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01:10:49

악의 문제

신정론에서 넘어옴

1. 개요2. 양태3. 사상별 입장4. 이론5. 지옥 문제
5.1. 개요5.2. 신학적 대안과 해석
6. 어록7. 언어별 명칭8. 여담9. 관련 문서

1. 개요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는 '절대선인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그럼에도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순을 다룬 종교철학신학 문제이다.

한국의 신학계, 기독교계에서는 "신정론"이라고 부른다.

2. 양태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
에피쿠로스의 역설[1]

데이비드 흄은 위 역설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신은 전지하다.
  2. 신은 지선하다.
  3. 신은 전능하다.[2]
  4. 하지만 악은 존재한다.[3]
  5. 1, 2, 3, 4가 일반적으로는 동시에 성립되는 건 불가능하며 그로 인해 모순이 발생한다. 즉 이 중에 최소 한 가지는 틀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1. 신이 전지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의지와 능력이 있으나 악의 존재를 모른다.
    2. 신이 지선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능력이 있지만 신이 선하지 않거나 사악하여 악을 인지하고도 없애는 데 소극적이거나 일부러 악을 방치, 혹은 조장한다.
    3. 신이 전능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의지도 있고 악의 존재도 알고 있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없애지 못한다.
    4. 악이 사실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일단 1~4번 중 각자 하나씩 존재하지 않는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이라 '악은 없다.'라는 수 자체가 고려되긴 하지만, 종교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고대부터 '악'의 존재는 확실히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없는 취급된다.[4]

C.S.루이스는 이 문제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설명으로 풀어냈다. 가령 한 엄마가 아들에게 “이제부터는 네 방을 치워주지 않을 거야. 이제 네 방 청소는 네가 해.” 라고 했을 때, 엄마는 분명 아들이 방을 치우기를 바란다. 그리고 대신 치울 능력도 있다. 다만 그 방을 치우는 것은 온전히 아들의 몫이다. 아들은 엄마의 어떤 회유와 보상에도 여전히 방을 치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계속해서 아들의 방을 치운다면, 그 아들의 방은 아들의 깨끗함이 아닌 엄마의 깨끗함으로만 남는다.

'악의 문제'는 '악함이 가지는 문제'가 아니라 '악의 존재가 야기하는 문제'를 의미한다. 속격조사 '-의'는 기본적으로 소유를 의미하는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는 과거에 일본어로 번역된 영어 문헌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of를 번역한 の를 -의로 번역하던 관행이 그대로 굳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악 문제'가 더 적절한 번역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현재는 '악의 문제'라는 이름 자체가 사실상 고유 명사로 굳어졌다.

현대 종교철학에서는 악의 문제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논리적 악의 문제(Logical Problem of Evil)증거적 악의 문제(Evidential Problem of Evil)이다.
  • 논리적 악의 문제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의 속성(전지, 전능, 지선)과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며,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신과 악이 공존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제시하기만 하면 된다. (예: 자유의지를 위한 필연적 허용)
  • 증거적 악의 문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신과 악의 공존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할지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양'과 '질'(예: 홀로코스트, 무고한 아이의 끔찍한 고통)을 볼 때,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 즉, 이토록 끔찍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악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현대 신정론 논쟁은 주로 이 증거적 악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3. 사상별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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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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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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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옥 문제

5.1. 개요

Problem of Hell (영어 위키백과)
지옥 문제는 악의 문제에 속하는 문제로, 악의 문제와 관련된 사례 중에서도 최악의 문제에 해당된다.[5] 이 지옥의 문제에서 지옥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사회의 형벌의 3가지 수칙과 어긋난다.

1.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에서 격리의 목적
2. 재사회화의 목적
3. 범죄 예방의 목적(위하력)

"1. 사회 격리의 목적"은 신학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이 다른 측면도 있어 반박된다. 예를 들어, 평생을 봉사한 불신자도 불신을 이유로 지옥에 가게 된다. 아무리 불신자라지만, 봉사를 하는 것 자체가 사회에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리 없으므로 사회 격리의 목적(사회적 이익 목적)과 지옥의 목적은 상충된다. 도덕과 종교의 관계도 참조.

인간의 일생은 길어봐야 자연사하면 100년, 병이나 사고 등으로 요절하면 60대를 못 넘기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는 이 짧은 일생 동안 저지른 범죄, 불신, 배교 등에게 '영원한 고통'이라는 형벌을 내린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주류는 한 번 지옥에 떨어지면 절대 돌이킬 수 없이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이를 부정할 경우 이단시한다. 가톨릭의 연옥이나 고성소 가설 또한 지옥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 시점에서 "2. 재사회화의 목적"이 부정된다. 지옥에서는 아무리 참회하고, 다시 신을 믿는다 한들 천국에는 영원히 들어가지 못한다. 즉, 재사회화고 뭐고 영구적으로 징벌되는 것.

그 어떤 포악하고 무자비한 인간 말종이라 할 지라도, 그가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완벽하게 정당한 심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즉, 죄의 경중에 따른 형량의 조절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 하물며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도 과하다고 생각되는 이 지옥이 그렇게까지 악해보이지는 않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인간 기준에서 지나칠 정도로 비상식적이고 가혹하다. 이렇게 신의 행동이 비상식적이기에 여러 변신론이 등장한 것이지만, 신이 강제로 주입시킨 자유의지 등을 핑계로 영원한 고통의 장소에 내버려둔다는 것 역시 비상식적이긴 매한가지다. 이런 신의 비상식적인 면모는 신에게 자비를 바라며 그의 언약을 믿는 게 과연 '상식대로' 의미가 있을지 회의하게 만든다. 또한 벌의 양이 무한이라는 비상식적 기간을 거치기 때문에 "3. 위하력"을 약화시킨다. 유태인 학살을 저지른 히틀러와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친 잡범이 지옥에서는 똑같이 무한한 기간을 벌을 받는다. "벌을 받는 기간은 똑같이 무한인데 이미 범죄를 저질렀으니 차라리 더 큰 범죄를 저지를까?"라는 생각을 품게 할 수도 있다.

철이 들기 전에 죽은 아동의 사례도 있다. 일부 교파를 제외하면, 신이 이 아동을 지옥에 보낼 리 없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슬람교의 경우도 15세까지는 죽으면 심판 없이 즉시 낙원에 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녀가 신을 믿도록 설득하지 않거나 설득에 실패해서 결과적으로 자녀가 지옥 가게 유도한 부모보다, 아이를 죽여 천국 가게 확정시켜 준 아동 살해범이 아이에게 훨씬 유익한 존재가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철도 안 든 아동이 죽으면 지옥 간다는 비상식적인 결론을 피하려고 하니, 지옥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청소년기 이전에 몰살시키거나, 출산 직후의 자유의지가 없는 영아를 살해하거나, 임신하자마자 낙태시키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의 지옥행을 원천봉쇄하고 천국 보내는 선행이라는 더 비상식적인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세 스페인 선교사 중 일부는 위와 유사한 논리로 원주민 영아가 미개한 원주민 사회에서 자라 다른 원주민들처럼 지옥에 떨어질 것을 염려해 세례 후 살해한 바 있다.

또한 당대의 그리스의 영웅들도(베르길리우스 등) 어떠한 선행을 하였어도 예수의 탄생 전이라 믿을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아 구원받지 않는다는 모순도 있었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 단테는, 신곡에서 연옥이라는 시스템을 창작했다.

물론 아브라함계 종교의 주류 입장은 신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해도 믿고 순명해야 한다는 것이므로[6], 창세기 말씀(생육하고 번성하라)을 지켜 아이를 낳고 금살 계명을 지킨 결과 자식이 지옥에 가도 온전히 자식 책임으로 돌린다.

지옥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여러 이단 교파를 발생시켰다. 그 중 유명한 것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있는데, 이들은 영원한 고초를 겪는 불타는 지옥의 존재가 전선한 하느님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그러한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지옥이 존재한다면 마지막 심판의 날이며, 죄인이 고통 속에서 영생하는 대신 응분의 벌을 받은 후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5.2. 신학적 대안과 해석

지옥의 가혹함에 대한 이러한 윤리적, 신학적 고민은 기독교 내에서도 다양한 대안적 해석을 낳았다. 모든 기독교인이 영원한 고통의 지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 자유의지의 결과로서의 지옥: C. S. 루이스와 같은 사상가는 "지옥의 문은 안에서 잠겨 있다"고 표현했다. 이는 지옥이 신이 내리는 적극적인 형벌이라기보다, 신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한 영혼이 스스로 선택한 고립과 분리의 상태라는 해석이다. 이 관점에서 신은 강제로 구원하기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끝까지 존중한다.
  • 신적 사랑의 다른 체험 (동방 정교회): 시리아의 성 이사악과 같은 일부 동방 정교회 교부들은 천국과 지옥이 별개의 장소가 아니라고 보았다. 모든 영혼은 신의 무한한 사랑과 마주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영혼에게는 천상의 기쁨이 되고, 그것을 거부하고 증오하는 영혼에게는 타는 듯한 고통이 된다는 것이다. 즉, 지옥은 '사랑의 채찍질'에 의한 고통이라는 해석이다.
  • 소멸론 (Annihilationism): 영원한 형벌의 비윤리성에 대한 대안으로, 악인들은 최후의 심판 이후 영원히 고통받는 대신 완전히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견해이다. 이는 유한한 죄에 대해 무한한 벌을 내리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비판에 대한 신학적 답변 중 하나로, 초기 기독교부터 존재해 온 유서 깊은 입장이다.
  • 보편구원론 (Universal Reconciliation): 일부 신학 전통에서는 궁극적으로 모든 영혼이 신의 자비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이는 신의 사랑이 모든 죄와 악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입장으로, 지옥이 존재하더라도 정화의 과정일 뿐 영원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러한 해석들은 지옥의 문제를 단순히 '믿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식의 이분법적 구도를 타파하여 신의 사랑, 정의, 인간의 자유라는 가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이런 너무 가혹한 문제로 인하여 가톨릭의 연옥이라는 믿음의 대안도 생긴 바가 있다. 연옥이 존재한다 해도 여전히 위에 언급되었듯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반박이 가능해졌기 때문. 또한 연옥은 기독교의 예수 재림 이전의 선인들도 믿을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아 지옥에 간다는 모순을 해결한 것으로 단테의 신곡에서는 천국에 가깝지만 하나님이 거처하지 않아 괴로우며, 7대 죄악의 속죄를 끝내면 지상 낙원에 가는 것으로 상상하였다.

6. 어록

그들은 낄낄대며 악을 뿌리고 거만하게 을러메며 억누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어떻게 알랴, 가장 높은 분이라고 세상 일을 다 아느냐?" 그런데 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악인이어도, 몸은 항상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갑니다. 나는 과연 무엇하러 마음을 맑게 가졌으며 깨끗한 손으로 살았사옵니까? 나도 그들처럼 말하며 살고 싶었지만 그것은 당신 백성을 배신하는 일이겠기에 혼자 생각하며 깨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이 아프도록 고생스러웠습니다.

시편》 73편 8, 11~13, 15~16절 (공동번역 성서)
"하늘의 도는 공평 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한다.[7] 하지만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인가. 그들은 이와 같이 인과 덕을 쌓고 청렴하고 고결하게 살다가 이렇게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의 뛰어난 일흔 제자 가운데 중니(仲尼)는 오직 안연(顔淵)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창했다. 그러나 회(回)는 가끔 쌀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인가? 도척(盜跖)[8]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 고기로 회를 쳐서 먹으며,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지르고 수천 명의 패거리를 모아 천하를 마구 휘젓고 다녔지만 결과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것은 무슨 덕을 따랐단 말인가? 이런 것들은 크게 드러난 예들이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평소의 행실이 도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일생을 마치도록 편안히 놀기만 하여,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 길을 걸으며 공명 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성내지 않고, 시종 근면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화를 입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의심스럽다. 이른바 하늘의 도라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여심혹언 당소위천도 시야비야)

사기 - 백이열전》
"하느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 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예레미야》 12장 1절 (공동번역 성서)
다음으로 나는 악마란 우리 마음 속에 사는 하느님의 적이며, 하느님의 의로운 섭리를 파괴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무너뜨리려고 온갖 악의와 술책을 동원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프라이데이가 물었다. "하느님은 강하고 위대하다고 주인님이 말하셨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악마만큼 강하고 힘이 세지 못하신가요?" "강하고 위대하시다고 내가 말했지. 들어봐, 프라이데이. 하느님은 악마보다 강하고 악마 위에 계신거야. 그래서 하느님께 우리가 우리 발로 악마를 짓밟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게 해달라고, 악마의 불화살을 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야." 그러자 프라이데이가 다시 말했다. "하느님이 악마보다 강하고 훨씬 힘이 세면 왜 하느님은 악마를 죽이지 않나요? 왜 악마가 악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시지 않지요?"

7.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한국어 악의 문제
영어 Problem of evil
중국어
일본어 [ruby(罪悪,ruby=ざいあく)][ruby(問題,ruby=もんだい)]
이탈리아어 Problema del male
프랑스어 Problème du mal

8. 여담

악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학 외에도 윤리학 및 종교철학, 종교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항상 뜨겁게 불타는 주제이며, 여러 창작자들이 작품을 창작할 때 소재로 삼기도 했고, 심지어 종교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가끔씩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이 주제에 대한 좀 더 심도있는 개관을 원한다면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등의 저서를 추천한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는 《고통과 씨름하다》, C. 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이 있다. 해당 저서(고통의 문제)에서는 위 항목들에서 서술한 의문들이 대개 제시, 설명되어 있으며,[9] 개중에는 전능과 선함에 대한 정의 또한 포함되어 있다. 대략 이 문제를 개신교적 관점에서 다룬 저술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전도서에서 전도자(가톨릭 전승으로는 솔로몬에 해당된다.)는 악의 문제와 같은 철학/신학적 난제, 곧 선결문제가 존재하며 그 선결문제가 끝 없이 이어지는 부류의 문제에 대한 썰을 간간히 풀어놓는다. 전도자는 지혜를 추구하며 그 누구보다도 큰 지혜를 얻기도 하였고, 이런저런 뛰어나고 공정하고 공평한 치리를 하기도 하였고, 세상의 온갖 악한 것과 미친 것을 연구하여 살피기도 하였으나, 결국 전도자와 같은 지혜자가 이러한 인생의 어리석음에 대하 설파하여봤자 이런 지혜자가 무엇을 이루는 지와 상관없이 인생은 그 교훈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므로, 전에 있던 세대가 그러했고 지금 세대가 그러했듯 후에 올 세대도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니, 이러한 생각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는 행위라 말한다. 이 문제의 근본적 실체에 대하여, 전도자는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의 안식에 드는 것임을 명심하고,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한, 전도자가 작성한 잠언의 첫 가르침임을 되새겨라."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악의 문제는 출산 윤리와도 관련이 있다. 만약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한다면, 1차 창조자인 신만이 아니라 2차 창조자인 부모도 자녀를 낳음으로써 신이 방치하는 악에 자녀를 노출시킨다는 것에 대해 일부 책임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악의 문제를 지적했던 세계 각지의 고대 금욕주의 유파들(영지주의 포함)은 출산과 관련된 성욕을 죄악시했다. 이에 대해서는 반출생주의 참고.

소설가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라는 대사가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역시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악의 문제는 신학 자체를 더 깊고 성숙하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회피하기보다, 신의 사랑과 자비, 정의,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같은 핵심 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 논쟁은 '이성 대 믿음'의 대립 구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이성을 통해 신과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역동적인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은 종교인에게는 더 성숙한 신앙관을, 비종교인에게는 종교적 사유의 깊이를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신학적 노력도 기성 신학자 커뮤니티가 정한 테두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정죄'당하며, 어느 시점에서 선을 긋고 타협해서 맹목적 신앙을 견지하지 않으면 역사 내내 숱하게 말살당한 신학자(일부는 명예 회복됨)들처럼 이단으로 취급당하게 된다. 가령 어떤 경전 속 문장을 인간 윤리에 맞게 비유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사실 다른 모든 문장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문자주의의 핵심 논거이며, 대안적 해석을 일체 거부하는 원리주의자 쪽이 오히려 신학적으로는 더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적나라하게 말해서, 학자적 양심과 타협해 눈치껏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에서만 대안적 해석을 내세워서 자신의 지성을 뽐내고, 그 외에는 모호한 입장을 취해서 '정죄'를 피한 신학자만이 기성 신학자 커뮤니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기득권 종교에서 괜히 이단 또는 무신론자나 양산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고뇌를 평신도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없으며, 악의 문제에 대해 고찰하는 신학자가 생각이 단순한 평신도보다 신앙적으로 우월하다는 명백한 신학적 근거도 없다.

9. 관련 문서


[1] 콘스탄티누스 1세 치하 신학자 락탄티우스에 의해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다만 에피쿠로스의 저술이 대부분 소실되어(상당수 초기 기독교도들이 없앴다고 한다.) 그가 실제로 한 말인지는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 또한 신의 개념은 종교나 신화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악신'이나 전지전능하지 않은 신의 개념도 있을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그러한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가 지배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존재만이 '신'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낮다. 어찌 되었든 이 어록 때문에 에피쿠로스는 기독교의 등장 이후 무신론자로 알려지게 되었으나 그는 신이 인간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을 뿐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악신론을 내세우지는 않았다.[2] 제일 기본적으로는 단어의 뜻 그대로 '''모든 걸 알며(전지) 모든 게 가능하고(전능) 모든 악한 행동을 허락하지 않는 것(지선)을 칭하지만, 기준에 따라 전지/전능/지선에 대해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3] 이 또한 위의 각주와 동일하게 기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무고한 즉 억울한 고통을 만드는 행위와 그 행위의 실천자 또는 신을 섬기기는 커녕 신에게 반발하고 멀어지는 것과 그런 행동을 하는 인간은 악으로 본다.[4] 실제로 일신교든 다신교든 종교적으로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는 종교를 믿는 것이 기본적인 '선행'이라 할때 그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 것(무신론)이나 더 나아가 그 선행을 방해하는 것이 악행으로 간주되지 않으면 신자들의 믿음과 결속을 다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만 해도 통일 이스라엘, 북이스라엘, 남유다 국왕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기준이 야훼에 대한 믿음이다.[5] 다만 일반적인 악의 문제가 유일신교라면 그 구조상 무조건 마주해야만 하는 문제인 것과 달리, 지옥 문제는 유일신교 중에서도 유달리 가혹한 지옥을 설정해놓은 기독교만이 겪고 있는 문제에 가깝다.[6]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대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7] 노자 79장에 나오는 구절이다.[8]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도적이다.[9] 당연하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정도로 확실하게 수긍할만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C. S. 루이스 자신이 전문적인 신학자나 철학자는 아니라는 점은 감안하자.[10] 악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계기를 제공한 대재앙.[11] 의인이 겪는 고난이라는 악의 문제의 원형을 다룬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라는 단순한 논리로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 하지만, 욥은 이를 거부하며 신에게 직접 답을 구한다. 마침내 나타난 하느님은 욥의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창조의 섭리와 신비(神祕)를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좁은 정의감으로 신의 계획을 판단하려는 시도의 한계를 드러내며, 악의 문제를 이성적 해답이 아닌 신과의 관계와 신뢰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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