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7 23:55:25

세레스(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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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세레스.jpg
파일:세레스 9.jpg


1. 개요2. 역사
2.1. 로마 제국2.2. 중세2.3. 오스만 제국2.4. 근현대
3. 볼거리

1. 개요

그리스어 Σέρρες
영어 Serres
튀르키예어 Serez / Siroz
불가리아어 Сяр / Сер

그리스 북동부 중마케도니아 주의 도시. 시라 (Σίρρα), 세라이 (Σέρραι)로도 불리며 인구는 약 6만명이다. 테살로니카카발라에서 각각 동북쪽, 서북쪽으로 70km 떨어진 로도피 산지 자락의 평지에 위치한다. 오랜 역사를 지니며 동로마 제국 후기에 마케도니아 남부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오스만 제국 시기에 자체적인 산작과 조폐소가 세워지는 등 중시되었다. 면화, 담배의 상품작물 수출로 부를 축적했고 한때 3만이 넘는 튀르크 무슬림이 정착해 5세기간 공존했다. 근현대 시기 대화재와 전란을 겪으며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지만 구도심에는 여러 성당과 모스크, 베데스탄 등이 남아있고 북쪽의 언덕에도 시타델 및 성 니콜라스 수도원이 남아있다. 동북쪽 7km 산지의 세례 요한 수도원도 주민들에게 상징성이 있고, 서북쪽 25km의 케르키니 호수도 볼만 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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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기원전 2천년 무렵부터 북쪽의 급경사 언덕인 쿨라스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프리기아 인의 친척인 브리게스 인과 스트리모니아인이 정착했다. 기원전 1000년경 파이오니아인,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오도만테스 인이 정착했다. 이들은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며 태양신을 숭배했다. 기원전 5세기의 헤로도토스는 지명을 시리스로 기록했고, 그 무렵 페르시아 제국의 이주 조치 혹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 동행으로 인해 킬리키아 지방으로 일부 주민들이 향하여 세라이폴리스 (Σερραίπολις)를 세웠다.

2.1. 로마 제국

파일:세레스 시타델.jpg
고대의 시타델 유적

로마 제국 시기 도시는 시라 (Σίρρα) 혹은 시라이 인의 도시란 뜻인 시라이온폴리스 (Σιρραίωνπόλις)로 불려고, 도시 지위인 키비타스 스티펜다리아 (civitas stipendaria)를 받았다. 시가지는 아고라 (시장), 불레우테리온 (의사당), 극장, 김나지움 (체육관), 신전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치 권력은 불레 (원로원), 데모스 (민회), 아르콘 (사제회)으로 분산되었고 유력자들은 로마 시민권을 받아 마케도니아 지방 정치에 관여했다. 종교적으로는 그리스 다신교 및 트라키아 다신교가 공존했다. 도시는 또한 인근 농촌 배후지를 호라 (영지)로써 관장했고, 대리석 및 철광석을 채굴해 판매했다. 마케도니아의 펜타폴리스를 이루던 세레스는 3세기 중반 들어 북방 유목 민족의 침공으로 쇠퇴했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후 안정을 되찾았다. 5세기 들어 기독교 주교구가 되었고, 현지 주교는 449년 2차 에베소 공의회에 참석했다.

2.2.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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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시기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성탑 유적
파일:테오도로스 세레스.jpg
1124년에 세워진 성 테오도로스 티로 & 테오도로스 스트라텔라테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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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초엽 시타델에 세워진 성 니콜라스 수도원

6세기 들어 버려졌던 도시는 803년경 니키포로스 1세에 의해 재건되어 슬라브 및 불가르 족의 남하를 막는 군사 거점으로써 다수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세레스는 808년과 971년에 불가리아 제국에게 점령되었고, 크룸의 경우 수도 플리스카에 세레스 점령 기념비도 세웠다. 다만 두 경우 모두 곧 동로마 군이 수복했고, 11세기 들어 안정을 회복했다. 비록 1185년 시칠리아 왕국군이 인근을 약탈했지만 성채는 함락되지 않았다. 1195년, 불가리아 제2제국을 재건한 이반 아센 1세가 세레스 방면으로 남하하자 동로마 장군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바타체스가 맞섰으나 기병대 대부분을 잃고 패배했다. 다만 이반 아센 1세도 회군 도중 암살되었다.

4차 십자군 이후 세레스는 보니파초 디 몽페라토의 테살로니카 왕국령이 되었으나, 1205년 3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을 격파한 불가리아의 차르 칼로얀이 5월에 세레스를 포위했다. 도시는 안전 보장을 대가로 항복했으나 여러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평지의 시가지가 대부분 파괴되었고, 약한 성벽으로 둘러진 하부 시가지 대신 성채 주변의 상부 시가지가 중심지가 되었다. 1242년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불가리아 제국이 약해진 후 1246년 니케아 제국이 세레스를 점령하며 동로마 령으로 환원되었고, 반세기 이상 평화를 누리며 기존의 번영을 되찾았다.

하지만 요안니스 5세요안니스 6세가 대립한 1341-47년의 동로마 내전 중인 1345년 9월에 스테판 두샨이 세레스를 점령해 세르비아 제국령으로 삼았다. 스테판 두샨은 성채를 보수했고, 1355년 그의 사후 황태후 옐레나가 통치하다가 귀족이자 데스포티스인 조반 우글레샤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스 문화를 존중하며 스코페와 세레스를 중심으로 마케도니아 지방을 통치하던 조반 우글레샤는 1371년 마리차강 전투에서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게 패해 전사했고, 이후 동로마 제국이 테살로니카 총독이던 미래의 마누일 2세가 세레스를 양도받으며 마지막으로 동로마 령이 되었다.

2.3.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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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년 바예지트 2세의 사위인 메흐메트 베이가 세운 메흐메트 (혹은 아흐메트) 베이 모스크. 아야 소피아로도 불렸다.
파일:진지를리 모스크.jpg
16세기 말에 세워진 진지를리 모스크

1371년의 임시 점령 후 세레스는 1383년 9월에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시로즈 (Siroz)로 불리게 되었다. 14세기 말엽 일대는 에브레노스 베이의 영지였고, 그는 사루한 출신 튀르크 인들을 정착시켰다. 동로마 시기 성벽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허물어졌고, 튀르크 이주민들은 기존 시가지의 서쪽과 남쪽에 새 시가지를 형성했다. 1385년 대재상 찬다를르 카라 할릴 하이레딘 파샤는 시로즈의 첫 모스크인 에스키 자미 (20세기에 파괴됨)와 목욕탕인 에스키 하맘을 세웠다. 같은해 술탄 무라드 1세는 시로즈를 기지로 하여 세르비아 왕국을 원정했고, 1420년에는 루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셰이크 베드렛딘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1414년부터는 조폐소가 설치되었고, 1454년 기준 인구는 6천 2백명이었다. 당시 시가지는 무슬림 마할레 (구역) 25개와 정교회 마할레 45개로 구성되었다.

15세기 말에는 시칠리아와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이주해왔고, 대재상 코자 무스타파 파샤가 여러 공공 및 자선 건물들을 세웠다. 16세기 초엽 시로즈를 방문한 프랑스 여행가 피에르 벨롱은 시내에서는 그리스어, 교외에서는 그리스어 및 불가리아어가 쓰이다고 기록했다. 1519년 기준 시로즈에는 무슬림 684가구와 비무슬림 가구 545가구 (그중 유대인 54가구)가 거주하는 등 무슬림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1571년 레판토 해전 후 기독교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대성당을 비롯한 8개의 성당들이 약탈되고 세례 요한 수도원 소유 토지가 몰수되는 등 보복되었다. 17세기 초엽 상인 출신의 사제 시나디노스는 도시 역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17세기 중반의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구도심에 정교회 마할레 10개, 신도심에 무슬림 마할레 30개가 있으며 각각 2천과 4천 채의 주택이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모스크 12개, 무살라 (예배당) 91개, 마드라사 (학교) 26개, 하맘 5개, 테케 (수피 회관) 2개가 있다고 덧붙였다. 17세기 시로즈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었고, 2천개의 상점 및 17개의 칸 (상인회관)을 갖추었다. 18-19세기 시로즈는 살로니카 산작 내의 세습 영주인 데레베이가 통치하며 상당한 자치를 누렸고 살로니카 (테살로니카)를 통해 매년 베네치아, 프랑스, 독일, 리보르노 등지에 5만 덩이의 면화가 수출되는 등 목화 산지로써 번영했다. 1735년에는 현지 대주교 가브리엘이 그리스어 학교를 세워 1745년까지 교장을 맡았다. 이후로도 상인 요안니스 콘스타스가 1만 8백 플로린, 후일 그리스 독립 전쟁의 테살로니카 전역에 참전하는 엠마누일 파파스가 1천 쿠로쉬를 후원하며 학교가 이어진다. 1815-19년에는 고서 수집가 미나스 미노이데스가 철학과 문법을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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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탄 (실내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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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세워진 세레스 역

시로즈는 그리스 독립 전쟁의 화마에 휩쓸리지 않았고, 그리스어 학교도 아르기로스 파파리주의 감독 하에 정상 운영되었다. 1820년에는 미래의 대재상 할릴 리파트 파샤가 태어났다. 1849년 시로즈에는 대화재가 나서 31개의 성당 중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 무렵 도시는 살로니카 산작에서 분리되어 자체적인 시로즈 산작의 치소가 되었고, 1860년대 들어 시로즈 산작은 살로니카 빌라예트에 속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시로즈의 인구는 8만 3천 5백에 달했고,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테살로니카 및 모나스티르 (비톨라)와 함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다. 주민들은 3만 1천의 무슬림, 비슷한 수의 그리스인, 2만의 불가리아인, 1천의 유대인, 7백의 외국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말엽 들어 철도와 해상 운송의 발달로 육상 교통이 중심이던 시로즈의 중요성은 점차 하락했고, 지역 축제로써 매년 열리던 농산물 도매 시장도 인기가 줄었다. 1886년 그리스 왕국은 주민이 2만 8천명이고 성당 26개, 모스크 22개, 그리스 학교 2개, 튀르크 학교 6개, 칸 24개, 베데스탄 1개가 있다고 파악했다. 쇠퇴했던 시로즈는 1896년 살로니카 및 코스탄티니예와 철도로 연결되며 어느정도 중요성을 회복했다. 또한 주력 농산물은 목화에서 담배로 바뀌었다. 20세기 들어 불가리아계 주민들이 마케도니아 혁명단의 지부인 세레스 혁명지부 (Серски революционен окръг)를 구성해 1903년의 일린덴-프레오브라제니에 봉기에 참가하는 등 분란이 일기도 했다. 1905년 시로즈의 인구는 4만 2천명이었고, 발칸 전쟁 중인 1912년 11월에 불가리아 공국이 도시를 점령해 세르라 불렀다.

2.4.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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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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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년에 세워져 20세기 불가리아 군에 의해 약탈 및 수도승 학살을 겪어 버려졌다가, 1980년대에 재건된 세례 요한 수도원

불가리아 지배는 8개월 만인 1913년 7월, 2차 발칸 전쟁 개전 후 그리스 왕국군이 도시를 점령하며 종식되었다. 다만 불가리아 군은 철수하며 구도심에 방화했고, 동로마 시기 유적들과 여러 오스만 시기 건물들이 훼손되었다. 이어진 그리스 지배 하에서 지명은 세레스로 환원되었고, 민족 분쟁이 이어지던 와중에 1차 대전에 휘말렸다. 1915년 말엽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남하한 독일 제국군이 세레스로 접근하자 중립을 표방하던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그리스 군의 철수를 지시했고, 이로써 도시는 독일 군정 하에 있다가 1917년에 그리스-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1920년대에는 튀르크계 및 불가리아계 주민들이 추방되었다.

2차 대전 시기인 1941년 4월, 나치 독일군이 세레스를 점령한 후 불가리아에게 할양했다. 1943년에는 현지 유대인들이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되었고, 좌익 계열의 민족해방전선 (EAM)의 저항 활동이 있던 도시는 1944년에야 연합군에게 수복되었다. 전후 세레스는 재건과 함께 발전했고, 현지 출신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두 차례, 15년간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다만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인근 농민들은 미국, 서독 등으로 대거 이민을 떠났다. 4만 선을 유지하던 인구는 1990년대 들어 5만을 넘겼다. 한편 20세기 전반에 불가리아 군인들이 약탈한 세례 요한 수도원의 보물이 소피아에서 발견되었으나 불가리아 정부는 반환하지 않고 있다.

3.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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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로스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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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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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콜라스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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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를리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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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베이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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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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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르요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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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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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코스모스 & 다미아노스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