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왕자 근녕군 이농| 謹寧君 李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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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녕군묘 전경 | |||
출생 | 1411년[1] | ||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사망 | 1461년 12월 25일[2] (향년 51세) |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4번지일대 | ||
재위기간 | 조선 근녕군 | ||
1424년 11월 17일 ~ 1454년 6월 1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농(禯) | ||
부왕 | 부왕 태종 모친 정빈 고씨 양모 신빈 신씨 | ||
형제자매 | 부왕 기준 12남 17녀 중 9남 모친 기준 외아들 | ||
배우자 | 태안군부인 하양 허씨 (泰安郡夫人 河陽 許氏) | ||
자녀 | |||
작호 | 근녕군(謹寧君) | ||
시호 | 희의공(僖懿公) |
1. 개요
조선의 제3대 국왕인 태종의 4남이며 [3] 전주 이씨[4]] 근녕군파의 파시조이다. 세종대왕은 1426년 이농(李禯)을 실제적인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1품 근녕군(謹寧君)에 임명하였다. 세종대왕(이도), 효령대군, 양녕대군과 친형제간이다. 태종의 후원과 세종대왕의 지원으로 문종, 단종때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왕위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세조의 왕위 찬탈을 합리화하는 정난공신(靖難功臣)[5]에 서명하지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14일간 음식과 물을 끊고 통곡하였다. 숙종때 조선 왕조의 종묘기록(조상 제사 기록)[6]에 '근녕군'을 종친 최고의 충신으로 공식 인정하였다.
후대에 고종(1872년, 고종9년)은 근녕군을 영종정경(領宗正卿)[7]에 추봉하였다.
2. 생애
어려서부터 시예(詩藝)를 좋아하였으며 평소 행실이 바르고 겸손하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정윤에 봉해졌다가 1424년 10월 근녕군에 봉해지고, 세종을 도운 공으로 익사공신으로 녹훈되었다. 1426년에 가정대부로, 1428년 7월에 종1품 군으로, 1430년 12월 정1품 군으로 승계되었다.세종대왕은 13살 어린 동생 근령군을 특히 총애하였다. 근녕군은 양녕대군, 효령대군의 아우지만 총명함이 난형난제로 뛰어났다고 한다. 1424년 조선왕조실록[8] 에 세종대왕이 내정에서 격구(擊毬)[[9]를 하였는데 효령대군 이보(李𥙷), 근녕군(謹寧君) 이농(李禯)이 입시(入侍)[10]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1426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족들이 실제적인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 명예직인 산관(散官)[11]에 쓰지 아니하고 이농(李禯)을 정1품[12]에 해당하는 근녕군에 임명하였다. [13]1455년 단종이 선위(禪位)[14]할 때 종실백관이 모여 동맹하는데, 혼자 정난공신(靖難功臣)[15]에 맹훈(猛勳)[16]하는 책에 서명하지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14일간 절식하며 통곡하였다. 숙종(17세기 후반)에게 올린 현손(玄孫)[17]인 원굉(元宏)[18]의 상소[19]로 그 충성과 큰 공업이 종친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비답(批答)[20]이 내려졌다.
1461년(세조 7년) 11월 15일에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고 유언하고 향년 51세로 별세하였다. 1872년(고종 9년)에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3. 가족관계
- 정부인 : 태안군부인 하양 허씨(泰安郡夫人 河陽 許氏) - 관찰사 증찬성 허지혜(觀察使 贈贊成 許之惠)의 딸
- 장남 : 옥산군 이제(玉山君 李躋, 1429 ∼ 1490)
- 며느리 : 함안군부인 함안 윤씨(咸安郡夫人 咸安 尹氏) - 증 함안군 윤공신(贈 咸安君 尹恭信)의 딸
- 손자 : 시안군 이탁(始安君 李擢, 1446 ~ ?)
- 손자 : 영인군 이순(寧仁君 李揗, 1448 ~ ?)
- 손자 : 강원부정 이징(薑原副正 李振)
- 손자 : 팽성부정 이손(彭城副正 李損)
- 손자 : 진강부정 이찬(鎭江副正 李攢)
- 손자 : 검성부정 이읍(劍城副正 李揖)
- 손녀 : 부사 증 참찬 조수견(府使 贈 參贊 趙壽堅)의 처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노비 출신
- 차남 : 우산군 정민공 이종(牛山君 貞愍公 李踵 ? ~ 1506) - 이복형 온녕군에게 출계
- 3남 : 달천정 이유(達川正 李踰, ? ~ 1454)
- 장녀 : 신상하(辛尙夏)에게 출가
- 차녀 : 현감 김현뢰(監察 金賢賚)에게 출가
- 외손자 : 건공장군 김영보(建功將軍 金永寶)
- 외손자 : 현감 김영진(縣監 金永珍)
- 외손자 : 김영호(金永瑚)
- 외손녀 : 이원(李瑗)의 처
- 외손녀 : 참봉 증 찬성 정규(參奉 贈 贊成 鄭潙)의 처
- 외손녀 : 현령 허윤관(縣令 許允寛)의 처
- 3녀 : 정석년(鄭錫年)에게 출가
- 4녀 : 군수 정수(郡守 鄭穗)의 처
- 외손자 : 정인후(鄭仁厚)
- 외손녀 : 현감 장세린(縣監 張世麟)의 처
- 5녀 : 부사 김희(府使 金僖)에게 출가
- 외손자 : 부사 김양언(府使) 金良彦, 1462 ~ ?)
- 외손자 : 부사 김양수(府使 金良秀, 1464 ~ ?)
- 외손녀 : 첨지 오령(僉使 吳齡)의 처
- 6녀 : 판관 정윤공(判官 鄭允功)에게 출가
- 외손자 : 별좌 정자란(別坐 (鄭子蘭)
- 외손자 : 첨지 정자지(僉知 鄭子芝)
- 외손자 : 봉사 정자형(奉事 鄭子蘅)
- 외손자 : 봉사 정자전(奉事 鄭子荃)
- 외손녀 : 부윤 이전(府尹 李㙉)의 처
4. 대중매체에서
[1] 음력 태종 11년[2] 음력 세조 8년 11월 15일[3] 태종의 9남:(요절한 왕자를 빼면 4남)이자 서5자. 서4자라면 1407년 출생이고, 1411년생이라면 서5자가 된다.[4] 전주이씨:전주 이씨의 시조는 이한(李翰)으로 조선시대 왕실은 한 분파(이성계 직계)이며, 전체 전주 이씨 인구 중 왕실 직계는 극히 일부다. 전주 이씨라고 모두 이성계의 자손은 아니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졌지만 모두 왕족은 아니다. 전주 이씨는 전국에 약 263만1,000명(2015년기준)로 전체 인구의 약 36% 이상이다. 왕족 직계는 전주 이씨의 약 0.4~1.1% 정도만 조선 왕족 직계 후손이다.[5] 정난공신(靖難功臣):'정난'이란 "난을 평정했다"는 뜻인데, 실상은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를 미화한 것으로 공신 책봉 서명은 충성의 증거였다.만약 서명하지 않으면 곧바로 체포, 고문, 심지어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6] 종묘기록 : 영원히 왕실의 일원으로 기억된다는 의미로 단순히 사후 제사를 받는 차원을 넘어서, 왕실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국가가 공식 인증한 것. 후손이 본받아야할 표본으로 국가가 공인한 인물이라는 의미[7] 영종정경 (領宗正卿):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관직으로, 왕실의 종묘를 관리하거나 왕실의 제사와 관련된 일을 맡는 직책. 이 직책에 추봉되었다는 것은 고인이 생전에는 왕실과의 관계가 깊었거나, 고인의 업적이나 충성심이 인정받아, 그가 사망한 후에 이 명예로운 직위를 후대에 의해 부여받았다는 의미[8]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1월 19일 경인 1번째기사 1424년 庚寅/擊毬內庭, 孝寧大君 (補)〔𥙷〕、恭寧君 䄄、敬寧君 謹寧君 禯、義平君 元生、順平君 群生入侍。[9] 격구(擊毬):말을 타고 채(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골대에 넣는 경기.원래 중국 당나라에서 들어온 귀족 스포츠였고,고려와 조선 초기에도 군사 훈련 겸 오락으로 즐겼다.세종은 격구를 군사 기량을 기르기 위한 훈련으로 장려했지만,본인도 **내정(궁 안)**에서 직접 즐길 만큼 관심이 많았다.[10] 입시(入侍):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뵈는 것[11] 산관(散官):실제 직무 없이 관직과 품계만 가진 관리[12] 정1품은 조선시대 가장 높은 품계를 의미하는 최고 직위로, 왕, 왕족, 고위 관료들이 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직책이다. 왕, 대제학, 의정부대신(좌, 우의정)[13]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4권, 세종8년 11월25일 갑인 2번째 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1년[14] 선위(禪位):왕이 자신의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넘기는 행위. 단종은 1455년에 세조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선위를 했다. 이 사건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이어졌고, 이는 정변의 일환으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단종의 선위는 강제적인 성격이 있었고, 세조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15] 정난공신(靖難功臣):세조의 왕위 찬탈이다. 1453년에 세조(이게)는 단종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여 정난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정난(靖難)**이라고 하며,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그 후 세조는 정난공신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그들의 충성을 보상하고, 세조의 정권을 공고히 했다.[16] 맹훈(猛勳):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서명한 공적을 기록한 문서[17] 현손(玄孫): 고조할아버지의 증손자, 즉 5대손[18] 원굉(元宏):조선 숙종 시대 사람(17세기 후반 ~ 18세기 초)으로 근녕군의 후손, 조상의 충절을 후대에 알리고자 상소문을 올렸던 인물[19] 원광(근녕군의 5대 손자)이 숙종(17세기후반)에 올린 상소내용 :“우리 조상 근녕군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할 때, 종실 백관들이 모두 정난공신 책에 이름을 올릴 때조차 홀로 거부하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14일 동안 절식하며 통곡했습니다. 이는 진정한 충성과 절개의 표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충절이 나라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습니다. 조상님의 의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해주시고, 후손들에게도 영광을 주시옵소서.”[20] 비답(批答):숙종의 공식 답변으로, 내용은 "근녕군의 충성과 절의는 종친 중 으뜸이다. 비록 시대가 지나 이제야 밝히게 되었으나, 그 뜻을 높이 드러내어 나라의 기강을 삼을 만하다."[21] 정빈 고씨: 정빈은 태종 당시 정1품으로 왕비에 버금가는 지위로, 자녀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어, 후궁 신빈과 다르다. 정빈 고씨는 태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 중 한 명으로 왕비를 제외한 후궁 중에서 최고의 지위였으며, 왕자 출산이 가능하고, 왕비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의 아들이 우선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지만, 정빈(정1품)의 아들인 근녕군이 그와 경쟁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 왕위 계승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지만, 후계자 지위에 도전하지 않고 태종의 사적인 관계에서 더 자유로운 역할을 수행했다. 《청장관전서》, 《조선왕조선원록》등 대부분의 사서에 정빈 고씨의 소생으로 되어 있으나 《선원계보기략》, 《태종조 고사 본말 - 연려실기술 제2권》[23]에는 신빈 신씨의 소생으로 되어 있다. 신빈 신씨로 기록된 이유는, 정빈 고씨가 근녕군 15세의 어린 나이에 돌아가셔서 신빈 신씨가 양아들처럼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 오랜 기간 양육한 신빈 신씨를 양어머니로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세종 8년(1426년) 7월 13일 기사에 근녕군의 어머니인 태종의 궁인이 졸했다고 되어 있는데, 신빈 신씨가 사망한 해는 1435년이다.[22] 외동아들: 세종실록 8년(1426년) 7월 13일에 고씨가 1남(근녕군)을 낳음으로 기록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