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7 21:21:19

김립(1880)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립
金立
파일:20231207_230535.jpg
<colbgcolor=#e00001><colcolor=#fff> 출생 1880년
함경도 명천현(현 함경북도 명천군)
사망 1922년 2월 6일 (향년 42세)
본관 선산 김씨 (善山 金氏)
본명 김익용(金翼容)
이명 김익용(金益庸), 양춘산(楊春山)
일세(一洗)

1. 개요2. 방법론
2.1. 조선인에 대한 테러와 강탈
3. 생애
3.1. 초년 시절3.2. 북만주에서의 독립운동3.3. 공산주의 활동3.4. 이동휘와 김립 일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복 시도3.5. 국제공산당 자금사건3.6. 김립 피살 사건의 진실 논란
3.6.1. 김립 횡령설3.6.2. 김립 횡령 무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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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일세(一洗). 본명은 김익용(金翼容), 이명은 김익용(金益庸), 양춘산(楊春山).

2. 방법론

2.1. 조선인에 대한 테러와 강탈

이동휘와 김립의 독립운동 방법론 중 하나는 조선인이 대한 테러와 강탈이었다. 그들의 활동자금을 위해선 조선인들을 습격해서 강탈하는 강도짓도 서슴치 않았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동휘는 강직한 무사였다...1905년에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은 그의 성격에 변함이 없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김립, 장기영과 함께 북간도 라지구에서 이종호가 낸 1,000원을 가지고 대순학교를 설립했는데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가로 출자를 요구했는데 이종호가 이를 거절하자 이동휘는 휘하 20명을 동원하여 이종호의 집을 습격했고 이종호는 국권회복운동에서 손을 떼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정식(2008),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199쪽

3. 생애

3.1. 초년 시절

1880년 함경도 명천현(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한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기도 했다.

2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고, 이때쯤 신민회와 서북학회에서도 유력한 청년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10년 2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같은 고향 출신 후배인 긍인 허헌 등과 함께 일본과 영국의 입헌제도에 관심을 갖고 입헌군주국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으나 한일 강제 병합으로 무산되었다.

3.2. 북만주에서의 독립운동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망명, 1911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되자 동참하였다. 1912년 시베리아에서 이상설, 이동휘와 함께 한인 교포 자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한인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또 이동휘와 함께 길성학교(吉成學校)를 설립한 뒤 만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이동휘의 최측근이 되었다.

1913년 중화민국 길림성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 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1]에 있던 동림무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17년에는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러시아 임시정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 다음해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기관지 《한인시보(韓人時報)》를 발행했다.

3.3. 공산주의 활동

1917년 2월에 열린 신민회(新民會) 망명간부회의에서 공산주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1918년 4월에는 이동휘, 한형권, 김알렉산드라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기관지《자유종》 주필이 되었다. 이어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가 1920년 사임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는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여 비서부장에 선임되었다.

파일:external/img.seoul.co.kr/SSI_20121118165241.jpg

위의 사진은 이동휘고려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의 단체 사진이다.

3.4. 이동휘와 김립 일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복 시도

당시 이동휘와 김립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복을 위해 공작을 꾸렸다는 사실은 인터넷이 알려져있지 않는데 그 실상은 아래와 같다.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공산국가 건설하려 한 이동휘...상해임정 전복에 실패하자 국민의회와 연합해 ‘한족공산당’ 창당...이동휘 정부개혁안 설명서에 의하면 그 개혁안은 정부 개혁이 아니라 사실상 정부 전복안이었다....또한 국가체제의 경우, 기왕의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새로이 ‘고려혁명위원회’로 바꾸자고 제안했다...이 같은 고려혁명위원회는 사실상 김립이 제창했던 ‘집행위원회’ 제도를 국내와 미국·중국·소비에트러시아 등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혁명위원회는 집행위원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왕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인 상해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이 소비에트 국가체제를 수립하려는 제안과 같았다...당시 이동휘의 상해임정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 김립이었다는 사실에서, 상해임시정부를 혁명위원회로 바꾸자는 결론 역시 김립의 주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립이 주장한 집행위원회는 물론 이동휘 명의로 제출된 정부개혁안과 설명서 역시 김립이 주동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이동휘 명의로 제출된 정부개혁안과 설명서는 한인사회당이 상해임정에 참여한 최종 목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최후 카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만반의 준비 끝에 던진 최후의 카드, 즉 정부 개혁안과 설명서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동휘와 김립은 다른 대안을 모색했다. 그것은 기왕의 국민의회 세력과 연합해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는 대안이었다. 물론 그 공작 역시 김립이 주도했다.

...당시 김립이 국민의회와 조화책을 강구한 배경은 1921년 2월 중순경 발표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었다. 이 격문은 임정 반대세력을 대표하던 국민의회와 북경파(北京派)의 연합 작품이었다. 1921년 2월 8일 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외무차관에게 통보한 ‘재상해 한인독립운동자의 내홍(內訌) 및 국민대표회의의 발단’이라는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상해임정 반대세력에는 경파(硬派)와 연파(軟派)가 있었다.

경파는 상해임정을 전면 전복해 노국(魯國) 과격파, 즉 소비에트러시아 볼셰비키와 결탁해 무력(武力) 급진을 주장하는 자들김립·원세훈·이한영·장건상·김만겸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김립과 이한영은 한인사회당 계열이고, 원세훈·장건상·김만겸은 국민의회 계열이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 20]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공산국가 건설하려 한 이동휘 _ 안창호 위시한 기호계열, 이동휘의 정부개혁안을 부결하다." 월간중앙 (2023)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627[2]

3.5.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코민테른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한인 독립운동에 200만 루블을 원조하기로 결정했고, 1922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김립은 활동 자금을 모스크바에서 치타로 운반한 한형권으로부터 자금을 인수해 상하이로 운반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 기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일명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다.

임시정부 측에 따르면, 김립은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60만 루블만 가지고 와서 사용하였으며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내놓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사업비로 쓰게 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김구는 부하인 오면직노종균을 보내 1922년 2월 11일에 김립을 상하이 자베이구(閘北區)[3] 거리에서 암살했다.

이 사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백범일지는 이러한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표현했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졌지만, 김립이 이 기금을 사적으로 횡령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김립은 이 자금을 한인사회당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에 사용했다고 봐야 옳다.

무엇보다 한인사회당과 이를 모태로 만든 고려공산당은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가 이끌던 정당이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임시정부 산 정당이었다. 이러한 사적 횡령 설은 임정 내부의 공산주의 정당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이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할 목적으로 유포한 소문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대부분 멸실되었기에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의 동지들에게 3차례에 걸쳐 나눠서 전달된 200만 루블의 자금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등에 의해 어렵게 운반되었다. 그런데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주류를 이루는 지도자들의 손에 모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립과 이동휘는 오래전부터 투쟁방법론 문제로 임정 주류와 갈등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정 탈퇴까지 계획해두고 있었다는 주장도 학자들 사이에 제기되었다. 말하자면 이 때의 자금 사건으로 임정 내부의 노선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무엇보다 김립이 암살되면서 나머지 140만 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 물론 김립이 편을 갈라서, 한인사회당 등 자기 편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미 다 나눠줬을 가능성도 있다.

이 증발한 자금이 당시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를 통해 동아일보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도 존재한다..이 소문을 들은 박열 등 불령사 회원들이 1923년 4월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도쿄를 경유하던 장덕수를 지요다구 간다에서 붙잡아 두들겨 패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장덕수가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에 대한 구체적인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3.6. 김립 피살 사건의 진실 논란

3.6.1. 김립 횡령설

김립 일파의 행동이 횡령이라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한형권의 임시정부의 대아외교(對俄外交)와 국민대표회의의 전말에 의하면,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한형권이 김립을 만났을 때 김립은 “임시정부에는 내홍(內訌)이 생기어 중요 인물 4~5명이 탈퇴해서 현상유지도 불능(不能)이며, 그대가 모스크바로 떠나온 후 금일까지 아무런 연락도 취할 수 없으므로 너무도 궁금해 모스크바로 갈 예정으로 이곳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립의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임시정부를 탈퇴했다는 중요 인물 4~5명은 이동휘·안창호 등을 지칭하는데 당시 그런 일은 없었다. 게다가 김립의 공식적인 임무는 한국공산당을 코민테른에 보고해 승인받고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과의 통합을 협의하는 것이었지, 모스크바 차관의 귀추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립의 말에 한형권은 낙심천만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차관은 임시정부를 위한 것인데, 그 임시정부 주역들이 탈퇴해 현상유지도 불가능하다면 아직 수령하지 못한 모스크바 차관 160만원이 수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형권은 “내가 모스크바 당국과 교섭한 것은 성공이다. 계속적으로 무장(武裝), 금전 등 원조를 받을 터인데 이제 우리 정부 자체의 분열이 이처럼 됐으니 이를 장차 어찌할까? 지금이라도 무슨 방법으로든지 임시정부의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 급무이니 군(君)은 나의 정부에 대한 보고서와 제1기 차관의 일부인 40만원을 가지고 곧 길을 돌리어 상해로 가서 원상회복의 공작에 주력해 우리의 뜻대로 그것을 완성하면서 내가 다시 모스크바에 가서 160만원 잔액을 휴대하고 상해로 돌아갈 시기를 고대해달라”고 했다.

이 같은 한형권의 대답을 생각해보면 김립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립은 한형권이 수령해온 모스크바 차관 40만원을 중간에서 횡령하려 거짓말했던 것이다. 다만 그 거짓말은 김립 혼자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이동휘와 밀약한 결과로 이해된다. 한형권이 상해로 온다면 모스크바 차관이 임시정부로 들어갈 것이기에 김립과 이동휘는 중간에서 횡령하자고 밀약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형권을 파견한 주체는 자신들이기에 자신들이 모스크바 차관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모스크바 차관이 코민테른 공작금이 아니라 소비에트러시아 차관이라는 사실은 김립 자신부터 잘 알고 있었다. 김립은 웨이하이(威海)에 있던 이동휘에게 1920년 7월 19일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만일 차관만 되면 이승만, 안창호 상관할 것 없이 하여볼 수도 유(有) 하오다. 여하간 차관 일절(一節)은 즉금(卽今) 운동 중이오다”라고 했다. 위에서 보듯 김립과 이동휘가 모스크바 차관을 받으려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안창호를 축출하고 상해임정을 장악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려면 모스크바 차관이 이승만·안창호에게 들어가면 절대 안 됐다. 그래서 모스크바 차관을 중간에서 횡령하면서 그 차관은 차관이 아니라 코민테른 공작금이라는 거짓 논리를 선전했던 것이다.

...한형권 역시 모스크바 차관은 상해임정을 원조하는 차관이라고 했다. 그 외에 같은 한국공산당에 있던 여운형 역시 차관이라고 했다. 1929년 8월 6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여운형은 “그 돈은 러시아 정부가 임시정부를 원조하기 위한 돈이었는데, 이것을 김립 등이 속이고 횡령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여운형은 1929년 8월 1일 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국제공산당은 이전에 이동휘 일파가 40만원을 사취(詐取)했던 것에 대해 체포할 수 있었지만, 노농정부(勞農政府-소비에트러시아)는 가정부(假政府-상해임시정부)의 유력자를 체포하는 데 있어 조선민중의 감정을 해칠 것을 두려워해 이것을 그만두고 이동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방했다”고 증언했다. 모스크바 차관을 코민테른 공작금이라 거짓 선동하는 이동휘를 코민테른에서 체포하려 했지만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막았다는 증언인데, 이는 코민테른이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도 차관으로 생각했다는 의미와 같다. 당연히 상해임정도 차관이라 생각했다. 요컨대 모스크바 차관을 코민테른 공작금이라 주장한 측은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한 김립과 이동휘 일파뿐이었던 것이다.

...김철수의 회고록인 지운(遲耘) 김철수에 의하면, 김립은 모스크바 차관을 운반하다가 중간에서 “사람을 보내라. 여그 시방 백당(白黨-러시아 백군 세력)들이 있은게. 서로 만나서 주고받고 해야 되겠다”는 소식을 보냈다고 한다. 그 소식이란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동휘가 그 소식을 접수한 시점은 1920년 11월 중순경이었다. 따라서 이동휘는 모스크바 차관 문제는 물론 동아총국 문제도 1920년 11월 중순경 인식했다고 이해된다. 그때부터 이동휘는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을 제압하고 상해임정을 장악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김립이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결정한 일들은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했다. 우선 치타에 설치하려던 동아총국은 러시아공산당 원동국의 거부로 무산됐다. 원동국은 ‘권한 이상의 범위를 포함했다’는 이유로 동아총국 설치를 거절했다. 동북아 공산혁명을 주도할 동아총국은 당연히 코민테른 소관이기 때문이었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18)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해 상해임정 장악하려 한 이동휘" 월간중앙 (2023)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281
지운 김철수에서는 이동휘를 “그는 돈을 모른다. 돈이라고는 만지지 않으려 한다. 알려고도 아니한다”고 평가했다. 이는 모스크바 차관을 비롯한 모든 자금에 대해 이동휘는 간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곧 모스크바 차관을 김립이 독단적으로 운영했다는 의미와 같다. “이제 40만원 받아 왔는디(중략) 김립이 마음대로 해. 고것이 좀 잘못됐어”라는 지운 김철수의 언급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편 지운 김철수에는 “날마다 상해에 그 큰 선수공사, 요녕공사 그런데 가서 요리 집에 가서 회의를 허는디, 김립이가 돈을 가지고 씨인게 냄새가 벌써 난단 말이여. 그러게 다름 사람들은 다 말을 듣는디, 신익희하고 이시영이, 이동녕은 한 번도 출석을 안했다. 이시영이허고가 틀어. 애초에 도둑놈의 돈 쓰지 않겠다 헌 사람. 안창호는 그냥 그 자리에 와 희의허러. 안창호는 좀 더 너그럽거든. 그렇게 ‘돈이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상시러운 돈이다’ 허도, 회의하는디 안창호는 와. 꼭 그래서 회의를 허는디 그게 임시정부 개조론”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김립은 횡령자금으로 임정 요인들을 대접·포섭했다. 이동휘 역시 그랬다. 훗날 이동휘는 당시 임정 요인들을 대접하기 위해 100원 정도 썼다고 회상했는데 김립 역시 그 정도 썼을 것이다. 출장비로 사용된 횡령자금만도 1만1500원이나 됐다. 당시 서울에서 상해까지 10원이면 충분했으니 이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 ⑲] 반공친미 노선 천명해 임정 지킨 이승만 _ 대통령 축출 공작 실패하자 이동휘, 총리직 사퇴하다." 월간중앙 (2023)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430

3.6.2. 김립 횡령 무고설

후일 공개된 소련의 옛 보고서엔 '상하이 공산당 횡령근거 없다'라고 해석하는 측이 있다. 구 소련붕괴 이후 구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보관소에서 국제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Секретарь Исполкома Коминтерна) 오토 빌레 쿠시넨(Otto Wille Kuusinen, 1881년 10월 4일 ~ 1964년 5월 17일)이 1922년 5월 11일자로 작성한 훈령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에는 문제의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이 모두 상하이파 공산당에 지급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자금의 결산 보고 의무도 상하이파 공산당에 부과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국제공산당은 모스크바 자금의 정산 실무를 극동공화국 외무부장관(Министр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й Республики) 야코프 얀손(Яков Давидович Янсон, 1886년 5월 22일 ~ 1938년 9월 1일)에게 위임했는데, 그가 주도한 자금결산규명위원회가 결과 보고서를 제출한 시점은 1922년 8월 18일이었다. 이 보고서도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를 상하이파 공산당으로 지목했다.

보고서 결론에 따르면 상하이파 공산당의 자금이 사적으로 유용되었다는 여러 가지 악평은 소련 영토 내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근거가 없다고 한다. 요컨대 코민테른 문서들은 어느 것이나 다 모스크바 자금의 처분권자가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자인 상하이파 공산당이라는 점을 뚜렷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서대로라면 김구는 무고한 독립운동가 한 명을 처형한 셈이 된다.# 김립은 현재까지도 건국훈장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구의 오해로 인해 찍힌 횡령범이라는 낙인 때문에 지금까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혹은 자료 부족으로 확인하기 어려워진 행방불명된 루블 규모가 워낙 크고, 김구의 국민적 위상 때문에 김구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한 김립의 서훈이 부담스러운 결정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김립을 서훈할 경우 당사자를 죽음으로 몬 김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혹은 가지고 있는 대외적인 이미지가 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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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뤄쯔거우진(羅子溝鎭) 쑤이펀촌(綏芬村).[2] 신명호는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3]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징안구(靜安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