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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colbgcolor=white,#2d2f34> 익성대왕(翌成大王) | ||
본관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
성씨 | 김(金) | ||
아버지 | 김예영 | ||
형제 | 김균정 | ||
자매 | 귀승부인[1] | ||
배우자 | 포도부인 | ||
아들 | 희강왕 | ||
생몰연도 | 778년 이후[2] ~ ? |
1. 개요
신라 하대의 추존 왕. 김헌창(金憲昌) 또는 김헌장노(金憲章奴)로도 불린다.제38대 열조 원성왕의 3남인 김예영의 아들로 김균정, 귀승부인과는 남매간이다. 대아찬 박충연의 딸 포도부인과 혼인해 아들로 제43대 희강왕 김제륭을 두었다.
2. 생애
애장왕 시기인 807년 1월에 시중 자리에 올랐으며, 애장왕이 시해당하고 헌덕왕이 즉위한 810년 1월까지 자리를 지킨 것을 보면 애장왕 시해사건에 같이 참여했거나 아니면 묵인을 통해 이를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를 대신해 그의 아들 제륭이 애장왕 시해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 되든간에 깊이 관여된 것은 분명하다.이후 813년에 국상, 병부령 겸 수성부령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 시기에 중요한 직책이란 직책을 다 차지했다는 의미가 되어서 당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다만 819년 1월 나이 70이 되지 않았음에도 금식자단장을 받은 것을 보면 그 즈음에 바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이후
그의 사후 아들 제륭이 자신의 동생 균정과의 왕위 쟁탈전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김명에게 살해 당하게 된다. 하지만 희강왕의 아들이자 그의 손자인 계명이 살아 남아서 후에 그의 증손자인 경문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그의 집안이 일약 하대 성골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4. 기타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에 따르면 김계종과 김훈영은 문성왕[3]의 당숙인데, 문성왕의 증조부인 김예영에게 김헌정과 김균정 이외의 아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김제옹(悌邕)[4]과 김계종(繼宗)이 김헌정의 큰아버지인 김인겸의 장남 김준옹(俊邕)[5]과 3남 김수종(秀宗)[6]과 항렬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들은 대체로 희강왕의 동생으로 비정된다. 김계종과 김훈영이 희강왕의 동생이 맞을 경우 이들 또한 김헌정의 아들들이 된다.[7]<숭복사 비문>에 따르면 김계종과 김훈영은 경문왕[8] 시대에도 으뜸 신하(宗臣)로 주요 권신 자리를 유지하고, 헌강왕[9]의 왕명을 받들었던 행적이 각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나온다.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이들은 신라 하대의 왕위 쟁탈전에 개입하지 않으며 중립적인 스탠스를 유지했고, 이러한 이유로 별 탈 없이 오래 살아서 하대 왕실의 최고참 원로 대접을 받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