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대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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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조선과 연나라의 대외 관계를 다룬다.2. 고고학적 추이 분석
연나라와 고조선 모두 후기 외에는 남은 기록이 전무하기에 충돌한 기록 또한 남은 게 없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연나라가 상주 교체기에 하북 북부에 봉건된 소국으로 출발할 당시에는 고조선 혹은 고조선의 직계 선조인 위영자-십이대영자 문화권 사이에 장가원 상층 문화권을 비롯한 토착 종족들이 있어 적어도 서주가 힘을 유지하던 춘추 이전까지는 크게 충돌할 일이 없었으나, 만만찮은 적수인 장가원 상층 문화권을 소화하고 난 춘추 시대 초기에는 드디어 연나라의 영역이 십이대영자 문화권이 기존 차지한 요서까지 뻗어나오면서 분쟁, 교류 등을 비롯한 과정을 겪게 된다.
고고학 발굴로 드러난 추이를 요약하면 기원전 10~8세기는 연나라가 고조선의 선조가 되는 예맥계 부족들을 점차 밀어내면서 동진하는 연나라 우세기, 기원전 8세기에 동호 혹은 산융 & 고조선에게 연나라가 대패하면서 이백 여 년 동안 개척해놓은 영역을 모두 잃고 요서에서 밀려나 기원전 5세기까지는 요서 바깥에서 세력 균형을 이룬 고조선 우세기, 기원전 5세기 춘추 말기부터는 삼백 년 동안 축적한 실력을 바탕으로 다시 요서로 치고들어와 3세기 후반까지 고조선을 요서에서 밀어내면서 요동으로 퇴축시켜 한동안 세력 균형을 이룬 대립기, 후술할 진개의 정벌로 고조선을 요동에서 완전히 몰아내다가 조, 제, 진에게 연나라가 타격을 입으면서 한동안 청천강 방어선을 기점으로 고조선과 세력 균형을 이룬 3세기 초반~연나라 멸망기, 이렇게 네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겠다.
요약하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결국은 고조선이 밀려나는 구도지만, 그래도 아예 진(晉)에게 소멸당한 적족, 진(秦)에게 소멸당한 융족, 파촉에 비하면 다른 새외 부족들에 비해서는 중원 국가를 상대로 잘 버티고 사회발전도도 높인 경우라고 보면 되겠다.
한편 여기서 의미가 큰 사항이 둘 있다. 연나라가 봉건 당시 다른 중원 국가들에 비해 상나라 유민들의 지위가 대단히 높은 편이었던 것, 그리고 연나라와 위영자-십이대영자 접경 지대에 상나라식 묘제와 위영자문화식 묘제가 절묘하게 합쳐졌고 부장품 또한 그런 상황인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음이다.[1] 고고학자들은 연나라 내부 상나라 유민 세력과 위영자-십이대영자인들이 우호적 교류도 한 것 같다는 분석으로 넘어가지만, 기자조선설을 떠올려보면 의미심장한 사항이다.
3. 문헌 사료에 드러난 관계
기원전 323년 연나라의 왕 역왕 희퇴가 칭왕하고 동쪽으로 진출하자 조선왕 1세는 주나라 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칭왕하고 연을 치려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신 대부례가 조선왕 1세에게 간언하여 조선왕은 전투태세를 중지하였고, 대부례를 연에 보내 설득하게 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하는 뜻을 내비쳤다. 그 결과 연나라의 고조선을 향한 공격은 중지되었다. 위 고고학 분석 결과와 연동해보면, 고조선이 요서를 거의 잃어가는 가운데서도 요동으로 세력을 침투해가면서 체제를 일신하며 힘을 모으는 한편, 아직 요서의 연나라 영역 안에는 연나라에게 복종하면서도 자치력을 유지한 동대장자 유형이 잔존한 상황이었다.
일단 이 시기는 고조선이 요동 방어선을 구축해서 연나라를 막으며 세력 균형을 이룬 상태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281년 무렵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과 전쟁을 하고 승리해서 2000리 정도의 영토를 개척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281년에는 이미 연이 요동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고학으로도 입증되는 사항이다.[2] 고로 연도의 경우 기원전 281년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발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추정해보자면 대략 기원전 300~282년 사이에 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지도》에서는 진개의 활동시기를 기원전 281년이라 추측 하였는데(지도 사진), 지도 사업이 유사역사학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폐기되는 바람에 비정 근거가 알려질 수 없었다.
다만 진개의 활약 시기를 기원전 300년에서 282년 사이 시기로 추정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데, 이러한 정황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 진개의 손자이자 형가의 진시황 암살시도로 알려진 형가의 동료,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라고 한다. 그리고 진무양은 이때 형가가 진시황 암살을 위하여 고용한 장사였다고 하는데,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노인은 아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조무령왕이 조나라 북부에 군을 설치하고 요새를 쌓은 이후, 진개가 흉노들을 격퇴했다고 적으며, 진개 이후에 조나라의 명장 이목이 흉노를 또 다시 무찔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목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목의 활동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272년 전후로 추측된다. 조무령왕은 기원전 300년 즈음에 요새를 쌓았으며, 이목이 흉노를 격퇴한 시기는 조나라의 기록[3]과 그의 사망년도가 기원전 229년임을 생각하면[4] 기원전 272년~265년 즈음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진개의 활동시기는 기원전 300년에서 270년 사이로 추측되는데, 이는 연나라의 전성기이자 연나라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연소양왕의 제위시기와 일치하므로, 연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시기도 적절하다. 왜냐하면 연나라는 연소왕의 즉위 전까지는 자지가 날뛰는 등 매우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
또한 연소왕의 아들인 연혜왕은 명장인 악의를 쫓아내는 삽질에 집권하자마자 제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한, 위, 초 3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등 연혜왕 집권기엔 연나라 입장에서도 흉노에 신경 쓸 시기가 아니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정황증거만 있을 뿐, 분서갱유로 인해 연나라의 사서가 타 국가들의 사서와 같이 소실되어 구체적인 기록이 남지 않아서 전쟁의 시기와 경과 등은 알 수 없다.
이 전쟁 이전 고조선은 요동, 한반도 북부, 만주 서부를 차지하던 나라였지만, 대패한 나머지 고고학적 자료 등을 종합해보면 요녕 지방을 상실하고 한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일부 지방만 차지하는 소국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한 연나라는 연혜왕의 실책으로 제나라땅을 싸그리 잃고, 이후 조나라와의 전쟁으로 병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기 때문에 고조선이 멸망당하는 일은 당대에는 없었고, 고조선보다 먼저 망했다.
연나라가 진나라에게 멸망하고 초한쟁패기에 중원이 혼란스러워지자 조나라, 연나라, 제나라 유민들이 대규모로 고조선에 망명했는데 연나라는 고조선의 이웃나라인 만큼 망명자 수가 특히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위만이 연나라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5]
4. 관련 사건
5. 관련 문서
[1] 겨우 몇 개 밖에 되진 않으나, 묘주는 위영자문화권 유력자와 결혼한 상나라 유민측 신분 높은 여성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2] 사실 사기 기록에서 1년, 2년 차이나는 것 정도나 각 나라측의 기록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긴 하다. 사마천부터 분서갱유와 초한쟁패로 사료를 수집하는데 애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3] 조나라의 기록에 마지막으로 흉노가 등장한 것은 사기 조세가 조혜문왕 편에서 기원전 272년, 흉노의 부족 중 하나였던 동호의 변경 불모지를 개간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 이후로는 흉노가 등장하지 않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목이 흉노와 전쟁을 벌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4] 이목은 심지어 자연사도 아니고, 당시 전쟁에서 싸우던 장수였으나 모함을 받아 죽었다.[5] 다만 사서의 기록을 보면 위만은 순수 연나라인보다는 고조선과 연의 경계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