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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총독부 臺灣總督府[1] | 台湾総督府[2] Government-General of Taiwan | ||
1895년 6월 17일 ~ 1949년 6월 1일 | ||
설립 이전 | 해체 이후 | |
복건대만성 | 중화민국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다이호쿠 주 다이호쿠 시 (대만총독부 청사) | |
주요 총독 | 가쓰라 다로 노기 마레스케 |
<colcolor=#fff> 대만총독부 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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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타이완 섬에 설치한 통치 기관이다. 다이호쿠 시(오늘날 타이베이)에 위치했으며, 1895년 5월 10일에 설치되어 일제 패망 후 중화민국 국민정부로 타이완섬의 행정권이 이양된 1945년 10월 25일에 해체되었다.[3] 이 기관이 대만을 통치한 시기를 대만일치시기라고 한다.2. 상세
대만총독부 청사는 1919년에 완공됐으며 현재는 대만의 총통부 청사, 즉 대만 총통의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다.조선과 다르게 대만에서는 문관 총독들이 임명되기도 하였다.[4]
조선총독부 청사보다는 예산을 적게 들여서 지어졌다고 한다.
3. 행정 조직
행정 조직은 1940년(쇼와15년) 기준이다.- 내부부국(內部部局) / 소속관서(屬所官署)
- 총독관방(總督官房) / 교통국(交通局)
- 내무국(內務局) / 총무과(總務課)
- 문교국(文敎局) / 도로항만과(道路港灣課)
- 재무국(財務局) / 철도부(鐵道部)
- 식산국(殖產局) / 체신부(遞信部)
- 미곡국(米穀局) / 전매국(傳賣局)
- 경무국(警務局) / 세관(稅關)
- 법무국(法務局) / 기상대(氣象臺)
- 외사부(外事部)
4. 행정 구역
주, 청의 영역을 나타낸 행정구역도.
시, 군, 지청의 영역까지 나타낸 행정구역도, 연한 선이 시, 군, 지청 경계이며, 붉은색은 시, 보라색은 지청이다. 1945년 대만 반환 당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나타내었다.
점령 초창기부터 몇 번의 변화를 거쳐 최종적으로 1926년(다이쇼 15년)에 다음의 5개 주와 3개 청으로 정비되었다. 주와 청 산하에는 시(市), 군(郡), 지청(支廳)[5]을 두었고, 군과 지청 아래에는 가(街), 장(庄),[6] 번지(蕃地)[7]를, 시 아래에는 일본식으로 정(町)을 두었다. 가와 장의 하위지역은 일본식으로 자(字)를 사용했고 번지 아래에는 사(社)를 두었으며, 정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정목(丁目)으로 세분하였다.
* 다이호쿠 주(臺北州, 대북주) - 현 타이베이시, 신베이시, 지룽 시, 이란현
* 신치쿠 주(新竹州, 신죽주) - 현 타오위안시, 신주 시, 신주 현, 먀오리 현
* 다이추 주(臺中州, 대중주) - 현 타이중시, 난터우 현, 장화 현
* 다이난 주(臺南州, 대남주) - 현 윈린 현, 자이 시, 자이 현, 타이난 시
* 다카오 주(高雄州, 고웅주) - 현 가오슝시, 핑둥 현
* 다이토 청(臺東廳, 대동청) - 현 타이둥 현
* 가렌코 청(花蓮港廳, 화련항청) - 현 화롄 현
* 호코 청(澎湖廳, 팽호청) - 현 펑후 현
대만 반환 후 대만의 행정구역이 중국 본토식으로 개편되면서 위의 주와 청은 현으로 일괄 개편되었다.(다이추 주→ 타이중 현, 가렌코 청 → 화롄 현 등)[8]
5. 역대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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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백작, 해군대장 1895년 5월 10일~1896년 6월 2일
- 2대 가쓰라 다로 자작, 육군중장 1896년 6월 2일~1896년 10월 14일
- 3대 노기 마레스케 남작, 육군중장 1896년 10월 14일~1898년 2월 26일
- 4대 고다마 겐타로 자작, 육군중장 1898년 2월 26일~1906년 4월 11일
- 5대 사쿠마 사마타 백작, 육군대장 1906년 4월 11일~1915년 5월 1일
- 6대 안도 사다요시 남작, 육군대장 1915년 5월 1일~ 1918년 6월 6일
- 7대 아카시 모토지로 남작, 육군대장 1918년 6월 6일~1919년 10월 26일
- 8대 덴 겐지로 남작 1919년 10월 29일~1923년 9월 6일[9]
- 9대 우치다 가카치 1923년 9월 6일~1924년 9월 1일
- 10대 이자와 다키오 1924년 9월 1일~1926년 7월 16일
- 11대 가미야마 만노신 1926년 7월 16일~1928년 6월 19일
- 12대 가와무라 다케지 1928년 6월 19일~1929년 7월 30일
- 13대 이시즈카 에이조 1929년 7월 30일~1931년 1월 16일
- 14대 오타 마사히로 1931년 1월 16일~1932년 3월 2일
- 15대 미나미 히로시 1932년 3월 2일~1932년 5월 27일
- 16대 나카가와 겐조 1932년 5월 27일~1936년 9월 2일
- 17대 고바야시 세이조 예비역 해군대장 1936년 9월 2일~1940년 11월 27일
- 18대 하세가와 기요시 해군대장 1940년 11월 27일~1944년 12월 30일[10]
- 19대 안도 리키치 육군대장 1944년 12월 30일~1945년 10월 25일[11]
6. 관련 문서
[1] 정체자[2] 신자체[3] 그래서 일제의 대만 통치가 끝난 것을 기념하는 날인 대만광복절은 일제 패망일이나 항복일이 아니라,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가 대만총독부로부터 정식으로 행정권을 이양받은 날인 10월 25일이다.[4] 조선은 대만과는 다르게 군부가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을 이유로 사사건건 문민총독 임명에 훼방을 놓았다.[5] 펑후 제도(호코청) 산하에 설치.[6] 여기서 시, 가, 장은 일본 본토의 시정촌에 대응하는 행정구역 체계로 기능했다. 조선에서 시정촌제에 대응하는 행정구역 체계로서 부읍면제를 실시한 것과 같다.[7] 대만 원주민 거주지역에 설치. 번지는 가, 장과 달리 명칭이 부여되지 않았으며, 1개의 군에 단 하나만 설치되었다. 번지의 하위 행정구역인 사는 명칭이 부여되었다.[8] 국부천대 직후까지 타이완성의 현급 행정구역은 위의 행정구역을 따른 8개 현과 주할시를 성할시로 개편하면서 생긴 9개의 성할시로 구성되었고, 1950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5시 16현이 되었다.[9] 첫 문관총독이자 유일한 문관출신 화족총독.[10] 영화감독 짓소지 아키오의 외할아버지다.[11] 일본의 항복 후에도 두 달가량 총독직을 유지하다가 국민혁명군이 타이완섬을 접수하기 위해 진주하자 국민혁명군에 항복하였다. 이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 중국으로 압송되어 상하이에 수감되었고, 재판을 기다리던 중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