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 Ordo Clericorum Regularium Ministrantium Infirmi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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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75996,#475996><colcolor=#ffffff,#ffffff> 이명 | 가밀로회 | ||||
설립 | 1586년 3월 18일 ([age(1586-03-18)]주년) | ||||
설립자 | 카밀로 데 렐리스 | ||||
총장 | <colbgcolor=#475996,#475996><colcolor=#ffffff,#ffffff> 초대 | 카밀로 데 렐리스 M.I. | |||
현재 | 페드로 트라몬틴 M.I. (Pedro Tramontin) | ||||
규모 | 1,121명 (2021) | ||||
종교 | 가톨릭 | ||||
웹사이트 | <colbgcolor=white,#1f2023> | ||||
소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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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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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 灵医会 / 靈醫會 |
1. 개요
가톨릭의 의료 봉사 수도회. 정식 명칭은 '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지만, 설립자인 성 가밀로 데 렐리스의 이름을 따온 '가밀로회'라는 명칭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설립자 렐리스는 불치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병원의 간병인으로 일하다가 그곳에서 기본적인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말미암아 그는 온전하지 못한 의료 체계로 인해 고통을 받는 환자들을 치유하고자 해당 수도회를 창설했다. 가밀로회에 소속된 수도자는 이름 뒤에 M.I.가 붙는다.
2. 특징
가밀로회는 여느 수도회와는 달리 세 가지의 기본적인 서원인 '청빈', '정결', '순명'뿐만 아니라 '환자에 대한 정성 어린 간호'라는 네 번째 서원까지 발한다.가밀로회의 일원들은 적십자가 박힌 검은 수도복 혹은 하얀 수도복을 착용한다. 설립자 렐리스는 자신의 신앙심과 의료 봉사 정신을 동시에 의미하는 상징을 찾던 중 붉은 십자가를 채택했고, 이는 역사적으로 해당 문양이 구호 활동의 상징으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가밀로회의 십자가는 훗날 적십자 운동의 상징에도 영향을 끼쳤다.
3. 역사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16살에 군인이 된 카밀로 데 렐리스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 참전했고, 그 와중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 1575년 그가 속해 있던 부대가 해체되어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에 위치한 산 자코모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나, 그곳의 다른 사람들과 종종 다투는 바람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결국 쫓겨나고야 말았다. 이에 그는 홧김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도박에 탕진해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마땅히 머물 곳을 물색하던 중 풀리아에 위치한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원의 공사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여전히 그는 특유의 거친 성품을 내비치고 때때로 도박에 휘말렸지만, 수도자들은 언제나 그에게 친절하고 관용적인 태도로 대했다. 시간이 흘러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려 개심한 그는 같은 해 1575년 가톨릭으로 귀의했다. 그는 카푸친의 수도자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과거에 제때 치료받지 못해 도무지 낫지를 않는 부상 탓으로 결국 수도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렐리스는 이후 로마로 돌아가 그가 예전에 입원했던 산 자코모 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병원 내 미비한 의료 시스템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넘쳐나는 현실을 통감했다. 이에 그는 가톨릭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몇몇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을 모아 로마에 있는 병원들을 방문해 환자들을 보살피는 봉사를 시작했다. 활동을 거듭할수록 의료 봉사를 체계적으로 전담하는 단체 설립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1584년 성품성사를 통해 사제가 되자 '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창설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로부터 정식 단체로 인준을 받았고, 1591년 교황 그레고리오 14세에 의해 수도회 자격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