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17:29:12

로스알토스 구성국

로스알토스에서 넘어옴
로스알토스국
Estado de Los Altos
파일:Flag_of_the_State_of_Los_Altos.svg.png 파일:Coat_of_arms_of_the_State_of_Los_Altos.svg.png
국기 문장
파일:LokatieLosAltos.png
1838년 ~ 1840년
병합 이전 병합 이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과테말라
위치 중앙아메리카
수도 케찰테낭고
정치체제 공화제, 연방제
국가원수 대통령
언어 스페인어
종교 가톨릭
통화 중앙아메리카 레알

스페인어: Estado de Los Altos
영어: Los Altos (state) (또는 State of Los Altos)
1. 개요2. 역사3. 재건 시도

1. 개요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연방 구성국으로서 1838년 2월 2일부터 1840년 1월 28일까지 존속했던 나라이다.

스페인 제국령 과테말라 부왕령 시기부터 멕시코국과 과테말라에게 분활되어 합병당하기 전까지 분리주의 세가 대단히 강했던 지역으로서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이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틈[1]을 타서 '과테말라 주'로부터 독립하여 탄생했다. 문제는 과테말라가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소속이었을 당시에는 그래도 같은 나라이므로 분리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는데, 1839년 12월 3일"과테말라가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해버렸다!" 독립국인 과테말라에게 로스알토스는 실지()일 뿐이었고, 과테말라는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영토였던 로스알토스로 진격해 병합함으로서 역사를 끝내버렸다.[2]

2. 역사

해당지역은 분열되어 있던 중부 아메리카 지역의 여러 마야족 소국들에 의한 아귀타툼이 벌어지던 곳이었다. 13세기에는 마야족의 일파인 키셰인들이 키셰 왕국을 세웠고, 유럽인들의 마수가 아메리카 대륙에 뻗을 당시에는 키셰 왕국의 영역이었다.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인 알바라도가 주변 원주민들을 포섭해서 키셰 왕국을 침략했고, 알바라도가 이끄는 연합군은 해당 지역을 철저하게 약탈한 다음에 정복했다. 그리고 키셰 왕국을 정복한 자리에 '과테말라 부왕령'을 세웠다.

문제는 1524년부터 1526년 사이에 진행된 '키셰 정복전쟁' 당시 키셰 왕국의 중심부이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지역이었던 로스알토스 지역은 철저하게 짓이겨진 탓에 크리올들의 세가 강해졌는데, 스페인에게 천주교의 세례를 받고 보수화되어가는 지역 원주민들과 반대로 기득권들인 크리올들은 점점 자유주의 성향을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크리올 자유주의자들은 상업적인 독점권을 가지는 군주국 스페인이 자신들의 성장에 방해된다고 생각해서 스페인의 영향력이 짙은 과테말라시티와 별개의 권역으로 분리해주기를 계속 요구하면서도 공화주의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이며 스페인 정부당국과 계속 마찰을 빚었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져 스페인 본토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한 틈을 타서 아구스틴 1세가 스페인으로부터 누에바에스파냐의 통치권을 강탈 뒤에 독립을 선포하고 멕시코 제국을 선포했다. 누에바에스파냐 지역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강했던 남부는 독립은 인정했지만 제정으로 독립하는 것에 반발하여 1821년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연방 공화국 내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공화정이 세워지는 것에 반발했고 멕시코 제국군과 내통하여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멕시코에 합병시켰다. 그러다가 1823년에 아구스틴 1세가 추방당하고 멕시코가 혁명으로 공화정이 되어버리자, 공화국의 혁명정부는 매우 기꺼이 중앙아메리카를 해방시켜 주었고, 자유주의세가 강했던 로스알토스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과테말라 주 소속으로 멕시코로부터 분리되었다.

문제는 누에바에스파냐 시절부터 과테말라시티에 집중된 이권문제로 분리를 원했었는데, 그 이권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로스알토스는 계속해서 분리주의 추구했다. 비록 이념문제와 지역주의로 중구난방이었지만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이라는 나라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불리 추진은 과테말라시티의 방해 속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1836년 5월에는 지역 언론에 의하여 케찰테낭고 , 토토니카판(Totonicapán)[3], 솔롤라(Sololá)[4]및 수치페케스(Suchitepéquez)[5] 지역을 포함하는 주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 지역에는 약 2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고 중앙아메리카에서 더 큰 자유와 더 나은 권한을 위해 서로 연합했다.

갈베스 정부가 무너지자 로스알토스의 크리올 대표들은 1838년 2월 2일 과테말라 주에서 전면적으로 분리될 철호의 기회를 포착했다. 크리올들은 과테말라 정부를 무시하고 산살바도르로 이전한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국회와 협작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과테말라 주 수반인 '발렌수엘라 주지사'가 연방 정부의 분리 허가에 손을 못 쓰는 동안 1838년 6월 5일에 마르셀로 몰리나 마타(Marcelo Molina Mata), 호세 M. 갈베즈(José M. Gálvez), 호세 안토니오 아길라르(José Antonio Aguilar)로 구성된 임시 정부 위원회와 아우구스틴 구스만[6] 장군은 독립을 선포하고 말았다.

하지만 독립 후의 국정 정책은 나라를 고의로 망하게 하려는 수준으로 엉망이었다. 인구의 대다수가 원주민인데도 원주민들의 지도자인 쥴(Atanasio Tzul)을 배신하고 백인 이민자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원주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등의 막장 운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주의가 기본인 시대였던 탓에 크리올들의 이러한 행각에도 나라는 한동안 유지된다. 무엇보다 아직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이 건재했던 덕에 산살바도르 정부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태평양 연안 항구 개발을 하면서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연방 정부의 묵인 아래서 로스알토스 정부는 원주민들을 탄압한 업보를 계속 쌓아갔다. 계속된 박해에 서부 원주민들이 과테말라시티까지 넘어가서 로스알토스의 라디노[7] 지도자와 주지사 그리고 군사령관 등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원주민들에게만 부과되던 엄청난 세금과 땅 압류에 저항하기 위하여 넘어간 것이었다. 1839년 10월에는 원주민에 대한 학살도 저지르는 등 원주민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원주민들은 불만만 표해도 투옥당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이러한 짓은 결국 업보로 돌아온다. 1839년 12월 3일에 과테말라 주 정부가 연방 공화국 정부와의 불화를 못 참고 결국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과테말라는 원주민들이 만들어준 빌미로 자신들의 실지()를 되찾으려고 진격했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들의 외면 속에서 1840년 1월 28일에 군대가 괴멸당하며 멸망당한다.

3. 재건 시도

1840년에 코테말라에게 정복당했지만 과테말라는 같은 백인들인 로스알토스의 크리올을 학살하지 않았다. 즉 독립의 원인이었던 자유주의자 크리올 기득권들이 증발한 것은 아니었다. 1848년에 과테말라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과테말라에도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의 알력다툼이 심했고 1847년에 새로 구성된 정부는 자유주의자들의 조언을 따라서 로스알토스 수복의 영웅인 카레라를 추방한 뒤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1848년 8월 26일에 옛 로스알토스의 정부 구성원들은 과테말라를 약화시키고자 하는 엘살바도르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아구스틴 구스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과테말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다. 곧 9월 5일에는 페르난도 안토니오 마르티네스가 이끄는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이 정부는 1849년 5월 8일까지 지속되었는데, 카레라가 여러 지역 원주민 세력들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받고 다시 로스알토스 수복에 나서면서 임시 정부가 유지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과테말라의 대통령은 카레라 장군에 대한 다양한 원주민 집단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알게 되자 진보주의자의 조언을 철회하여 카레라에 대한 사형선고를 취소하고 보수주의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카레라에게 사령관직을 다시 제수하고 임기를 무기한으로 늘려주었다. 카라레는 원주민들의 군사적인 지원과 대통령의 정치적 지원에 힘입어서 자신을 탄압하던 자유주의 세력을 공격했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도망쳤고 로스알토스는 수복되었다. 1849년 8월에는 카레라는 과테말라시티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했다.

로스알토스가 실질적으로 군대와 정부를 재건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분리에 실패한 원인은 원주민들이 과테말라 정부와 카레라 장군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외부 지원과 핵심 지배층의 지지에도 재분리에 실패한 원인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의 적대감 때문이며, 로스알토스 구성국(주) 시절에 원주민에게 쌓은 업보가 멸망 뿐만 아니라 재건시도까지 망치게 된 셈이다.
[1] 당시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수도가 과테말라의 수도인 과테말라 시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테말라가 가장 연방에 비우호적인 주였고 과테말라와 다른 주간의 분쟁 끝에 1834년에 수도가 엘살바도르의 수도인 산살바도르로 옮겨 갔다. 즉 연방의 주도권이 딴 주로 넘어간 틈을 타서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2] 단 로스알토스는 탄생 전부터 자유주의 세가 강한 크리올들과 보수주의 세가 강한 원주민 간의 알력이 대단히 강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게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들은 독립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자유주의 성향의 백인 개척자들인 크리올들이 독립에 열성적이었다. 그래서 이미 로스알토스가 분리되던 당시인 1838년부터 카톨릭 교회 문제로 원주민과 크리올 간의 분열이 심각했고, 1839년 10월부터는 이미 내전 상태였다. 로스알토스를 합병한 과테말라의 장군인 카레라는 최후통첩을 비준할 준비를 하다가 로스알토스의 인구 대부분을 구성하는 원주민의 청원을 받고 침공한 것이다. 그리고 로스알토스의 국민(원주민)들은 침략자인 카레라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이는 로스알토스 정부가 침략받기 전인 1839년 10월에 원주민들을 학살했기 때문이었다.[3] 과테말라 서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토토니카판이며 면적은 1,061km2, 인구는 339,254명(2002년 기준)이다.지명의 뜻은 뜨거운 물의 위라는 뜻이다.[4] 과테말라 남서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솔롤라이며 면적은 1,061km2, 인구는 307,661명(2003년 기준)이다.관광지로는 근처에 있는 아틀란 호수가 유명하다.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서 깊이가 340m에 달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호수를 방문한다.[5] 과테말라 남서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마사테낭고이며 면적은 2,510km2, 인구는 403,945명(2003년 기준)이다. 이름의 뜻은 나와틀어로 꽃의 언덕 위라는 뜻이다[6] 전직 멕시코 제국군 장교였으며 당시에는 케찰테낭고에 정착해 있었다.[7] 라틴아메리카 주로 중앙아메리카에 분포한 메스티소 또는 스페인화된 원주민들을 일컫는다. 당시 메스티소 중산층을 일컬을 때도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