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12:19:01

김기남(1929)

前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선전선동부장
김기남
金己男 | Kim Ki Nam
파일:국무위원 김기남.jpg
출생 1929년 8월 28일
함경남도 원산부[1]
사망 2024년 5월 7일 (향년 94세)
평양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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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정치가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북한의 괴벨스2.3. 권력 중핵으로 진입2.4. 최전성기2.5. 은퇴2.6. 사망
2.6.1. 장의위원회 구성
3. 수훈4. 경력5. 참고문헌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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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선전선동 전문가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29년 8월 28일, 함경남도 원산부의 부두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2] 강원도 원산시의 중학교에서 민청위원장으로 일하다가 외국 유학 간부로 선발되어 1946년 5월, 중견간부훈련소에 입학하여[3] 몇 달간 공부한 후 1946년 9월 18일에 소련으로 보내져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의 사후 러시아 대사관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스베들롭스크 대학, 로스토프 대학, 모스크바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 경험으로 인해 러시아어가 매우 유창하여 말년까지 러시아 외교관들과 능통하게 소통하였다고 마체고라 대사가 회고하였다. 김기남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유학생 일동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참전을 탄원했으나 김일성이 만류하여 계속 공부를 하게 되었고, 1951년 여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유학파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그의 략력을 발표할때 정확히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는 은근슬쩍 말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첫 전공은 선전이 아니라 경제 쪽이었으며 경제전문가 자격을 취득하고 처음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학부장까지 승진했다.

2.2. 북한의 괴벨스

1952년 내각 외무성 참사에 임명, 1957년에 주중 북한 대리대사, 1958년 당 국제부 과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한에서 발표한 부고에는 딱히 그 내용이 없으며 1956년 5월 당중앙위원회에 배치, 1960년에 과학교육부 부부장에 임명된 것부터 적고 있다. 이후 국제생활사 부주필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 때 외국에서 온 공산당 대표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김기남이었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주도권 투쟁 속에서 1963년 10월 28일, 논설 <사회주의 진영을 옹호하자>를 발표하면서 김일성의 중공과 소련 사이의 중립(등거리) 외교를 옹호하였다. 근데 이때 무리하게 밤을 세워가면서 글을 쓰다가 앓아눕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로도 건강이 썩 좋지 않아서 김일성이 주치의를 보내서 치료해주는 등 김기남을 총애하였다. 1966년 8월 12일에는 논설 <자주성을 옹호하자>도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1966년에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되면서 선전전문가의 커리어를 밟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초기 호칭이었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 김기남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1970년 근로자 부주필에 임명, 1974년 12월에 근로자 책임주필이 되었다. 1976년 4월에 로동신문 책임주필에 임명, 12월에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장을 겸하였다. 1976년 10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7년 11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상설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당내에서 선비, 양반이라고 불릴 정도로 꼿꼿한 인물이지만 김정일의 연회에만 초대되면 갑자기 붕붕 날아다니면서 신나게 놀아서 김정일의 측근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로동신문 책임주필에 유임되었다. 1981년 10월, 국제기자동맹 부위원장에 선출, 1982년 2월에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상설회의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2.3. 권력 중핵으로 진입

1985년 10월, 김국태의 뒤를 이어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으며[4] 1986년 2월, 6기 11중전회에서 로동신문 책임주필에서 해임되고 리성복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86년 4월, 김좌혁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1987년 9월에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으로 강등되면서 잠시 커리어가 주춤하는가 하더니 1989년에 선전선동부장으로 복귀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으면서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2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그때까지 김정일이 맡고 있던 조선로동당 선전비서에 임명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김정일 시대에도 중용되었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0년에 정하철이 신임 선전선동부장으로 등장한 것을 보아서 그 이전에 선전선동부장에서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2003년에 강석숭이 사망하자 후임 당력사연구소 소장을 맡았고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05년 8월, 조평통 부위원장 자격으로 6.15 공동행사 북측 대표단장으로 참석하였고, 이때 통일선전부 제1부부장 림동옥, 조평통 서기국장 안경호 등과 함께 북측 정치인 중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09년 4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9년 8월, 김양건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 조문차 또 방한, 이명박 대통령을 접견하여 김정일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후 이명박 회고에 따르면 김기남은 3차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으며, 이명박은 김기남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제 앞으로 좀 잘 하세요"라고 했다. 2009년 12월, 김정임에게 당력사연구소장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낸 후 5월에 다시 선전선동부장으로 복귀했다.

2.4. 최전성기

그리고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8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치국 위원 겸 선전비서로 발탁되면서 김정은 시대까지 3대에 걸쳐 선전선동부장을 하게 된다. 훗날 부고의 표현을 보면 김정은의 후계구도에서 매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확인된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1년 5월, 김정일의 비공식 중국 방문을 동행하였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장의위원을 지내는가 하면 리영호, 장성택, 우동측, 최태복, 김영춘 등과 함께 장의차를 운구한 장의차 8인방 중 한명이 되었다. 2012년 2월, 김정일훈장을 받았으며 2012년 11월 14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가체육지도위원회가 설치됨에 따라 초대 위원이 되었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일부 보도에 따르면 2015년 4월에 3개월간 가벼운 혁명화를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기존의 비서국 비서에 해당하는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면서 그야말로 장수만세를 보여준다.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6년 6월,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가 국무위원회로 거듭나자 1기 국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90이 가까워오는 나이는 어찌할 수 없었는지 2017년 이후론 활동이 상당히 줄어들었고 당 부위원장이란 직함이 보도된 것은 2017년 10월이 마지막이었다.

2.5. 은퇴

201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 당 부위원장, 선전선동부장에서 소환되어 박광호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018년 4월, 최고인민회의 13기 6차 회의에서 국무위원회 위원에서 소환되었다. 그럼에도 2019년 3월, 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3월 6일부터 3월 7일 사이에 개최된 제2차 전국당초급선전일군대회에 중앙위원회 고문 직함으로 등장하였다. 2019년 8월 28일, 구순 생일을 기념하여 김정은이 로력영웅 칭호를 내렸는데 이는 나중에 리일환의 추도사에서 언급되었다. 2019년 12월, 7기 5차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착석한 것을 봐서 이 시점까지 당중앙위원회 위원 직함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월, 황순희 장의위원을 지냈다. 202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김영남, 양형섭, 최태복, 최영림, 김정각, 김경옥, 리수용, 안정수, 박재경 등과 함께 초대받았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도 김영남, 최영림, 최태복, 리용무 등과 함께 초대되는 등 정권의 예우를 받으면서 좋은 말년을 보내는 중이다. 2021년 9월, 북한 창건 73주년 안전무력 열병식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하지만 2022년 9월의 정권수립 기념일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딱히 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진 않고 고령이 문제로 추정된다.

2.6. 사망

조용하다가 2024년 5월 7일 오전 10시에 9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부고에 따르면 2022년 4월부터 이미 각종 질환에 시달려왔다고 한다. 당중앙위원회, 국무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김기남동지는 값높은 생애의 전기간 당과 수령을 충성으로 받들고 조국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우리 혁명의 사상적순결성을 고수강화하고 사회주의위업의 줄기찬 승리를 정치적으로 굳건히 담보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모든것을 다 바친 우리 당과 혁명의 원로,저명한 정치활동가이다. (...) 김기남동지는 주체혁명위업계승의 중대한 력사적전환기에도 변함없는 충성심과 풍부한 실력,당의 원로다운 귀감으로써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유일적령도체계를 철저히 확립하고 우리식 사회주의의 정치사상적위력을 끊임없이 높이는데서 특출한 역할을 하였다. 동지는 혁명과 인민앞에 항상 성실한 자세와 높은 책임감으로 당사상사업의 모든 령역에서 새시대의 위력한 공세와 참신한 발전을 견지하여 사회주의강국건설의 승리적려정을 빛나게 이어나가도록 뒤받침하는데 아낌없는 정력을 기울이였다. 한생 변함없이 숭고한 경지에서 발휘하여온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과 투철한 혁명적원칙성,조국과 인민을 위하는 헌신적복무정신과 겸손하고 결백한 성품으로 하여 김기남동지는 언제나 당원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세대를 이어 장성하는 애국자들의 대오에 특유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였다. 고결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조선로동당의 위업에 열렬히 충성하고 조국의 부강번영과 인민의 정신문화적성장에 거대한 공헌을 한 위대한 혁명원로이며 권위있는 리론가,정치활동가인 김기남동지의 서거는 사회주의전면적발전의 높은 목표를 향하여 신심넘쳐 전진비약하고있는 우리 당과 국가,인민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 김기남동지는 비록 서거하였으나 당과 혁명,조국과 인민앞에 세운 그의 업적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위업수행의 전 력사적행로에 길이 빛날것이다. 조선혁명의 특출한 충신원로인 김기남동지는 영생할것이다."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퍼부었다.

현철해 사망 이후 2년 만에 국장 거행이 결정되었으며 김정은이 직접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김정은이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당 비서들을 거느리고 조문하였다. 5월 9일에 장의식이 엄수, 김정은이 직접 참가했으나 다만 현철해 때처럼 직접 운구하진 않았다. 시신은 평양시 와곽에서 화장된 후 다시 평양시로 돌아와 당중앙위원회 구내 청사를 한바퀴 돌았으며, 당중앙위원회 간부들이 전원 도열하여 경의를 표했다. 이후 애국렬사릉에 당중앙위원회 비서 직함으로 안장되었으며 김정은이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함께 직접 맨손으로 흙을 뿌렸다. 부인 박정혜는 김기남보다 먼저 사망하여 애국렬사릉에 김기남과 함께 합장되었다. 다음날인 5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영상 보도가 신속하게 나갔으며, 17시 보도에서 '인생의 영광' 화면음악을 방영하면서 김기남이 과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모셨던 영상과 사진을 다수 내보냈다[5].

김기남 사망 시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3일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3일간 노래도 부르지 않고 가족의 경조사도 치르지 않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김기남을 추모하라고 요구했다. #

이로서 김정일 사망 당시 운구차를 호위한 8인방 중 수령인 김정은을 제외하면 김정각만이 유일하게 생존 상태이다.

2.6.1. 장의위원회 구성


※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히용과 김성룡 부총리가 장의위원회에서 탈락하였다.

3. 수훈

4.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로동신문 책임주필
1976년 4월? 1986년 2월 8일 6차 당대회에서 유임
6기 11중전회에서 해임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장
1985년 10월? 1987년 9월? 김국태의 후임으로 임명
제1부부장으로 강등
1989년? 2000년? 복귀
정하철에게 이임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
1992년 12월 10일 2016년 5월 9일 6기 20중전회에서 선거
2010년 9월 전원회의에서 재선
7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당력사연구소장
2003년? 2009년 12월? 강석숭의 후임으로 임명
김정임에게 이임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장
2010년 5월 2017년 10월 7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임명
7차 당대회에서 유임
7기 2중전회에서 은퇴
조선로동당 6,7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2010년 9월 28일 2017년 10월 7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거
7차 당대회에서 재선
7기 2중전회에서 은퇴
조선로동당 7기 중앙위원회 정무국 부위원장
2016년 5월 9일 2017년 10월 7일 7차 당대회에서 선거
7기 2중전회에서 은퇴
13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
2016년 6월 29일 2018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선거
최고인민회의 13기 6차 회의에서 은퇴

5. 참고문헌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1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1).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 인민들 속에서 100(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00).

6. 기타

  • 황장엽은 김기남을 김정일 앞에서 직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평가했다. #[6]
  • 키가 상당히 컸다. 북한의 역대 주요 간부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편으로, 180cm를 넘긴다고 한다. 심지어 장신으로 유명한 김영남보다도 조금 더 컸다. 이 때문에 혼자만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 국방과학원 기자 출신인 김길선 전 기자는 김기남의 장수 비결을 황장엽이 이미 주체사상의 기틀을 마련해 선전선동부장에 있으면서도 크게 과오를 범할 일이 없었던 점, 자식을 중앙 권력에 진출시키려는 욕심이 없었던 점, 당정군의 핵심 기득권층과 사돈 관계를 맺지 않았던 점을 꼽았다. 즉 처세술에 있어서 완벽에 가까웠다고 평가했다.#

[1]강원도 원산시[2] 3차 당대표자회에서 발표한 약력에선 금야군이었는데 략력에서는 원산시로 바뀌었다.[3] 통일부에선 만경대혁명학원 등을 졸업한 것으로 파악했지만 김기남이 직접 쓴 글에 따르면 아닌 것으로 보인다.[4] 부고의 표현을 봐선 당시 공식직함은 선전부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 인생의 영광은 김정일 사후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리을설, 현철해 등 김정은 3대 세습 체제를 수립하는 데 기여한 노간부들이 사망할 때마다 유행했다. 다만, 화면음악을 특정 인물과 관련된 사진으로 채운 것은 현철해가 처음이다. #(북한 측 영상 주의) 김기남도 비슷한 영상(북한 측 영상 주의)을 내보낸 것으로 볼 때, 김기남 역시 현철해 동격으로 예우하겠단 의도로 볼 수 있다.[6] 고영환 국립통일교육원장이 김기남에 대해 다룬 자유아시아방송 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