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영란전쟁 Second Anglo-Dutch War | |
|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일부 | |
| 기간 | |
| 1665년 3월 4일 ~ 1667년 7월 31일 | |
| 장소 | |
| 북해, 영국해협, 잉글랜드, 네덜란드 공화국, 북아메리카, 카리브해 |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뮌스터 주교후국 | |
| 지휘관 | |
찰스 2세 제임스 2세(포로) 조지 멍크 라인 공자 루퍼트 토머스 테드만크리스토프 베른하르트 폰 갈렌 | 요한 더빗 미힐 더라위터르 야콥 판 바세나에르† 피에테르 더비터† 코르넬리우스 더빗 빌렘 반헨트 요한 마우리스 클라우스 폰 아헬펠트 |
| 병력 | |
| 선박 139척 군인 21,000명 총 4,200정 | 네덜란드 공화국: 선박 131척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군인 21,000명 |
| 피해 | |
| 7,210명 사망 7,000명 부상 2,000명 포로 선박 29척 파손 선박 2척 포획 | 네덜란드 공화국 5,150명 사망 3,000명 부상 2,500명 포로 선박 23척 파손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8명 사망 |
| 결과 | |
| 네덜란드 공화국의 승리 브레다 조약 네덜란드령 기아나획득 |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서 두번째로 발발한 해상전쟁으로 1665년부터 1667년까지 진행되었다.2. 배경
제1차 영란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터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은 무역과 해상에서 경쟁관계였다. 영국의 정치인들은 해상무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얻기 위한 야망을 표출한 상태였고 이와 더불어 잉글랜드의 성공회와 네덜란드의 장로회는 서로에게 이념적 위협이 된다고 여겨왔다. 제1차 영란전쟁에서 영국이 이겼으나 네덜란드는 작은 배를 위주로 운영하면서 영국의 상선들을 억류하는 상황도 계속해서 빈번히 연출되었다. 이후 올리버 크롬웰은 스페인 제국과의 전쟁을 하게되고 이에 대한 여파로 영연방은 스페인 및 이탈리아 남부 지역들과의 무역을 잃게 된다. 네덜란드는 이를 기회 삼아 더 많은 무역시장을 점유하게 된다. 또한, 영국은 항해조례, 관세, 제조업 규제 등 보호 무역을 지속했고 이에 반해 네덜란드는 영국과 다른 조세 적용으로 인해 상품의 가치가 더 매력적이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팽창하게 되었고 영국은 폐쇄적으로 변하게 된다.한편, 영국은 왕정복고를 통해 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세계 무역에서 네덜란드보다 우위에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찰스 2세는 네덜란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메리 헨리에타가 사망할 때 아들 윌리엄 3세의 후견인으로 찰스 2세를 지명했다.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의 스타트허우더가 될 인물이었고 이로 인해 영국은 네덜란드 정치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네덜란드에서는 코르넬리우스 데 그라에프와 안드리에스 데 그라에프가 1660년 영국에 선물을 보내면서 영란관계를 풀어보려고 했고 협상에 들어가게 된다. 1663년, 프랑스 왕국의 루이 14세가 남네덜란드(현 벨기에) 지역을 편입시키려 했고 이로 인해 영국과 네덜란드는 관계가 좋아지게 된다. 당시 수상이었던 클래런던 백작도 프랑스가 영국의 주적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클래런던의 정적이었던 헨리 베넷과 토머스 클리퍼드가 1664년 제임스 2세와 협업해 현재 영국의 해상무역에서 밀리는 이유를 네덜란드라고 결론을 내리고 전쟁을 치러서라도 우위를 점해야 된다는 판단에 네덜란드에 보복할 정책들을 내세웠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와 뉴암스테르담의 장악할 야망을 드러낸다.
전쟁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할 쯤 영국의 사략선들은 영국 해군과 협력해 네덜란드의 상선을 공격 및 나포해 영국으로 데려가는 상황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네덜란드가 전쟁을 선포할 당시까지 약 200척의 선박이 나포되어 영국 항구로 보내졌다. 이 때 네덜란드는 새 법안에 의해 영국 국기에 먼저 경례를 했으나 영국은 네덜란드에 경례를 하지 않았고 네덜란드 지휘관들은 이를 치욕으로 느끼게 된다.
한편, 네덜란드는 제1차 영란전쟁 이후 더빗에 의해 해군을 개편했고 더 무거운 대포를 40에서 60문을 설치한 배들을 건조하고 이를 운영할 선장들을 모집하게 된다. 또한, 영국의 인구수의 1/4밖에 되지 않았지만 가난한 소작농이 대부분인 영국과 달리 네덜란드는 도시 인구수가 많아 자금이 빠르게 모였으며 영국보다 2배 많은 돈인 약 1100만 파운드를 전쟁에 사용할 정도가 된다. 네덜란드는 황금 시대를 맞아 호황을 누리면서 발전한 반면 영국은 흑사병과 이후 전쟁 중에 발발한 런던 대화재로 인해 예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도시의 인구가 줄고 자금 유출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 의회는 기록적인 예산인 250만 파운드를 편성했으나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을 방법이 없어 런던시에서 대출을 받는 것에 의존하게 된다.
1663년 말, 제임스 2세는 로얄 아프리카 회사의 이익을 보호할 명목으로 로버트 홈즈를 보냈고 카보베르데의 네덜란드 교역소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1664년 6월에는 서아프리카의 있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 소속 배들을 몰수했다.
1664년 6월 24일,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인 뉴네덜란드를 공격해 10월에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1664년 12월, 영국은 이즈미르에 정박한 네덜란드 함대를 공격했고 네덜란드는 익년 1월 위협을 느낄 시 영국 전함에 대한 공격을 허용한다. 이에 찰스 2세는 1665년 3월 4일을 네덜란드에 대한 선전포고의 날로 정하게 된다.
1665년 3월 4일, 카디즈와 영국 해협에서 네덜란드 국적의 수송선이 영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면서 네덜란드는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3. 전개
영국은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게 되었지만 내부 상황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런던에서는 흑사병이 돌고 있었으며, 1666년 9월 2일 런던 대화재가 발생해 런던 시가지의 13%가 전소되고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당시 찰스 2세는 의회와 극심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이로인해 전비 조달은 사략과 나포에 의해서만 조달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즉, 패배를 감당 할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2세는 이 전쟁에서 이기면 영국이 상업을 장악해 단번에 부가 왕실로 몰릴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의회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쨌든 돈은 필요했으므로 전쟁 자금은 대출에 의존했다.3.1. 로스토프트 해전
네덜란드 함대가 영국 상선 20척을 나포하자 요한 더빗은 판 바세나르에게 축하 대신 해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영국을 공격하라고 편지를 보냈고, 이에 판 바세나르는 분노하여 북해로 나갔다. 6월 11일, 제임스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 109척과 네덜란드 103척이 맞닥뜨렸으나 바람이 잔잔해 전투가 불발됐다. 6월 12일, 양측이 로스토프트 남동쪽 40해리에서 접근했으나 네덜란드 함대는 훈련 부족과 느린 상선 때문에 제대로 편대를 구성하지 못했고, 판 바세나르는 공격하지 못했다. 6월 13일, 판 바세나르는 공격을 시도했으나 바람 변화와 혼란으로 양측이 서로를 지나치며 포격했으며, 네덜란드 측은 피해가 컸다. 전방 지휘관 코르테나르와 스텔링베르프가 전사하고 지휘 체계가 취약해졌으며, 영국 함대는 훈련된 편대 운용으로 네덜란드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면서 혼란을 이용해 포위하려 했다.영국 함대가 세 번째로 방향을 바꾸자 네덜란드 함대도 따라가려 했으나, 바람이 예상과 달리 남서쪽으로 불면서 네덜란드 함대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깃발 신호도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네덜란드 함대는 사실상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고, 영국은 이를 이용해 네덜란드 함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네덜란드 함대는 더 무거운 포를 가진 영국 함선에 맞서며 필사적으로 전열을 복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정오경, 판 바세나르의 기함 에인트라흐트는 제임스 공작의 HMS 로열 찰스와 직접 교전했으나, 오후 3시 화약고에 맞아 폭발하며 판 바세나르를 포함한 거의 전원이 사망했다. 이후 네덜란드 함대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함대는 두 개 그룹으로 나뉘어 퇴각했으며 많은 선박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 일부 선박은 불타거나 침몰했다. 6월 14일 아침, 가장 빠른 영국 프리깃함들이 주력 함대보다 앞서 파견되어 네덜란드 함선 6척을 나포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과 확대에 나서지 않고 그냥 철수하였다. 이는 나중에 화근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승리한 영국은 1년 간 도버 해협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3.2. 4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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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4일 전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3. 성 제임스의 날 해전 및 홈즈의 모닥불
4일 전투에서 승리한 네덜란드는 영국의 피해 상황을 과대 평가하기 시작한다. 당시 네덜란드의 실권자였던 요한 더빗은 영국 함대가 함선 손상을 복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며, 필요한 물자조차 확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템즈 강 하구를 봉쇄해 영국의 항복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미힐 더라위터르 지휘하에 북해로 재출항해 영국을 유인하고, 필요시 해병대 2700명을 동원해 적 함대를 해안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협조 부재와 악천후, 위험한 지형 때문에 계획은 무산됐다. 8월 1일 더라위터르는 영국 함대가 출항한 것을 확인하고, 4일 북포어랜드에서 88척으로 영국 89척을 추격했다. 풍향 변화와 고기압 지역으로 인해 네덜란드 함대는 진형을 잃었고, 영국은 이를 이용해 공격했다. 전투에서 전위 부대 지휘관들이 사망하고, 전열 일부가 깨졌으나, 더라위터르는 주요 공격을 견디며 대응했다. 후위 지휘관 코르넬리스 트롬프는 직접 개입해 영국 후위 함대를 공격하고 35척을 물리쳐 일부 함선을 파괴하거나 퇴각시켰다.다음 날 아침 트롬프는 뒤늦게 함대를 돌아보며, 살아남은 영국 후위 함대의 주의를 받으면서 플랑드르 해안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더라위터르가 나머지 영국 함대를 흩뜨린 사실을 전해 들었다. 8월 6일 그는 부상당한 동료와 함께 함대를 무사히 플리싱겐 항구로 이동시켰다. 더라위터르는 4일 밤과 5일 새벽 사이 전열을 재정비하며, 불리한 위치와 동풍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을 견디고 함대를 보호했다. 일부 함선은 탈락했지만, 영국군의 화력 부족과 날씨 덕분에 네덜란드 함대는 큰 손실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피해는 많았으나 함선 손실은 적었고, 네덜란드는 복구할 수 있었으나 영국은 재정 문제로 승리를 활용하지 못했다. 이후 양측은 소규모 충돌과 보복을 이어갔고, 더라위터르와 트롬프 사이에는 서로의 책임을 놓고 불화가 발생했으며, 트롬프는 정치적 문제로 일시적으로 해임되었다.[1][2]
오라녜파와 반오라녜파가 싸우는 사이에 영국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바덴 해로 접근할 수 있었다. 특히 오라녜파인 부아트는 영국의 외교관 가브리엘 실비우스와 몰래 연락하면서 더빗을 몰락시킬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이 사실이 들통나자 부아트는 반역죄로 체포하였다. 오라녜파는 이를 반오라녜파가 꾸민 거짓음모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처형되었다. 이같은 사건으로 네덜란드는 제대로된 싸움 준비를 할 수 없었다.
영국 해군 소속 로버트 홈즈 소장이 이끈 영국 함대는 네덜란드 상선 약 140~170척이 모여 있던 플릴란트로 향했다. 홈즈는 덴마크 상선을 통해 확보한 네덜란드 수로 정보를 활용해 약 140척 이상의 네덜란드 상선과 두 척의 경순양함이 정박한 것을 발견했다. 당초 플릴란트 상륙과 마을 공격이 명령이었으나, 상륙 지원 함정들이 좌초되고 마을이 작아 상륙이 비효율적임을 판단하여 먼저 상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1시경 다섯 척의 화공선을 이용해 네덜란드 선박을 공격했으며, 이로인해 약 130척의 선박이 불에탔다. 8월 20일 아침 홈즈는 테르스헬링마을의 주요 설치물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되어 상륙을 지시했고, 일부 민간인이 달아난 뒤 남은 마을과 창고를 약탈 및 소각해버렸다.
영국이 플릴란트와 테르스헬링을 불태우자 갈라져있던 네덜란드 여론은 봉합되기 시작했다. 영국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여론이 지배적이게 된 것이다. 한편 전비가 다 떨어져가자 찰스 2세는 의회에 돈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브레다에서 평화회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찰스 2세의 술책이었다. 당시 찰스 2세는 루이 14세와 비밀 회담을 열어 영국을 지원하면, 프랑스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점령하는 것을 묵인하겠다고 제안했다. 즉, 찰스 2세는 브레다 회담을 지연시킴으로써 프랑스의 진격을 지렛대로 삼아 네덜란드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 했다. 회담이 지연되자 네덜란드는 영국에 심대한 타격을 줘서 휴전 협상을 하게 만들겠다고 결정했다.
3.4. 메드웨이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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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7년 이전, Van Soest, Raid on the Medway(메드웨이 기습) |
당시 영국 함대는 심각한 자금 부족으로 인해 출항하지 못하고 채텀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그래서 요한 더빗은 채텀 항구에 정박한 영국 함선들을 파괴해서 영국의 휴전 협상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많은 해군 장교들은 템스 강 하구의 모래톱때문에 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영국 법망을 피해 도망친 밀수업자를 항해사로 고용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네덜란드 함대는 대포로 무장한 약 60척의 중형 함선, 15척의 기동성이 뛰어난 소형 함선, 그리고 불타는 적함을 들이받아 불을 지르도록 설계된 이른바 화공선 12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 더라위터르가 이끄는 함대는 6월 6일 템스 강 어귀에 도착한뒤 작전 내용을 휘하 함장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함정들은 너무 무리한 작전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더라위터르는 '명령은 명령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작전을 강행하였다.
반면 영국은 네덜란드군이 템즈 강 하구로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비용 절감을 위해 3월 24일 요크 공작은 나포된 함선들의 승무원 대부분을 해산시키고 메드웨이 강에 경비함 세 척만 남겨두도록 명령해서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1667년 6월 9일, 네덜란드 함대 지휘관 반 겐트는 메드웨이 강으로 진입했다. 6월 10일 네덜란드 해병 800명이 미완성된 쉬니어스 요새를 점령하였고, 이후 강 하구에 해군 포대와 쇠사슬을 파괴해 버렸다. 이에 영국군은 뺏기느니 방패막이로 쓰자면서 함선들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네덜란드군은 화공선을 써서 영국 함선들을 불태웠고, 영국군 기함이었던 로열 찰스(Royal Charles)호를 나포하였다. 네덜란드 함대는 부두와 조선소를 파괴하지 않고 철수했으며, "정의로운 자위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해 신께 감사드린 후 바다로 나아갔다.
4. 결과
메드웨이 강 기습으로 영국은 휴전 협상에 나섰다. 네덜란드도 프랑스가 대규모로 침공하기 전에 영국과 휴전하려고 했다.1667년 7월 31일, 브레다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현재 뉴욕시가 있는 뉴네덜란드를 영국에게 넘기고 육두구 무역의 중심지인 인도네시아의 룬 섬 및 수리남의 설탕 재배지를 얻어냈다. 또한, 신트외스타티위스 섬과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교역소 또한 차지하게 된다.
네덜란드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와 영국 간 해상 무역 경쟁은 계속되었다. 이는 제3차 영란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