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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오삼준(吳三俊) |
| 자 | 응천(應天) |
| 호 | 강재(剛齋) |
| 본관 | 함양 오씨[1] |
| 출생 | 1863년 음력 11월 12일 |
| 전라도 무장군 탁곡면 남산리 (現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 남산마을) | |
| 사망 | 1909년 음력 6월 10일 (향년 45세) |
| 전라북도 무장군 탁곡면 남산리 | |
| 묘소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오장환은 1863년 11월 12일 전라도 무장군 탁곡면 남산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 남산마을)에서 아버지 오병태(吳秉台)와 어머니 부안 김씨(扶安 金氏) 김성증(金聲曾)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21촌 지간[2]의 족숙(族叔) 오병길(吳秉吉)[3]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자행되자 기삼연·전해산 등과 전라도 장성·고창·영광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당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서 오장환은 도통(都統)의 책무를 맡아 1907년 10월부터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1909년 6월까지 고창·장성·영광·부안 등지에서 의병을 지휘했고 10회 이상 일본군과 교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 1909년 6월 10일 잠시 귀가하여 제반 일을 정돈하던중 기밀이 유출되어 야밤을 틈타 일본 경찰에게 집이 포위되었고 귀순하라는 기만적인 회유를 받았으나 "일이 다 이루어지지 못하면 몸이 반드시 망함은 사리와 형세가 본래 그러한 것이리라. 내 몸을 비록 죽인다고 해도 나의 뜻은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라고 말하며 거부했다. 이후 경찰의 목을 조르는등 격투 끝에 현장에서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