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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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조선귀족 백작 고중덕 高重德 | |
<colbgcolor=#b0313f><colcolor=#c0c0c0> 출생 | 1923년 2월 18일 (생존 시 [age(1923-02-18)]세) |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구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
본관 | 제주 고씨 |
가족 | 부: 고흥겸 |
친인척 | 증조부: 고영희 조부: 고희경 |
학력 | 게이오기주쿠대학 |
재임 | 1939년 ~ 1945년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1. 개요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본관은 제주로, 가문이 구한말 일제의 국권 피탈에 부역한 대가로 수여받은 조선귀족 작위를 일제강점기에 세습하였고 친일 부역 활동의 대를 이었다. 해방 후에도 장수하여 가장 오래 생존한 최후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었다. 다만 생존을 판별할 수 있는 근황은 2016년까지로, 그 이후로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인 1923년 2월 18일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구한말부터 일제에 충실히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집안이었는데, 증조부 고영희는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에 해당하는 매국노였고 조부 고희경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고흥겸은 목장 경영인으로 일하며 국방헌금을 헌납한 친일파였다.1939년 8월 14일 아버지 고흥겸이 세상을 떠나자 그가 가지고 있던 조선귀족 벡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해당 작위는 증조부 고영희가 1910년 국권 피탈에 협력한 뒤 그 대가로 몇 달 후 조선귀족령이 공포되며 받은 것으로, 원래 자작이었으나 조부 고희경 때 백작으로 승급된 것이다.
작위 세습 이후 일제 부역 활동을 이어갔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본군 학도병에 자원하기도 했다.
2.2. 해방 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조선이 독립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결정으로 불구속 송치되었으나 위원회 활동이 무산되면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고 넘어갔다.6.25 전쟁 이후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낙향해 농촌 지역 유지의 삶을 산 것으로 보이며, 1972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충남 예산 고덕면 선거구에 출마해 무투표 당선되기도 했다. 1974년에는 예산군농협 조합장을 맡았고, 1977년 12월 9일 '새마을 포상자'로 지정되고 새마을운동 근면장을 수여받았다. #
2011년 3월 8일 본인의 가문이 소유한 재산을 국고로 귀속한다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관련 조치에 반발, 해당 법령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등 친일파 재산 반환 소송에 나서며 잠시 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이 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패소하였고, 결국 가문 재산의 국고 귀속을 막지 못했다. #
2011년 4월 당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고 있었고, 2014년에도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 #
2016년 4월 15일 경기도 성남시의 성남도시개발공사가 작성한 대장동 토지조서에 본인 명의로 된 사유지 내역이 포착되었다. 이 자료에 따라 2016년에도 생존해 있음이 확인되었다. # 1923년생이니 2016년 당시 만 93세로,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 압도적으로 가장 오래 생존한 인물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의 근황은 전해지지 않으며, 따라서 생존·사망 여부도 불명이다.
3. 여담
- 공식적으로 기록된 조선귀족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전체 인물 중 마지막 생존자에 해당하며, 2016년까지의 생존이 확인되었으며 이 시점 기준으로 해도 최후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극한 인물이다. 물론 해방된 독립국 대한민국에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부역했다는 본인과 가문의 내력이 자랑은커녕 공개할 만한 이력조차 못 되므로, 근황을 자의로 알릴 일은 없을 듯하다.[1]
- 본인이 살아생전에 남긴 기록들을 확실히 지우고 가려 했는지 2010년대에 비해 본인 성명 '고중덕'이 포함된 뉴스 보도 기사들이 상당수 삭제되었다. 이로 인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동명이인인 고중덕 전 해군참모차장이 언급된 기사조차 다수 삭제된 상태.[2] 인터넷에서 본인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전파되자 디지털 장의사 등을 동원했는지, 온라인상에 본인의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다.
- 1923년생으로, 2016년을 끝으로 근황이 더 이상 공개되지 않아 이후 행적은 불명이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계속 생존해 있다면 2023년에 만 100세에 도달했을 것이다. 다만 2024년 기준 1923년생 인물의 생존율은 0.35%에 불과하므로 가능성은 매우 낮다.
- 2005년 게시된 자료에서도 고중덕의 사진은 확인되지 않는다.#
- 본인의 증손자임을 주장하는 한 네티즌이 디시인사이드 해외야구 갤러리에서 활동했었는데, 다른 네티즌들이 "증조할아버지의 근황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일절 응답하지 않은 채 사라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