총독 의 승인 아래 그의 심복인 군국주의자 鹽原時三郞의 주도로 조선교육령이 개 정되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인재의 교육, 즉 國體 徵明,內鮮一體,忍苦鍛鍊의 교육방침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육령 개 정의 요점은 “조선인이 일본국민이라는 자각을 철저하게 갖도록 하는 것”[11]으로 교육목표는 “국체를 바탕으로 한 가족적·국가사회주의적 사회관·인생관 을 교육하는 것”이다.[12]

“내선일체” 정책과 지원병제가 성과를 거두어 상당한 정도로 황민화가 완성 되었다고 본 일제는 1942년 5월에 1944년부터 조선에 징병제와 그 반대급 부로 의무교육(1946 실시예정)을 실시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짧은 기간동 안 황국신민을 양성해야 했기 때문에 총독부는 政務總監을 위원장으로 하는 “징병제도시행준비위원회”를 설치하고, “호적정비, 징병에 대한 계발·선전, 조선인의 鍊成, 국어의 보급” 등 4개 항목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물론 총독부의 관료조차도 시기상조로 여기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인의 자발적 동원을 끌어내기 위해 내선일체에 內鮮의 해소와 운명공동체라는 이중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로써 황민인 조선인은 大東亞榮圈에서 위상이 강화되며 또 징병제는 황민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징병제는 의무가 아니므로 대칭적인 권리가 없다고 하여 참정권의 주장을 봉쇄 하였다. 내선일체에 대해 조선인은 차별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동조하였고, 적극적 내선일체론자인 永燮은 조선어 폐지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조선인의 입장을 수용할 수 없었고, 민도의 차이를 이유로 여전히 차별을 인정하였고 나아가 차별이야말로 “一視同仁"의 정신에 합당 하다고 보았다.[13] 민족의식이 말살되어 황국신민으로 된 조선인은 여전히 일본내에서 기껏해야 2등 신민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끊임없이 의심하며 차별대우를 하였다. 황국신민화가 강하면 강할수록 차별은 더욱 강고해졌고, 이에 따라 민족의식은 더욱 굳건해져 조선인의 저항이 내면화·일상화되어갔다. 이는“이중인격을 통한 저항"이었다.

일제의 식민정책은 초기에는 민족고유성을 존중하는 異政策을 추진하였으나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동화론으로 전개되었다. 동화론은 조선인을 2등국민으로 차별을 전제로 하는 정책이었다. “一視同仁”, “內鮮 痘 "등의 표어는 결국 조선인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개량시켜 식민지 수탈을 원활히 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였다. 내선일체가 강화되면 될수록 민족차별은 심화되었고, 일본제국주의의 특수성이 강하게 부각되었다.[14]

조선과 일본은 하나이므로 조선인도 (권리는 없지만)[15]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 다해야 한다."는 식. 한마디로 수탈과 동화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용도였다. 내선일체라면서 정작 총선 참정권은 안 주고, 조선에서의 고등교육을 장려하긴 커녕 억제했다는 데서 그 이율배반성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인적자원 부족 문제 해결 의도도 있었는데, 그 근거가 의무교육 실시이다. 일단 당시 일본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역사상 원래 고대 일본에는 지역별로 구어(口語)가 있었는데,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중앙의 언어가 바른 말이며, 지방의 언어는 잘못된 말이다"라고 취급되어 서적 등에서 지방 구어가 급격하게 사라졌지만, 센고쿠 시대에 중앙권력이 무너지면서, 지방마다 다른 구어를 용인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각 지방마다 구어는 달라도 문어는 어느 지방에 가도 동일하기에, 각 지방 방언들의 지위는 동등했다. 그러나 에도 시대가 끝나 일본이 근대화로 가는 중에 "언문일치운동"[16]가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수도인 도쿄(에도)의 방언(에도벤)이 공적 언어(문어)의 지위를 가져가 현재의 일본어가 되었다. 그리고 "중앙의 언어가 바른말이며, 지방의 언어는 잘못된 사용법이다"라는 편견이 다시 발생하였고, 이후에 각 지방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거나 군대에서 명령전달이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방언박멸운동"이 발생하였고, 에도벤과 거리가 먼 방언부터 표적이 되어 말살의 대상이 된다.[17] 그 중 하나로 한국어가 존재한 것이 배경에 있다. 이 운동의 논리는 "국가 = 민족"이라는 사관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같은 계열의 언어라는 것만 증명되면, "같은 언어(같은 언어의 방언)다" = "같은 언어를 쓰는 거니까 같은 나라다"라는 결론이 나는 논리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운동에 계기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1873년부터 일본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의 외국인 교수로 근무한 영국인 바실 홀 체임벌린[18]일본어의 단어와 류큐어의 단어를 하나하나 분석한 결과, 류큐어가 고대 일본어부터 상당히 초기에 분파된 같은 조상의 언어라는 걸 증명해버렸다.[19] 에도 시대 말기부터 류큐어와 일본어가 비슷함이 거론되었지만, 그래도 다른 언어라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실은 오래 전에 생이별한 형제였다"는 막장 드라마출생의 비밀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의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한글 신문들도 폐간을 유도했다. 또한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강제 징용징병, 성노예 착취 등도 이루어졌다.

사실 경술국치 이후, 조선은 일본에 강제병합되어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조선인들도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 열도만을 가리켜 내지라 이르고 한반도는 외지라고 차별하며 조선인들은 '2등 신민'이라 부르고 일본 본토의 일본인(내지인)들과 동등한 일본 신민[20]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렇게 동등한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으면서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신민으로서 의무만 강조하며 권리와 대우는 해주지 않는 현상이 더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식의 구분전략은 일본뿐만 아니라, 당시 제국주의 시기의 유럽 열강들에서도 이름은 달라도 비슷하게 추구하고 있던 전략의 일종이었다. 식민지를 폭력으로 일방적으로 다스리는 전략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자, 영국 등의 대표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들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독립운동이 거센 지역들을 중심으로 일방적인 수탈대상이 아닌 식민지인들을 본국인과 구별하는 2등국민으로 재편성하는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식민지인들 중에서도 뛰어난 엘리트 지식인들은 본국 유학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지식인으로 키워내곤 하였다.[21]
예를 들어 기타와[22] 도리이는[23] 일본민족의 혼합론을 주장하면서 국가 내부의 지역적 차이와 주변국가들과의 차이를 통합하는 '탈영토주의'를 그려냈다. 물론 기타의 혼합민족론은 일본내부에 존재하는 이민족들의 차이성을 소거하는 동화이론에 바탕을 두고 피식민지 민족들의 차이를 메우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도리이 또한 일본의 주변 지역을 현지조사하면서 일본민족의 혼종성을 증명해냈지만 그 혼종의 중심을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식민주의 이론을 구축했다.
▲ 전성곤, <내적 오리엔탈리즘 그 비판적 검토: 근대 일본의 '식민' 담론들>, 소명출판, 6p
이러한 일선동조론에 입각한 학자들은 이후 1910년을 즈음해서는 강점을 ‘복고’ 내지 ‘태고로의 복귀’라고 강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1919년 3·1 운동과 같은 제국의 위기 상황이 전개될 당시에도 제국의 팽창을 주장·옹호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정하였다. 대표적인 일선동조론자라고 할 수 있는 키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3·1 운동 직후인 1921년, 조선과 일본만이 조선민족의 기원을 만주에서 찾으며 민족적으로 만주까지를 하나의 영역으로 설정하며 제국의 팽창을 설파하기도 하였으며, 강점을 전후하여 수차례 조선을 직접 답사하며 인종과 무속을 조사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3·1 운동이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것이었다면서 조선과 일본은 원래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한일병합이 민족자결임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일선동조론은 학문적 영역을 벗어나 일본 제국의 침략을 옹호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정하는 논의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식민사관: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었고 타율적이다》#
반도는 일본에 합병되었고, 그 땅의 경영과 백성에 대한 보호와 유도가 일본 국민의 임무가 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반도의 과거 및 현재 사정에 관한 확실하고 정밀한 지식이 더욱 간절해졌다. 동시에 정치적 위치의 변천에 따라 종래의 비각에 다발로 보관되어 있던 저들 나라의 도서도 점차 세상에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한반도에 관한 학술적 연구도 지금부터 점차 활발해질 것이다. 특히 사적의 기록에 의지하는 일이 많은 역사 연구는 이제 비로소 실마리를 푸는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업이 지향하는 바는,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학계에 미력을 다함으로써 착실한 학술적 연구의 기운을 촉진하는 데 일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의 실질적 경영에 대하여 학술상으로 다소의 참고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철 소속 만선역사지리조사실의 <조선 역사 지리(1913)> 서문 중에서. 이들의 연구는 근대적 한국사 연구의 시초가 되었으며, 식민사학이라는 악영향을 뿌리내렸다. 저자 쓰다 소키치가 서문에 밝힌 바와 같이 이들의 연구는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라는 정치적 상황에 조력하기 위한 목적을 강하게 띄고 있다.

이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일선동조론이 있다. 이는 위의 내선일체를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인일본인은 같은 조상을 가졌으며, 그래서 일제의 조선 강점은 그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 그리하여 일제는 단군왕검을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의 동생으로 격하시키고 합치려고 하는 둥 한국의 국조 자체를 희미하게 만들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였다. [24] 이 주장의 핵심은 일본인의 조상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 정착한 기마민족이라는 것. 그리고 이 주장을 학문적으로 합리화하려고 한 자가 바로 변절자 최남선이다. 소위 "불함문화론"이 그것이다. 다만, 세부적인 정황이나 시기는 이견이 있지만 일본인이 한반도 지역의 농경민족, 드물게는 기마민족이 열도로 이주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대체로 유력한 학설들의 공통점이긴 하다.[25]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시 일본 제국에겐 (사회 하층의 서민)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어떤 민족이든 똑같이 자신들의 노예이자 착취대상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 지도층이 전쟁 말기에 일반 병사들을 카미카제 등으로 써먹고, 미군이 일본에 쳐들어오면 '1억 총옥쇄를 하자' 같은 망언이나 내뱉은 걸 보면... 실제 1910년 한국병합을 강행하기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조선인, 중국인 같은 구 식민지 출신자 뿐만 아니라 대일본제국 신민, 즉 일본 국민까지도 가혹한 억압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근대국가가 되기는 했지만, '국익'이라 불리면서도 실은 일부 사람의 권익에 지나지 않는 것을 지키기 위해, 민중을 '영토'와 마찬가지로 '영민(領民)'으로서 국가의 소유물로 만들고 소비하다가 내다 버렸다.[26][27] 인간에게 정신교육의 영향이 얼마나 크고 오래가는지를 알수 있는게 이 교육이 일본에서는 아직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으로 일본인들은 지금도 다이쇼 로망을 좋았던 시기로 기억하고 계급사회를 그리워한다. 사실 조금만 머리가 굴러가도 알수 있는것이 이러한 사회구조야말로 하급층 전체가 등골이 휘어서 상류층을 먹여살리는 것이 실체라는것이 현대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는 지식이지만 여전히 일본은 그러한 계급사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28] 그러한 사회가 되었을때 자신이 상류층에 해당할거라 꿈을 가지지만 현실은 시궁창. 일본은 이러한 과거 정신교육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서 유난히 하류층이 계급사회를 선호한다.[29] 착취대상이 착취당하기를 선호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는 내선일체로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던것이 요컨데 일본제국민과 동일하게 대우하는건 사실인데 일본제국 지배층이 노예와 동의어라 생각한 일본내 최하층의 신민이 되라는 의미이다.

재미있는 점은 본 문서 하단에도 있듯 그 착취당하는 것이 권리랍시고 일본의 하류층은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느꼈다는 사실이다. 부담이 일부 분배되는데도 마치 자신들의 권리를 빼았기는 것처럼 받아들였고 대부분의 일본 하류층은 내선일체에 반대였다. 여러모로 정신교육이 생활에까지 뿌리깊게 침투하면 무서워지는 부분을 엿볼수있다.

일제강점기 나온 영화 수업료(1940)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교사가 일본어로 학교에서 수업하는 내용과 조선과 일본 지도를 같이 칠판에 그리는 내용이 있다. 수업료(1940)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일본어, 밖에서는 한국어를 쓴다.

드물긴 하지만 진짜 자발적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뭉쳐 총독부에 항의하는, 다른 의미의 내선일체 사례가 있긴 했다. 주로 도청 이전 문제[30]혐오시설 설치 등의 문제에서 단결하곤 했는데[31], 이권 앞에선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도 없었던 셈이다.

일제말기 국책의 가장 핵심적 과제는 민족동화정책이었다. 이 민족동화정책은 이미 191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1930년대에 이르러 보다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일제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내선일체’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인을 일본 내지인과 완전히 동화시켜 조선을 전쟁의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결과 1936년 8월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온갖 법령과 관제조직을 통하여 이전까지 강조해 오던 ‘내선융화’에서 한 걸음 나아가 ‘내선일체’를 주창하기에 이른다. 특히 ‘내선일체’의 실현을 위한 핵심적이고 구체적인 과제는 창씨개명과 내선결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나미(南)는 ‘내선일체’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념에서 비로소 내선일체가 가능한 것이다. 즉 내선일체를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혹은 동양의 현상세계의 환경으로부터 논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오직 그 귀착점은 반드시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내선이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중략) - 내가 늘 역설하는 것은 ‘내선일체’는 상호 손을 잡거나 모양만 융합하는 것처럼 그런 미온적인 것이 아니다. 손을 잡은 자는 놓으면 또다시 갈라진다. 물과 기름도 억지로 혼합하면 융합된 형태가 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모양도 마음도 피도 살도 모두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鈴木裕子, '從軍慰安婦․內鮮結婚', 未來社, 1992, 84쪽 재인용

여기에서 미나미(南次郞)가 ‘내선일체’란 ‘상호 손을 잡거나 모양만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모양도 마음도 피도 살도 모두가 일체’가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을 표면적(모양)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창씨개명이라면, ‘피도 살도’ 일체가 되게 하려는 것이 내선결혼이다. 따라서 ‘내선결혼’을 통하여 민족고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혼(魂)의 일체, 피(血)의 일체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근거로 일제는 터무니없는 ‘동조동근론’을 내세워 내선일체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옛날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미나미(南)의 ‘내선일체’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1939년 11월 <氏設定에 관한 제령(19호)>이 공포되고 <조선민사령>의 일부가 개정되면서 사법 영역에서 내선일체의 구현이 완성되었다고 자화자찬을 했다.[32] 그러나 일제의 ‘내선일체’정책이란 조선인으로부터 황민화에의 내발성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조선인을 철저하게 차별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미나미 총독이 ‘내선의 무차별 평등’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어디까지나 이민족임을 엄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들 내지인은 민도(民度) 조선인을 계몽하고 인도하여 내지인과 조선인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는 있지만 결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는 차별의식을 내포[33]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반하여 일부 조선의 지식인들은 미나미 총독의 ‘무차별 평등’을 믿고 내선일체야말로 ‘차별로부터 탈출’[34]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내선일체를 적극 지지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다.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로 ‘민도의 상위’를 일관되게 강조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황민화의 정도’를 완벽하게 함으로써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을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가장 앞장선 사람이 현영섭(玄永燮)이었다. 그는 내선일체론의 3대서[35]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길(朝鮮人の進むべき道)'에서 “조선인은 완전히 일본민족이 될 운명에 있다. 그것은 우리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길”[36]이라고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멸망에 빠트린 고유의 모든 것, 이를테면 조선어, 조선옷, 조선의 가옥, 형식적 조상숭배, 조선역사 등을 청산하고 정신적으로 일본인적 감정에 침윤될 것을 주장하고 실제로 총독과의 면담에서 내선일체의 실현을 위하여 ‘조선어 사용의 전폐’를 건의했다. 이러한 현영섭을 일본인조차 ‘일본에 혼을 팔아버린 진정한 매국노’[37]라고 조소했지만 이러한 극단적 사고의 밑바닥에는 ‘차별로부터 탈출’하여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차별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차별의 주체가 되고자 했던 아이러니

이처럼 일제의 ‘차별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내선일체’ 정책을 실천하기 위하여 1940년 1월에 <내선일체사>가 설립되고 잡지 '내선일체'를 간행했는데, 그 창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내선일체를 구현하고, 이를 충실하게 강화하기 위하여 정신적 국민 결합(거국일체)을 철저하게 도모하기 위한 국민운동을 기도하기위한 목적으로 설립하였으며, 그 방법으로는 ‘내선일체’라는 월간소책자를 간행하여 내선일체의 실천화를 창도하고 아울러 내선결혼을 촉진하는 외에 강연회, 좌담회, 전람회, 영화회 등을 통하여 선전, 알선한다.
▲「내선일체 실천사 창립취지서」, '내선일체', 창간호, 1940년 1월, 19쪽.

잡지 '내선일체'는 실질적으로 내선일체를 실천하기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창씨개명과 함께 내선결혼을 중요한 사업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창씨 상담부와 내선결혼 상담부를 두어 운영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에서는 내선일체의 강화를 위해 12항목[38]에 이르는 <시설계획>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황국신민화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그 가운데 내선결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으며, 내선결혼을 한 부부에게는 국민총력 조선연맹 총제를 겸한 총독 미나미의 이름으로 표창장과 기념품을 증정하여 내선결혼을 독려했다. 이처럼 일제의 황민화정책이 강화되면서 거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풍조에 편승하여 내선결혼이야말로 진정한 황국신민이 되는 길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김용제는 내선일체란 내선인의 생활의식과 형체가 동화, 동체가 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황국신민화를 실천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했다. 그는 내선인 사이에는 언어, 풍속, 습관, 문화, 전통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은 가정이기 때문에 내선일체운동은 가정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내선결혼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내선결혼을 보급하기 위한 방안으로 네 가지 조건[39]을 제시하면서 “내선일체의 완전체는 내선결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김용제의 주장은 조선민족을 ‘피’의 단계에서부터 일본민족으로 동화시킴으로써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기도[40]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내선결혼이란 ‘피’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말살하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강요에 따라 내선결혼은 점차 증가하는추세를 보여 내선결혼이 강요되기 이전인 1937년에 이미 1,206쌍이나 되었고, 본격적으로 내선결혼이 실시되던 1941년에는 1,416쌍으로 증가하여 1941년 현재 총 5,747쌍[41]내선결혼을 했다.

3. 당시 반응

3.1. 조선인들의 반응

그 사람들 역시, 정신 얼 빠진 사람들이에요. 그 일본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을 말이죠. 자기네 민족이라고. 내선일체라고. 저희들은 내고. 일본이라고. 우리는 조선이라고 선. 내선일체랍니다. 한몸뚱이랍니다. 이게 되는 이야깁니까? 흐름이 다른데. 그래가지고 일본 말을 해라, 일본 말로 이름을 고쳐라. 터무니 없는 짓 했죠. 그 사람들이.
1995년 가요무대 특집에서 고운봉(1920~2001)의 발언.

조선인들은 극히 일부 친일파들을 빼면 당연히 믿지 않았다. 심지어 대다수 친일파들조차 불신하며 헛소리 취급하는 개념이었다. 당장 일본제국에서 조선인 차별이 만연하는 현실에서[42] 이런 이론상 개념은 별 실효성이 없었다. 친일파로 변절하여 민족개조론을 주입시키려 든 춘원 이광수조차도 반민특위에서, "나는 일본이 아니라 조선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고 비겁하다면 비겁한 변명을 했을 정도다.[43] 게다가 당시에 일제의 탄압이 워낙 악랄해서 독립은 당장 불가능할 것 같다는 인식이 조선인들 사이에 생기자, '지금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조선도 영국스코틀랜드, 아일랜드처럼 일본과 동등한 대우를 누리게 되고, 언젠가는 자치를 맡기거나 독립을 시켜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소극적 친일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모두 순진한 생각이었음이 내선일체가 진행되며 밝혀진 셈이 되었다. 게다가 일본은 이런 생각을 유도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했다. 자치론이 그 좋은 예. 물론 일본은 자치를 허락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화장실 낙서 이런 사례들을 보면 많은 평범한 조선인들도 독립 의지는 아닐지라도 일본의 동화정책에 대한 반감은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3.2. 일본인들의 반응

의외로 일본인 중에도 내선일체 정책에 큰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당시 일본인은 자신들이 특권을 가진 민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어 자신들과 동등해지고 통혼 혼혈하여 순수한 일본 민족의 혈통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 하는 이들도 많았다.[44] 애초에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은 자기들끼리 일본인 거주지를 형성하여 조선인과 최대한 거리를 두며 살아서 서로 접점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접점이 더 많았다.

사실 당시 조선, 대만, 사할린, 만주로 이주한 일본인은 공무 혹은 사업 목적이 아닌 이상 일본열도에서 먹고 살기 어려운 빈곤층이 많았다.[45] 이미 일본도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는 일이 늘어났고, 이들이 도시의 하층민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은 당연했다. 이들의 자존심의 근거는 단지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점뿐이었다. 식민지로 이주한 일본인은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얻는 우월감과 조그만 경제적 특권, 알량한 정치적 특권에 매우 극심하게 집착하였다.[46]

만주국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만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특별대우를 받고 자라난 일부 일본인들은, 정작 본국인 일본에선 하류층 일본인들이 막노동을 하며 가난하게 사는 걸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주국이나 식민지에서 나가야 했던 일본인들은 대다수가 일본에서 뼈저리게 고생하고 살아야 해서[47], 세월이 지나 늙어버린 이들이 과거에 우대받고 뻐기며 살던 곳으로 와서 그 세월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다.[48] 때문에 본토에서 비슷하게 착취당했던 경험을 가진 일본 노인들이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적 아픔에 공감하며 유화책을 지지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식민지에서 착취자로 살다가 패전 이후 모든 기반을 잃고 본토로 쫓겨온 사람들은 주변국들이 되려 '피해자 행세'를 한다며 역사왜곡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처럼 일본제국 내의 모순적인 사회상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니 당연히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같은 그럴듯한 슬로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식민지 조선인을 차별하여 자신들의 자존심을 충족시키려는 야욕과 그들을 착취해서 부유해지고자[49] 하는 욕망만 있었다. 심지어 통감 정치 당시 조선에서 발행한 일본어 잡지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조선인을 너무 우대한다."라는 조선인으로선 황당해 할 비판을 싣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조선 이주 일본인이 되려 본토 거주 일본인보다 우월 의식이 훨씬 컸고, '차라리 일본에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여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도 있었다.[50] 물론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일본 사회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일제가 선전하던 내선일체의 위선을 보여주는 예시로, 이봉창 의사 역시 일본인이 되고 싶어 창씨개명까지 하고 일본어도 매우 능숙하게 잘했음에도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이라고 거부당한 바 있고, 이것이 의거로 이어졌다. 순종적이었던 식민지인마저 독립운동가로 만들어버리는 내선일체 정책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케이스. 김시창이 쓴 <빛 속으로>를 보면, 당시 내선일체 슬로건의 모순과 무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시창은 이 책을 써서 1940년 아쿠다가와상 후보까지 올랐으나, 이율배반 속에서 갈등하다 중공군, 북한군을 거쳐 1950년 6.25 전쟁 중 북으로 퇴각하다가 강원도 원주시에서 병사했다.

당시 일제 지도층에게는 내선일체가 통치에 유리하므로 추진할 동기가 있었던 정책이었지만, 하층 일본인에게는 동화정책과 민족말살의 과정을 거쳐서 조선인들이 자신과 동등해짐으로서 일본인이라는 유일한 특권이 사라진다는 것에 매우 불만이 컸다. 이들은 내선일체 정책이란 명목으로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고 일본어를 쓰면서 토종 일본인으로 둔갑하여 일본인과 맞먹으려 드는 정책이라고 보아 불쾌하게 여겼다.[51]

이렇게 내선일체는 일본 일반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할 수 없었다. 다만 전쟁이 격화하여 일본의 인력 부족이 심해지자 조선에서 더 적극적으로 인력을 수탈할 필요가 커진 데다가, 일본 바로 옆에 있는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었고, 장기적인 통치를 위한 다른 유력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추진한 정책이다.

애초에 흡수하고 동화를 추구한다고 차별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다. 아이누인에게는 아예 별개의 민족이란 인식도 갖지 않고, 사람 취급도 안하면서 차별과 강제동화정책을 계속 병행했었다.[52]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어를 쓰건 말건, 현대의 자이니치가 차별과 헤이트의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4. 유전적 유사성

정치적 선전 목적을 제외하고, 인류유전학적으로 한국인일본인이 가장 유사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학자는 없다.[53] 각종 게놈 분석에서 서로 가장 가까운 민족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본토 일본인은 아이누인보다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훨씬 가깝다. 그리고 조몬인의 직계 후손으로 생각되는 아이누인이 본토 일본인보다 오히려 류큐인과 더 가깝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일본에 뒤늦게 편입된 지역이 홋카이도오키나와라는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딱 맞아떨어진다.[54] 애초에 한국인과 일본인이 유전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게,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이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87~96.7%를 차지한다. 도래인이 사실상 한반도에서 건너간 집단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다.[55][56]

덧붙여서, 실제 역사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길고 복잡하다. 고대 한국과 일본 간의 관계, 백제가 왜국과 동맹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전쟁을 같이한 건 유명하고, 멸망 이후 백제인들이 왜국에 정착하게 된 것 역시 훗날 내선일체 명분 중 하나로 쓰여도 이상하지 않다. 백제인들이 일본이란 명칭을 사용하다 보니 국명이 왜에서 일본으로 변경되었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

일례로 세키네 히데유키 동양어문학과 교수는 "일본이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주장했던 학자[57]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억지로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58] 즉, 일본 정부는 제국시절 한국을 이용해 먹으려고 한일간의 유전적 유사성을 내세우고 정작 쓸모가 없어지자 한국을 차별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5. 인터넷 용어

한국일본이 쌍으로 " 똑같은 " 사고를 쳤을 때 비꼬는 뜻으로 쓰인다. 일본 같은 경우 한국과 일본이 같이 저지른 병크가 너무나 한심할 때는 아예 한 단계 업그레이드로 동조선(히가시조센), 서일본(니시니혼) 등의 개드립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동조선 등의 조선에 동서남북을 붙여 비꼬는 용어의 기원은 현재의 북한이다. 북한은 일본에서 북조선(北朝鮮)으로 흔히 불린다. 북조선과 다를 바 없다고 하여 남조선(한국), 서조선(중국), 동조선(일본) 등인 것이다. 참고로 이 x조선 혹은 x일본 표현은 한국, 일본 둘 다 쓰고있다.

여기서 중국(+ 동남아)까지 비슷한 사고를 치면 전부 묶어서 대동아공영권이라고 부른다.

6. 비슷한 사례

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동화정책의 명분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는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의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우며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신라인으로 통합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고 고구려 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을 철저히 진압하였다. 이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진압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고려도 후삼국 통일 이후 삼한일통을 내세웠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는 1919년부터 문관 총독이 부임한 이래 내대융합(內臺融合)을 내세우며 대만인에 대한 차별적 조치들을 철폐하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했다. 물론 조선과 만주가 그랬듯 그것이 식민지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이 전혀 아니었으며 류큐도 마찬가지로 일유동조론으로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원래 일본 본토와는 다른 왕조를 구성하고 별개의 나라 취급 받았던 류큐는 당연히 독자적인 구별 의식이 있었고 일본에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편입된 후에도 이런 의식이 계속 이어졌다.

나치 독일이 같은 아리아인들은 독일인과 동등하게 대하겠다고 외쳤지만 정작 오스트리아합병하고 네덜란드플랑드르, 덴마크, 노르웨이 등지를 점령하자 약속과 다르게 차별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인은 (민족적 의미로) 같은 독일인이라 좀 덜했지만[59] 다른 게르만계 민족들은 차별이 잦았다.

러시아가 중심이 된 범슬라브주의, 아랍의 범아랍주의(아랍 내셔널리즘) 역시 여러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스알제리에서 같은 동화정책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유럽계 백인들을 이주시키고, 학교에서 알제리사아랍어가 아닌 프랑스사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등 알제리의 정체성을 없애고 프랑스와 완전히 같은 곳으로 바꾸려 했으나. 알제리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기에 알제리인들에게서 프랑스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컸다. 결국 알제리인들이 대대적인 독립 전쟁을 일으켰고 프랑스가 알제리 전쟁에서 패배하고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모두 허사가 되었다.

튀르키예 역시 범투란주의를 내세우면서 한때 이란계 쿠르드인들을 산악 튀르키예인이라 개드립치며 강제 동화정책을 자행한 적이 있었다. 이 범투란주의에는 한국과 일본이 포함되기도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말 또한 매우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동북공정 등을 통해 소수민족에 대한 흡수 정책을 합리화하고 있다. 티베트, 위구르, 내몽골에서 몽골어 강제동화정책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현재진행형으로 강제동화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서남공정, 동북공정 등을 통해 전통적으로 한족의 영역이 아닌 곳에 대한 역사 왜곡을 자행하거나 소수민족들을 위해 설치한 자치구에 자치권을 무시하고 친중 성향 인사를 낙하산으로 앉히는 등[60]으로 소수민족들의 자립을 방해하는 사례가 있다. 자세한 것은 중화민족 문서로.[61]

대한제국일본 제국의 입지가 바뀐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대체역사 모드 THE LAST EMPIRE에선 이강의 대한제국이 '일본의 시작이 되는 야마토 정권은 도래인에 의해 세워졌고 도래인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이들이니 한국(내지)과 일본(대화)는 하나'라는 '내화일체(內和一體)'를 내세운다.

7. 관련 문서


[1] '内' 자가 적힌 일본인을 훨씬 크게 그려 놓고 주도적인 입장으로 묘사했다. 반면 '鮮' 자가 적힌 조선인은 왜소하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다.[2] 광진구에서 해당 포스터를 연상케하는 술집 디자인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3]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을 한 글자로 줄여 부를 때 朝가 아닌 鮮을 썼다. 지금의 북조선을 朝로 줄이는 것과는 대조된다.[4] 일본만주는 한 몸[5] 만주족한족은 한 몸.[6] 일본민족, 조선민족, 한(漢)족, 만주족, 몽골족의 협력(어쩔 때는 만주에 거주하던 러시아인을 넣기도 한다.) 당연히 실제로는 일본인만 대접받았고 나머지는...중화민국이 내세웠던 오족공화(五族共和 - 한족, 만주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를 따라한 것.[7]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은 인도보다 2년 일찍, 그리고 같은 8월 15일에 독립한다.[8] 김운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 1998[9] 최석영, '일제의 동화이데올로기의 창출', 1997[10] 宮節저/ 李熒娘 역, 「朝鮮民衆과 “皇民化”政策』(일조각, 1997), 107면.[11] 예컨대 朝鮮小學校의 취지는 일본의 그것에 “충량한 황국신민을 육성하는데 힘써야 한다"가 덧붙혀져 있으며, 중학교규정, 고등여학교규정도 마찬가지이다[12] 宮節, 앞의 역서, 31~5면, 114~8면.[13] 宮田節子, 앞의 역서, 136∼8면, 166∼177면[14] 宮田節子, 「朝鮮民衆과 “皇民化”政策』(1997), 56~57면[15] 한국과 일본 극우에서는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일본이 조선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접했다는 근거로 내세우지만, 실제로 권리와 의무에서 많은 차별이 있었다. 구체적 예시로, 한반도 거주자에겐 참정권이 없었다. 정확하겐 총선 참정권이 없었고, 문화통치기 이후 지선 참정권은 있었다. 물론 그것도 보통선거는 아니었지만.[16] 언어와 문자를 일치하게 하자.[17] 도호쿠벤, 류큐어, 아이누어 등등.[18] <조선 서해 탐사기>의 작가의 딸의 아들[19] 단, 일본어의 일개 방언 정도가 아니라, 영어독일어보다 동일성이 먼, 독립된 별개 언어로서의 류큐어로서의 분파라는 것.[20] 국민은 일제가 패망한 후에 제정된 신헌법에서 미군정 초안의 인민을 우격다짐으로 바꿔 제정한 거고, 구헌법에서 일본인은 신민이었다.[21] 아이러니한 건, 이후 이렇게 본국 유학을 마친 식민지 엘리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는 점이다.[22] 일본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를 의미.[23] 일본 역사학자 도리이 류조를 의미.[24] 일제의 한국민족종교 말살책 . 윤이흠 박사 참조[25]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제대로 된 학계에선 이 이주가 어디까지나 고대에 잠시 존재했던 혈연적인 연관 관계에 불과하며, 한국사와 일본사의 독자성과는 무관한 별개의 요소로 본다. 이는 영국인의 주요 민족인 앵글로색슨족독일 니더작센에서 건너왔다고 영국이나 독일이 어느 한쪽에 종속된다는 식의 개드립을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26]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지음, 후지이 다케시 옮김, 301쪽) 출판사 서평 중 일부 발췌.[27] 당장에 관동군만 해도 만주의 일본인들을 지키거나 피난시키기는 커녕 내다버리고 도주하거나, 기차로 피신하려고 온 일본인 피난민들에게 총을 쏘아서 학살하여 쫓아낸다음 자신들이 기차를 타고 도주하는 악행을 저지른것에서 드러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드러나는데 같은 일본인인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참전을 강요하며 주민들을 살해하고 여성들을 겁탈하는 악행을 저질렀다.[28] 과거의 지배층들을 영웅시하고 미화하는데 당연하지만 노동층이 죽도록 일해서 세금으로 그러한 상류층을 먹여살려야 하는것이 현실이다[29] 상류층이 그러한 계급구조를 선호하는건 전세계 공통이지만 하류층이 선호하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이다. 당연하게도 하류층에게는 이익이 1도 없기 때문[30] 1925년에 경상남도청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할 때 조선인과 일본인 지역 유지들이 힘을 합쳐 시위운동을 했지만, 결국 좌절되었다.#[31] 아현동 지역에 대표적인 혐오시설인 분뇨저장탱크를 설치하려 할 때 아현 주민들과 일본인 지주가 단결해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32] 사법의 영역에 있어 내선일체의 구현에 부쳐 (1)氏名의 공통, (2)내선통혼, (3) 內鮮緣組의 3항목을 들 수 있는데, <이름(名)>은 소화12년(1937) 이래 반도인도 내지인과 같은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내선통혼이 해마다 격증하여 반도인이 내지인의 양자가 되는 수도 매년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바, 이번 조선민사령의 개정으로 - 전술한 3항목이 전부 실현을 보게 되어 사법상 내선일체를 구현하는 길은완전히 열리게 되었다. 􋺷內地人式氏の設定に就き總督談」, 鈴木裕子, 위의 책, 86쪽 참조[33] 宮田節子, '朝鮮民衆と皇民化 政策', 未來社, 1992, 167쪽 참조.[34] 미야다(宮田節子)는 일본 측의 ‘동화의 논리’와 조선 측의 ‘차별로부터 탈출’의 논리가 내선일체의 추동력으로 작용했음을 밝히고 “참된 내선일체가 되려면 내지인의 조선인에 대한 특권의식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내지인은 조선인이 정말 일본인이 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마음”에서 가능한 것이라 할 때, 일본 측의 동화의 논리란 차별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동화의 논리와 조선의 ‘차별로부터 탈출’이라는 논리는 본질적으로 상호모순과 상극의 관계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宮田節子, 앞의 책, 173쪽 참조[35] 당시 내선일체를 주장한 대표적인 글로 현영섭의 􋺷朝鮮人の進むべき道􋺸, 金斗植의 􋺷防共戰線勝利の必然性􋺸, 金文輯의 􋺷臣民の書􋺸로 이를 내선일체의 3大書라 했다.[36] 현영섭, '朝鮮人の進むべき道', 綠旗連盟, 1939, 29쪽.[37] 宮本節子, 앞의 책, 162쪽[38] 鈴木裕子, 앞의 책, 81-2쪽 참조[39] 1) 국가의지가 그것을 장려하기 위한 가능성과 편의를 제공하는 것. - 결혼 수속 및 호적법상의 편의, 2) 사회적 인식의 시정 또는 상식화의 문제. - 내선결혼을 이단시하는 경향에 대한 교화, 3) 자녀를 둔 부모가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자녀의 장래 행복을 믿어주는 일, 4)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내선청년 남녀 당사자 간 연애나 결혼에 대한 태도. 김용제, 「內鮮結婚我觀」, 􋺷내선일체􋺸, 1940. 창간호, 57-8쪽[40] 鈴木裕子, 앞의 책, 76쪽[41] 내지인과 조선인과의 배우자 통계표에 따르면 대정12년(1923), 245쌍이었던 것이 소화12년(1937)에는 1,206쌍으로 증가하였으며, 1941년에 이르러 내선결혼자의 총 누계는 5,747쌍이었다.(保坂祐二, 앞의 책, 208쪽) 그런데 1937년까지 통계에서 내지인으로 조선부인을 처로 한 경우가 664쌍이고 조선인으로 내지인을 처로 하고 있는 경우가 472쌍이며, 조선인으로 내지인의 집에 입양된 것이 48명, 내지인이 조선인의 가정에 입양된 것이 22명이었다. 이를 다시 직업에 따라 분류하면 농업 및 목축업이 158쌍, 어업 및 제염업 30, 공업 355, 공무 및 자유업 294, 기타 유업자 86, 무직및 직업을 신고하지 않은 경우 42쌍이었다. (􋺷내선일체􋺸, 창간호, 87쪽 참조.) 그런데 1941년도의 내선결혼자의 경우 조선인 남편-일본인 부인이 1,303쌍이고, 일본인 남편-조선인 부인은 113쌍이었는데, 이를 두고 당국에서는 “가정의 자녀에 대한 일본식 훈육은 남편이 내지인인 경우보다 아내가 내지인인 경우가 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바람직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新しき朝鮮􋺸, 75쪽.)고 하여 내선결혼을 통하여 조선민족을 말살하고 민족동화를 꾀하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42] 일본 제국은 일본 우월주의 체제에서 시작한 터라 이러한 체제 유지를 위해서 非일본인 차별을 안 할 수 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일본 국민이 주권자였던 적이 있을까. 단지 일본 국민에게는 권력에 복종하는 한 그 대가로 혜택으로서 '특권'이 주어졌지만, 그 실태는 '계속 우롱당한 민(民)'에 불과하다. 이 '특권'이란 외국인과 비교한 경우에만 국민이 권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착각을 일으키기 위해 존재하며, 국가와의 사회계약에서는 거의 실효성을 지니지 않는 허구의 '특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주권이 그림의 떡임을 은폐하는 바로 그 목적으로 일본의 '외국인' 차별은 유지되고 있다."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지음, 후지이 다케시 옮김, 301쪽)[43] 특히 춘원 이광수창씨개명을 했다가 나중에 광복이 되자마자 바로 취소했다.[44] 일본 제국은 원래 창씨개명 등을 통해 고등교육•정치참여•고위직 진출 등의 정식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진 일본인이 되는 것을 함부로 허락해 주지 않았다.[45] 당시 식민제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조차 본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라고 식민지와 비교해서 나을 거 별로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식민지 형성 과정에서 숱하게 죽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통치 기관 실무자들과 일선 군 장병들이 그 빈곤층 출신 지원자들로 채워졌다.[46] 내선일체 이야기가 나오기 전인 염상섭만세전을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요보라고 말하면서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 살지만,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라는 문구가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딱 그 정도였다. 사실 이는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 공통적이다. 학연, 재산, 권력 등 모든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혈연이나 지연밖에 답이 없으니까.[47]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히키아게샤 문서로.[48] 헌데 이게 일본인만 꼭 그런 게 아니고, 식민지에서 착취하며 부를 누리던 당시 제국주의 나라들 부유층 및 국적 인물들은 다 똑같다. 한 예로 2000년대에 국내에 나온 영국 관련 기행 책자에서 지은이가 만난 영국인 노인이 비슷한 말을 했는데, 자신이 어릴 적에 인도에서 호강하고 살고 인도인머슴으로만 보았기에, 인도가 독립하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고생하며 수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인들과 있으면 거부감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한 걸 쓰기도 했다.[49]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본토에서는 빈민 혹은 하류층인 경우가 많이 있었던 탓인데 해방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현지에서 극도로 미움을 사게 된다.[50]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은 일본인 정착촌을 건설해서 그들의 주거지에만 살았기에 조선인과는 웬만하면 섞여 살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현지 일본인과 교류하는 일이 많았다.[51] 사실 그전에도 일본제국은 공식적으론 내선차별이 금지되었지만, 실생활에서 일본인들은 한반도와 일본 본토를 포함해서 조선인을 철저하게 멸시하고 얕보았다.[52] 아이누인을 정식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2000년대 이후부터이다. 그것도 북방 4개 도서 관련해서 영토 권리를 위해 인정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53] 한국인일본인 정도로 유사한 민족으로는 만주족(여진족)이 있겠지만, 이들은 현재 주류 민족으로서 나라가 없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54] 本土人は集団としては韓国人と同じクラスターに属することも分かった。{본토 일본인과 한국인은 집단적으로 같은 (유전적) 클러스터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다.}[55] 조몬인 혈통 비율 3.3% 3.3% (2020) 8% ~ 9.8% (2019) 9% ~ 13% (2019) 전부 연구 모델을 조몬인야요이인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56] 도래인이 시베리아·만주에서 한반도를 뛰어넘어 일본 열도로 이주했거나 멀리 중국 남부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석하는 것은 왜곡된 형태로나마 한국인과의 직접적 관계를 회피하려고 고안된 고육지책.[57] 도쿄제국대학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58] 일본은 '일본인 기원=고대 한국인' 인정해야[59] 당장 아돌프 히틀러부터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60] 대표적인 경우가 판첸 라마 11세게둔 최키 니마를 납치해 숨겨 놓고 친정부 성향인 기알첸 노르부를 새로운 판첸 라마로 옹립한 것이 있다.[61] 그런데 애초에 이런 행태는 청나라만주족이 먼저 시작한 것이고 만주족 자신이 그 논리로 한족에 동화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