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2 21:35:33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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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즉위3. 재위4. 후계 구도와 사망

1. 개요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1]오만의 제14대 술탄이었으며, 생전에 총리, 재무장관, 국방장관, 외무장관을 겸직했었다. 50년 가까이 재위하여 생존 당시에는 동시기 아랍의 군주들 중에서는 최장 기간 재위하고 있었던 군주였다. 여담으로 견부호자이자 아랍권 국가에선 그나마 성군이다.[2]

2. 즉위

카부스의 아버지이자 전 술탄이었던 사이드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3]암군으로 쇄국수구적인 정책으로 오만을 중세시대 수준으로 퇴보시키고[4] 공산주의 반군이 들끓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 그나마 왕태자인 외동아들 카부스가 술탄의 이런 막장 통치에 대해 충언을 하자 도리어 가택에 유폐시키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카부스는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5]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는 아버지를 영국으로 추방했다. 엄연히 외환의 죄+패륜에 해당하지만 아버지가 너무 막장이라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던 선택이던 셈이다.[6]

이렇게 쫓겨난 사이드 빈 타이무르 선왕은 호텔에서 편하게 지냈지만 겨우 2년 만에 62세로 울분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무스카트 왕실 묘지로 이장되어 묻혔다.

3. 재위

오만은 산유국이지만 카부스 집권 이전까지 아랍 산유국들이 흔히 그렇듯이 석유로 번 오일머니는 경제 개발에 쓰이는 게 아니라 전부 술탄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러나 술탄위에 오른 카부스는 오일머니를 도로, 전력, 학교, 병원 건설,[7] 수자원 확보 등에 사용하여 아버지의 실정으로 낙후된 오만을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집권한 바로 그 해에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군대를 근대화시켜 공산주의 반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모든 인종과 부족을 평등하게 대우했다. 그 덕분인지 현재 오만은 내전이 터진 옆나라 예멘이나 종파간 내분과 내전으로 헬게이트가 열린 여타 아랍, 중동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된 편이다.[8]

그래서인지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유혈사태가 오만까지 번졌으나, 애초에 원인 자체가 반(反) 술탄이 아닌 개혁이었으며, 술탄이 제때 개각에 나서고 슈라 위원회를 확대하면서 잘 수습했다. 자세한 것은 아랍의 봄 문서 참조.

4. 후계 구도와 사망

그러나 카부스 술탄은 1976년 결혼 후 3년만에 이혼했고 부패 등의 문제를 막기 위해 독신으로 지내서 자녀가 없으며 본인은 외동아들이라 형제도 없다. 그래서 태자태제가 없다(...) 오만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라고 볼 수도 있다.[9]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인척들조차 정부 요직에 기용하지 않은 상황으로서 후계구도가 제대로 잡혀 있지않다보니 카부스 술탄 사망 이후가 불안정한 상황이다. 특히 일흔을 훌쩍 넘긴 카부스 술탄의 후계 문제는 술탄 유고(사망)시 3일 이내에 왕실 회의인 통치 가문 위원회가 선출하도록 되어 있는 상태이다. 현재 술탄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술탄 사망 이후 정세가 불안정해질 것으로 보였다. 2014년 여름부터 2015년 봄까지 술탄이 암에 걸려 독일 바이에른 병원에서 암 수술을 하고 장기치료를 받고 왔는데 당시 암 투병을 하고 있어 건강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특히 자주 모습을 보이던 예전과 달리 1년에 단 몇 번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오만 정부가 술탄의 건강 상태에 대한 발표를 잘 안 한다. 이러다가 오만 버젼 철종, 선조가 나올지도..[10] 다만 옛날 중국 청나라태자밀건법처럼 차기 술탄위를 이을 후계자를 지명하는 비밀 문서를 이미 작성해두었다는 얘기도 있다.

2019년 12월 후계자 선정에 들어갔다.#

카부스 술탄이 사망한 이후, 후계자는 카부스의 사촌 동생이자 문화부 장관인 하이삼 빈 타리크 알사이드(1954년생)로 결정되었다.#

2020년 1월 10일에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사인은 결장암.#

12일. 아랍 정상들이 방문하여 추모하였으며, 서방 국가들도 애도를 가졌다.#


[1] 아랍어: قابوس بن سعيد آل سعيد / Qābūs bin Sa’īd Āl Sa’īd[2]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적도 기니 대통령의 완벽한 상위호환이라 봐도 무방하다. 둘 다 연배도 비슷하고,(카부스가 오비앙보다 2세 연상이다) 집권 이전 고국이 전근대 수준의 국가였으며, 쿠데타를 통해 가족을 몰아내며 집권했고, 나라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유로 빈곤국이던 고국을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생존 시기 기준으로 동시기 동지역의 지도자 중 최장 기간 집권 중인 인물이었지만, 국가 운영 수준의 차이는 막대했다.[3] 생몰년도: 1910년 ~ 1972년, 재위기간: 1932년 ~ 1970년[4] 농담이 아니라 사이드가 물러난 1970년 기준 오만의 5세 미만 아동 사망률은 25%, 학교는 3개(중등학교 0개), 문해율은 5%, 병원은 단 한 곳, 포장 도로는 10km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라에 전기도 거의 없다시피했다.[5] 단순히 영국으로부터 지원만 받은 정도가 아니라, MI6, 영국 외무부, 영국 국방부가 계획한 후 에드워드 히스 영국 총리의 승인을 받은 쿠데타였다. 사실 2010년대에 이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해당 쿠데타는 아랍 군인이 주도했고, 영국 사령관은 단지 거들어줬을 뿐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6] 캄보디아의 전 총리 훈 센이 행적으로만 보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인데도 그가 배반한 고국이 민주 캄푸치아인지라 매국노 취급을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7] 1980년까지 오만에는 28개의 병원, 363개의 학교, 12,000km의 포장 도로가 있었다. 이게 단 10년 만의 변화였다.[8] 치안이 동아시아 국가, 싱가포르에 비견될 정도라고 하면 말 다 한 셈이다.[9] 다만 아타튀르크 전 튀르키예 대통령은 외아들이던 카부스 오만 국왕과는 다르게 여동생이 하나 더 있었다.[10] 선조와 철종 두 사람 모두 전임 군주가 직계 후손 없이 사망하는 바람에 방계 출신의 왕족이 국왕이 된 경우이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실들은 직계 왕족들이 없어서 방계 왕족들로 국왕을 선출하여 대를 이은 경우가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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