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uby(Лжедмитрий,ruby=Lzhedmitry)](False Dmitry).러시아에서 혼란 시대라 부르는 시기에 이반 4세의 막내 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를 참칭한 3명의 사기꾼[1]을 칭하는 표현이다.
2. 배경
러시아는 오랜 기간 바이킹 출신 모험가이자 초대 노브고로드 공작 류리크의 부계 자손들, 소위 류리크 왕조의 군주들이 다스려왔다. 하지만 이반 4세가 선포한 루스 차르국 시기에 이르러 러시아의 군주 자리를 세습해오던 황실의 핏줄이 끊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루스 차르국을 선포한 이반 4세의 첫 부인 아나스타샤가 낳은 직계 아들들 중 장남인 이반 이바노비치가 황태자로 공인되어 차기 황위를 계승할 예정이었고, 황태자비 옐레나 역시 임신한 상태였는데, 이반 4세는 태자비가 높은 체온 때문에 너무 더워서 얇은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복장이 경박하다면서 며느리를 마구 구타하였고, 그 바람에 태자비는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당연히 황태자는 이전 아내들을 수도원에 보낸 것도 모자라 왜 죄 없는 아이를 태어나기도 전에 죽이냐고 아버지에게 항의했지만, 이미 미쳐 버린 황제는 쇠지팡이로 황태자까지 때려 죽였다. 황태자가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황제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큰 소리로 슬피 울면서 후회했지만, 결국 머리에 중상을 입은 이반 황태자는 3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일리야 레핀(Илья́ Ефи́мович Ре́пин, 1844년 ~ 1930년, 러시아),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Иван Грозный и его сын Иван 16 ноября 1581 года)>, 1885년, 캔버스에 유화, 199×254cm,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탸코프 미술관 소장. 본래 레핀은 이 그림에서 러시아 민중을 억압하는 기득권 세력과, 그들에게 탄압받고 저항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은유하려 했다. 즉 레핀은 황제를 억압자로 표현한 것. 그런데 재미있게도, 레핀이 황제의 표정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묘사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황제에게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고도 한다. |
황제의 다른 아들들은 다들 병약하거나 요절했고, 이반이 죽은 뒤 새 황제가 된 표도르 1세 역시 자식도 없이 얼마 못 가 요절했으며, 방계로 이을 여지가 있는 이반의 사촌과 그 가족들도 이미 이반에 의해 반역죄의 누명으로 죽임을 당한 지 오래였다. 결국 이렇게 류리크 왕조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반의 마지막 아내 마리야 표도로브나 나가야(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Нага́я)가 낳았다가 죽었다고 알려진 막내 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의 죽음을 놓고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많았던 까닭에[2] 어쩌면 죽지 않고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3. 가짜 드미트리'들'
3.1.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187, #0039A5 20%, #0039A5 80%, #002187);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류리크 왕조 | 고두노프 왕조 | ||
이반 4세 | 표도르 1세 | 이리나 고두노바 | 보리스 고두노프 | |
고두노프 왕조 | 비왕조 | 슈이스키 왕조 | 바사 왕조 | |
표도르 2세 | 가짜 드미트리 1세 | 바실리 4세 | 블라디슬라프 지기몬토비치 | |
로마노프 왕조 | ||||
미하일 1세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 표도르 3세 | 이반 5세 | |
표트르 1세 | }}} }}}}}} |
<colbgcolor=#0039A5><colcolor=#fff> | |||
| |||
출생 | 1581년 | ||
사망 | 1606년 5월 17일 (향년 25세) | ||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 |||
재위기간 | 루스 차르 | ||
1605년 6월 10일 ~ 1606년 5월 17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9A5><colcolor=#fff> 가문 | 미상 | |
이름 | 그리고리/유리 오트레피예프(Григорий/Юрий Отрепьев) | ||
아버지 | 미상 | ||
어머니 | 미상 | ||
형제자매 | 미상 | ||
배우자 | 마리나 므니셰흐 (1605년 결혼) | ||
자녀 | 없음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표도르 1세의 사후 공석이 된 보위에는 황제의 처남이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정통 류리크 왕조의 피가 흐르지 않는 인물이 차르가 되었다는 점은 물론, 황제의 통치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대귀족들이 대놓고 황제를 디스할 정도로 여론도 나빴으며 루스 차르국에 심각한 가뭄이 일어 수많은 백성이 굶주렸기 때문에 황제에 대한 불만이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짜 드미트리 사건의 시작과 혼란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가 등장했다.
당대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이 인물의 본명은 그리고리 혹은 유리 오트레피예프(Григорий/Юрий Отрепьев)이다. 진짜 드미트리는 1582년생이고, 드미트리를 자칭한 오트레피예프는 1581년생이었다. 가족들이 성직자가 되라고 맡긴 수도원을 탈출하고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가 되었다가, 떠도는 소문을 주워듣고는 자신이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고 진심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분위기에서 진짜건 아니건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은 황제 입장에서 골치 아픈 존재였다. 결국 황제는 명령을 내려 이 가짜를 체포하려 했으나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직감한 가짜 드미트리는 잽싸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망명을 선택해 이반의 막내 아들 드미트리인 자신이 류리크 왕조의 정당한 계승자 자격으로 황제가 되어야 한다며 원조를 요청했다. 비록 국가 단위의 지원을 약속받지는 못했으나, 몇몇 귀족들로부터 사적인 원조는 물론 이들 중 한 명의 딸인 마리나 므니셰흐와 약혼까지 하면서 황제에게 대항할 세력을 조직할 수 있었다.
1604년 폴란드인과 카자크인으로 구성된 용병 부대를 이끌고 루스 차르국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황제는 가짜 드미트리의 숙부를 데려와 진짜 드미트리는 죽었으며 저놈은 가짜라는 것을 입증하려 시도했지만 가짜 드미트리가 오히려 그때 죽은 인물은 자신의 대역이었다고 당당하게 맞서자 황제에 불만이 많던 세력들이 죄다 가짜 드미트리 쪽으로 붙어버리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아무래도 용병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어서 병력의 양과 질에서 불리한 가짜 드미트리의 군대가 대체로 정규군에게 밀리는 형태로 전개되었지만, 1605년 4월 보리스 황제가 급사하면서 황제의 군대도 즉시 깃발을 바꿔 가짜 드미트리의 편으로 돌아섰고, 1605년 6월 가짜 드미트리가 모스크바에 입성하면서[3] 귀족들도 가짜 드미트리의 존재를 인정했고, 심지어 드미트리의 생모까지 그가 진짜 아들임을 선언했다 보니 마침내 가짜 드미트리가 러시아의 보위에 오름으로 상황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는 러시아의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상황이었다 보니 종교 문제로 대립하던 전통적 앙숙 폴란드에 친화적인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총애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막장이었던 탓에 민중들이 황제의 통치에 불평을 드러냈고, 러시아 귀족의 딸이 아닌 폴란드 귀족의 딸 마리나를 황후로 맞이한 것을 보고 귀족들도 황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실세였던 바실리 슈이스키가 기존의 태도를 번복하고 지금 황제로 있는 드미트리는 가짜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지만 황제는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일고의 대응가치도 없는 헛소문으로 치부했고, 바실리가 소문을 퍼뜨렸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처벌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606년 5월에 바실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거대한 호응이 뒤따랐고, 드미트리의 생모마저도 종전의 태도를 번복하고 저 자는 내 아들이 아닌 가짜라 선언하면서 가짜 드미트리의 11개월에 불과한 짧은 치세가 막을 내렸다.
폴란드로 도망가려던 황제는 성에서 도망치다 추락하는 바람에 두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는데 이 상태로 근위병에게 발각되어 끔살당했다. 이때 그는 배신에 충격을 받았는지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욕설을 총동원해서 퍼붓다가 죽었다고 하며, 이후 분노한 민중들은 그의 시체에 온갖 모욕을 가하여 훼손한 뒤, 시체를 대포에 집어넣고는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했다.
3.2.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
|
바실리가 반란을 일으켜 가짜 드미트리를 몰아내고 새 황제 바실리 4세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바실리도 결국 류리크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점[4] 때문에 정적들에게 공격을 받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편승해 1607년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또 나타났다. 당시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는 진짜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돌아와 류리크 왕조를 부활시키고 러시아를 다스릴 것이란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사태이기도 했다.[5]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임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것으로 알려진 첫 번째 가짜는 살아 있고, 그게 바로 자신이라는 골 때리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6]
상단에 첨부된 두 그림은 모두 당대에 제작된 것으로 이를 참고하면 어떤 관점에서 봐도 동일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목소리는 물론 체형까지도 완전히 달랐기에 헛소리라고 취급받았는데... 드미트리의 생모와 첫 번째 가짜의 아내였던 마리나가 이 사람을 지지하자 이번에야말로 진짜 드미트리가 나타났다고 믿은 러시아 민중들은 두 번째 가짜를 열렬하게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민중과 폴란드의 지원을 등에 업은 가짜 드미트리는 반란군 잔당을 규합하여 정규군과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에서 맞붙었는데 이때 황제의 동생 이반이 참패한 것을 황제의 조카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가 수습하면서 모스크바는 사수해낼 수 있었다.
모스크바 입성이 좌절된 가짜 드미트리 세력은 근교 투시노로 물러나 정착했으며, 자기 휘하의 인물들이 바치는 세금을 바탕으로 병력을 조련하고 성을 쌓는 등 러시아의 황제나 다름없는 수준의 대우와 활동을 했다. 이를 계기로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투시노의 악인(тушинский вор/투시니스키 보르)'이라는 별칭이 붙게 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처하자 황제는 스웨덴에 원조를 요청했고, 코렐라(Корела)[7]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면서 1609년 2월 스웨덴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하일은 병력을 이끌고 차례차례 가짜 드미트리의 세력을 분쇄해나가면서 가짜 드미트리는 칼루가로 도주했지만, 이러한 스웨덴의 개입은 폴란드에게도 좋은 빌미거리[8]가 되면서 폴란드도 러시아의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를 몰아세우던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폴란드군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고, 그 덕분에 기회를 얻은 가짜 드미트리는 다시 한번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한편 폴란드 군대를 막기 위해 이동 중이던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3만은 총사령관 미하일이 황제의 동생에게 암살당한 것도 모자라 용병료를 지급하지 않고 무시하는 바람에 스웨덴군과 러시아군의 반목마저 격화해 클루쉬노 전투에서 폴란드의 원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가 이끄는 5천의 윙드 후사르에게 탈탈 털리고 말았다.
이 패배로 인해 황제가 폴란드의 세임에 끌려가 절을 하면서 폐위당했고, 가짜 드미트리는 이 때를 노려 자신이 러시아의 정당한 황제임을 역설하며 인정받으려 했지만 러시아의 귀족들이 폴란드와의 협상대로 지그문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를 황제로 선출해 힘으로 밀어붙였기에 다시 칼루가로 도망쳐야 했다.
한편 황제로 선출된 브와디스와프는 가톨릭 신자였는데 황제가 되려면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자 지그문트는 아들의 즉위를 거부했고, 이를 핑계삼아 러시아의 직할 통치를 선언했다. 여기에 스웨덴마저도 폴란드와의 협상과 떼인 용병료 지급을 빌미로 러시아를 공격하면서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짜 드미트리는 다시 기회를 잡고 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재규합하여 중앙 정부에 대항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을 마구 처형하는 등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고, 결국 1610년 12월 그에게 불만을 품은 부하 표트르 아르슬라노비치 우루소프(Peter Arslanovich Urusov)의 배신[9]으로 살해당했다. 표트르 아르슬라노비치 우루소프는 가짜 드미트리의 시체를 아예 토막내버렸다. 이후 마리나는 코사크의 지도자인 이반 자루츠키[10]와 결혼한 후 우글리치 공작의 유지를 잇는다면서 그의 어린 아들 이반을 지도자로 내세워 저항을 계속했으나 미하일에게 연패를 면치 못했고, 공포정치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잃어버렸다 보니 결국 진압당한 뒤 이반 자루츠키와 마리나의 아들 이반을 비롯하여 그들을 지지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처형당했지만 마리나는 죽음을 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몇 개월 후인 1614년 12월 24일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3.3.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
가짜 드미트리 3세(Лжедмитрий III/False Dmitry III)라 부른다.아직 러시아의 동란이 마무리되지 않은 1611년 자신이 드미트리임을 자처하는 인물이 또다시 나타났다. 역사학자들은 시도르카라 불리던 보제[11]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코자크들과 프스코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프스코프의 도적'이란 별칭이 붙었다. 하지만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도 민중들에게 막중한 세금을 물리고, 공포정치를 펴면서 프스코프의 민중들에게 신망을 잃었고, 결국 스웨덴군이 프스코프로 침공해오자 도망쳤으나 1612년 5월 자신을 지지하던 보야르인 코반스키의 배신으로 체포된 후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1612년 7월 러시아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3.4. 네 번째 가짜 드미트리?
가짜 드미트리 4세(Лжедмитрий IV/False Dmitry IV)라 부른다.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가 활동하고 있던 무렵인 1611년 말에 나타났다. 이후 볼가 강 하류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아스트라한의 도적'이라는 별칭도 붙고, 북서쪽의 가짜 드미트리 3세와 남쪽의 가짜 드미트리 4세로 세력을 양분하는 듯했으나 1612년 초 갑자기 증발해 사라졌다.(...) 이 때문에 앞의 셋과는 달리 실존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4. 종결
더 이상 자신이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오지 않게 되자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후 이반 4세와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의 류리크 왕조는 대가 끊어진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어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왕조가 러시아의 마지막 왕조로서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치세까지 304년 동안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5. 의의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을 먹으려 하고 러시아는 폴란드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암투 속에서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는 이름이 가지는 가치는 워낙 컸던지라 러시아 제국은 가짜 드미트리들 때문에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심한 진통을 겪었다.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비교해보자면 지지층이 상당히 많이 다른데, 첫 번째의 경우 이반의 막내 아들 드미트리가 살아서 제위에 올랐으면 좋겠다는 러시아 민중들과 가짜 드미트리에게 빌붙어 자기 이득을 챙기려는 폴란드 귀족들이 반반씩 섞여 있었으나 두 번째의 경우 첫 번째 가짜에게 실망한 일부 러시아 민중들로 인해 러시아인들의 지지율은 좀 내려간 대신 폴란드가 러시아를 잡아먹어서 '강점기'를 만들려는 야욕은 더욱 강해진 탓에 폴란드인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다. 마리나도 결국 폴란드인인 만큼, 러시아의 황후가 되어 한 몫 챙겨보겠다는 심리에서 두 번째도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두 번씩이나 된통 당해서인지 세 번째 이후의 가짜 드미트리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앞의 두 명의 가짜들과는 달리 별 소동조차 없었다.[12] 그놈의 드미트리 때문에 나라가 폴란드의 손에 넘어갈 뻔한 일이 두 번이나 발생한 데다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민중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약탈하고, 가혹한 세금을 물리는 바람에 러시아의 민중들도 이젠 황제보다는 자신들의 삶과 나라가 넘어갈 걱정을 더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세 번째와 네 번째 가짜는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
먼 훗날 18세기에 반란을 일으킨 예멜리얀 푸가초프도 가짜 드미트리들이 그랬듯 유폐되어 의문사한 표트르 3세를 사칭하며 반란의 당위성을 선전하기도 했다.
6. 매체에서
-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동명의 오페라가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다루는 내용이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3년 9월 29일 방송분에 등장하였다. 2019년 3월 24일 방송분에 또 등장하였다.
- 킹덤 언더 파이어에서도 드미트리 Jr.라는 인물이 캠페인 중에 2명의 가짜가 등장하는데, 이 캐릭터의 경우 큐리안의 추적을 피해 세운 대역이다.
- 은하영웅전설의 알베르트 대공과 가짜 알베르트 대공 사건이 이것을 모티브로 하지 않았냐는 의견이 있다.
-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에서는 표도르 2세가 조선과 손을 잡고 가까워지는 바람에 산 채로 대포에 들어가서 발사되는 신세가 된다.
-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편에서는 전근대편인 21권에서 다루며, 진짜 드미트리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다룬 108~109페이지에선 드미트리가 사고로 죽었다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발표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안 봐도 비디오야! 비밀로 [ruby(드,ruby=디)]미트리를 죽이고 오리발 내미는 거지!"라 말하는 장면을 넣었다.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 일당을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하는 장면도 118페이지에서 나온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라에가르 타르가르옌의 아들이라는 아에곤 타르가르옌이 사실 가짜 드미트리를 모티브로 한 사칭범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 모드인 TNO에서 세르게이 타보리츠키로 플레이 뒤 황폐화된 러시아의 이츠쿠르크 지역에서 자신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로 지칭하는 지도자의 군벌이 등장하는데 해당군벌의 지도자는 전 NKVD 소속의 폴란드인 스파이인 미하일 골레네옙스키로 생긴 것만 로마노프 황가와 유사하지 실질적으론 관계가 없는 인물이나 황폐해진 러시아를 재건하고자 전 지도자 타보리츠키가 내세운 허황된 알렉세이 구세주 이론과 사회주의 사상을 조합하여 나라를 통치한다. 현실의 가짜 드미트리와 달리 탐욕으로 가득한 사기행각이 아니라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고자 하는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 그를 아는 지인들은 이런 행위를 묵인해준다. 그러나 바로 옆 부랴티야의 군벌 지도자인 디키는 이를 눈치채고 그를 폴략(폴란드인을 비하하는 비속어)이라며 멸시하고는, 진정한 알렉세이인 자신이 가짜 알렉세이를 처단하겠다고 선언하며 전쟁을 선포한다.
- 워해머 판타지의 나스타샤 로스콜니코프는 가짜 드미트리+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과거 자신이 차르 보리스 보카의 장녀 카타린 보카에게 죽을뻔한 차르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믿었으며,처음에는 숨겼지만, 한번 말을 꺼내니 엄청난 설득력을 가지고 추종자를 늘리게 된다.결국 그녀는 카타린 보카에게 쫒겨 모든 추종자를 잃어버리는데,나중에 알고보니 슬라네쉬가 일부로 그녀를 꿈을 통해 속인후, 키슬레프를 분열시키려는 음모였음이 들어난다.
[1] 4명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마지막 1명은 실존했는지 여부조차 의심스럽기에 일반적으로는 3명으로 본다.[2] 나중에 황제가 된 보리스 고두노프가 바실리 슈이스키를 시켜 조사한 후 드미트리는 손칼을 가지고 놀다가 간질 발작 때문에 목에 칼이 찔려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류리크 왕조의 피를 이은 드미트리가 살아있다면 보리스 자신의 정통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사고사로 조작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3] 보리스의 아들이자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표도르 2세는 이와 함께 폐위당한 직후 살해됐다.[4] 사실 바실리도 남계 혈통으로 따지고 들면 류리크 왕조의 후손이긴 했지만, 슈이스키 가문은 류리크 가문과 촌수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계 혈통으로 따지면 직계에 훨씬 가까운 귀족들이 차고 넘쳤다.[5] 첫 번째 가짜와는 달리 이 인물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유대인이나 러시아와 폴란드의 국경 지대에 수감됐다가 탈옥한 죄수 정도의 추측만 존재한다. 이 인간은 첫 번째 가짜와는 달리 자기가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전임 황제의 막내 아들이라는 점으로 인해 단절된 황실의 혈통을 잇기 쉽다는 점을 이용해 러시아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등에 업어 한 몫 잡아보려는 심보로 자기가 드미트리라고 우긴 것.[6] 반란군들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으나 간신히 사태가 진정되어 복귀할 수 있었으며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된(...) 그 인물은 자신을 모시고 같이 도망치던 시종이라고 얼버무렸다.[7] 스웨덴어로는 켁스홀름(Kexholm), 핀란드어로는 캐키살미(Käkisalmi), 현재 러시아의 프리오제르스크.[8] 당시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3세 바사는 본래 스웨덴 왕자 시기스문드로, 스웨덴 왕도 겸했으나 루터교회 국가의 가톨릭 왕이자 폴란드에 체류해야 하는 약점을 잡혀 숙부 칼 9세에 의해 폐위당했다. 이후 지그문트는 스웨덴 왕위 회복을 평생의 목표로 삼고 폴란드의 대외정책을 추진하면서 폴란드 귀족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스웨덴의 개입은 폴란드에게도 가짜 드미트리 사태에 직접 개입할 좋은 명분을 제공한 셈.[9] 자신의 친구였던 카시모프 칸이 가짜 드미트리에게 처형된 일로 가짜 드미트리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후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금방 석방되었고, 아스트라한으로 가서 네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돕다가 크림 칸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칸의 군사자문 등을 하며 살았으나 1639년 처형당했다.[10] 폴란드의 지원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서 가짜 드미트리 2세에게 보야르의 칭호까지 받기도 했다.[11] Diakonos. 정교회에서 주교-사제-보제의 3성직 중 마지막인 최하급 성직자. 가톨릭의 부제와 같음.[12] 사실 가짜 드미트리 말고도 자신이 표도르 1세의 아들인 척한 사기꾼들도 여럿 있었다. 물론 이쪽은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채 전부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