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5-31 22:44:16

귀무덤

코무덤에서 넘어옴
耳塚(미미즈카)

1. 개요2. 상세3. 관련 항목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mizuka-M1773.jpg
사진 설명 -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귀 무덤의 오륜탑. 측면에 세겨진 것은 실담(悉曇, Siddham. 범어(梵語)의 자모(字母)를 뜻한다.) 문자로, 각 글자마다 아래에서부터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교토의 귀 무덤에 대해 주로 소개하지만 사실은 일본 전국에 많은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하술한다.

2. 상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echong2.jpg

이름 그대로는 를 묻은 무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1], 임진왜란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군이 죽인 조선인들의 수급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당연스럽게도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耳塚)"으로 바뀌었다. [2] 또 일설로는 코무덤이라고 하면 무덤에 있는 코의 개수가 죽인 사람의 갯수와 일치하기 때문에 귀무덤이라고 하면 죽인 사람수를 1/2로 줄일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근데 알아보면 코인지 귀인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설도 신뢰성이 없다.

그 유래는 정유재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피가 큰 수급 대신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보내도록 하여 각자 벤 수에 따라 포상을 내리도록 지시한 것으로 막상 모아놓고 나니 처치가 곤란한 데다가 일을 지시한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다고 조선에 돌려줄 수도 없게 되자 그냥 한 곳에 파묻은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의 민간인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태도와는 사뭇 대조되는 것으로 당시 히데요시가 심각하게 미쳐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히데요시의 미친 짓에 적극 찬동했던 사이쇼 조타이는 훗날 무덤을 만들어 주고 비석을 세워준게 히데요시의 자비심을 보여준다는 말을 했다(...). 몇몇 일본군들은 민간인의 경우 코만 베고 살려준 경우도 많았다고 하며 그래서 종전 후 호남을 중심으로 코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정유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할때에 평수길이 모든 왜군에게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베어서 수급 대신 바치게 하였으므로 왜졸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이고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서 수길에게 보내었다. 수길은 이를 점고하여 본 뒤에 그 나라 북망인 대불사 옆에 모두 매장하여 한 구릉을 만들고 제 나라 사람에게 위엄을 보였다고 하니, 사람을 참혹하게 죽인 것은 이것으로도 가히 알 수 있다. 이때문에 그때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코 없이 사는 자들이 많았다.
이수광, <<지봉유설>>

당시 시대상을 볼때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사살한 적 군인의 귀나 코를 베는 일은 흔했지만[3] 이것을 살아 있는 민간인에게 행한 것은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에비'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비’, ‘에비야’, ‘이비야’, ‘어비야’ 등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에비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존재를 뜻하는데 “계속 울면 에비 온단다”, “에비, 이런 거 만지면 안 된다.” 등의 경우로 쓰인다. 에비는 ‘이비야(耳鼻爺)’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귀(耳), 코(鼻), 사람(爺)이 합쳐진 말로 귀나 코를 베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유재란 때 종군한 승려 게이넨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도 나오는 내용이며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 순사를 에비라 불렀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18년 7월 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이후 일부는 1990년, 1992년 경상남도 사천시전라북도 부안군으로 이장됐으나, 오늘날에도 완전한 이장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이 코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000명 분의 코가 묻혀 있다. 일본에서도 별도의 관리 예산이 지원되지 않았고 한국에서도 별도의 예산 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서 3대째 개인이 관리하고 있다가 언젠가부터 교토시에서 관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필 임진왜란의 원흉 히데요시를 받드는 토요쿠니 신사(豊國神社) 건너편 공원[4]에 있어서 묘한 기분이 든다. 바로 옆 호코지(方広寺)[5]의 대불전터(大仏殿跡) 및 석축과 함께 쇼와 44년(196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설명판은 헤이세이 15년(2003년) 세워졌다.

징비록 48화에서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실제로 정유재란이 임진왜란보다 더 잔혹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바로 이런 코 베기 때문이다.

교토에 있는 귀 무덤이 유명하고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일본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1992년 오카야마현 비젠시 가카토 구마카와산 기슭에서 귀무덤, 1995년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귀 무덤이 발견되었다. 2014년 쓰시마시 가미쓰시마 히코텐성 남쪽에서 적석묘로 된 귀 무덤이 발견되었다. 쓰시마 지역의 역사 문헌인 '카미쓰시마지'에서 일본군이 잘라온 조선인의 귀를 공양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현장 조사를 벌여 찾아냈다. 교토나 다른 곳에 있는 귀 무덤과 형태가 다르고 다른 무덤과는 달리 표지석 등은 없었지만 현지인들의 진술과 사료가 일치한다고 한다. 2016년 초에는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가스이엔 옆 언덕 숲 속에서도 귀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돌로 만든 높이 1.2m 정도의 사당 양쪽 기둥에 '괵총(馘塚)'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괵총의 괵(馘)은 '귀를 베다'는 뜻으로 곧 귀 무덤을 뜻한다. 이들 귀 무덤들이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과 연관되어 있는 걸 보면 정유재란 때 베어온 코나 귀가 일본 여기저기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들어 모두 환수해 오자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지만, 당장 교토 귀 무덤도 완전히 환수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국내에 일부나마 환수된 귀 무덤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찾아가려면 교토국립박물관 북쪽에 있는 도요쿠니 신사, 호코지 건너편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3. 관련 항목



[1] 야사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리품으로 날아온 귀를 보고는 "사람에게 는 하나 뿐이지만 는 둘이니 하나를 죽이고도 둘의 수급으로 늘릴 수 있다"며 코를 베라 했다고 한다.[2] 묻힌 대상과는 다른 '귀무덤'이라는 표현으로 돌려 말해 불길함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한다.[3] 조선도 비슷하게 왜군의 머리를 베어 전과를 확인했다.[4] 공원 이름도 미미즈카 공원이다.[5]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치기 위해 생트집을 잡았던 문구가 새겨진 범종으로 유명한 절이며, 이 범종은 중요문화재 공예품 제223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