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21:11:02

귀무덤

(미미즈카)

1. 개요2. 상세3.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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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귀 무덤의 오륜탑.

측면에 세겨진 것은 실담(悉曇, Siddham. 범어(梵語)의 자모(字母)를 뜻한다.) 문자로, 각 글자마다 아래에서부터 지(地, अ(a)), 수(水, व(va)), 화(火, र(ra)), 풍(風, ह(ha)), 공(空, ख(kha))을 상징[1]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교토의 귀 무덤에 대해 주로 소개하지만, 사실은 일본 전국에 많이 분포해 있다. 자세한 것은 하술.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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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그대로는 를 묻은 무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2], 임진왜란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군이 죽인 조선인들의 수급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당연스럽게도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耳塚)"으로 바뀌었다.[3] 다른 일설로는 코무덤이라고 하면 무덤에 있는 코의 개수가 죽인 사람의 갯수와 일치하기 때문에 귀무덤이라고 하면 죽인 사람수를 1/2로 줄일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근데 알아보면 코인지 귀인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설도 신뢰성이 없다.

그 유래는 정유재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피가 큰 수급 대신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보내도록 하여 각자 벤 수에 따라 포상을 내리도록 지시한 것으로 막상 모아놓고 나니 처치가 곤란한 데다가 일을 지시한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다고 조선에 돌려줄 수도 없게 되자 그냥 한 곳에 파묻은 것이다. 이러한 기행은 당시 히데요시가 심각하게 미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4]

히데요시의 미친 짓에 적극 찬동했던 사이쇼 조타이는 훗날 무덤을 만들어 주고 비석을 세워준게 히데요시의 자비심을 보여준다는 말을 했다(...). 몇몇 일본군들은 민간인의 경우 코만 베고 살려준 경우도 많았다고 하며, 그래서 종전 후 전라도를 중심으로 코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정유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할때에 평수길이 모든 왜군에게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베어서 수급 대신 바치게 하였으므로 왜졸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이고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서 수길에게 보내었다. 수길은 이를 점고하여 본 뒤에 그 나라 북망인 대불사 옆에 모두 매장하여 한 구릉을 만들고 제 나라 사람에게 위엄을 보였다고 하니, 사람을 참혹하게 죽인 것은 이것으로도 가히 알 수 있다. 이때문에 그때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코 없이 사는 자들이 많았다.
이수광, <<지봉유설>>
당시 시대상을 볼때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사살한 적 군인의 귀나 코를 베는 일은 흔했지만[5] 이것을 살아 있는 민간인에게 행한 것은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에비'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비’, ‘에비야’, ‘이비야’, ‘어비야’ 등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에비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존재를 뜻하는데 “계속 울면 에비 온단다”, “에비, 이런 거 만지면 안 된다.” 등의 경우로 쓰인다. 에비는 ‘이비야(耳鼻爺)’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귀(耳), 코(鼻), 사람(爺)이 합쳐진 말로 귀나 코를 베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유재란 때 종군한 승려 케이넨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도 나오는 내용이며 일제강점기에도 일본 순사를 에비라 불렀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18년 7월 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교토국립박물관 북쪽에 있는 도요쿠니 신사, 호코지 건너편으로 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이후 일부는 1990년, 1992년 경상남도 사천시전라북도 부안군으로 이장됐으나, 오늘날에도 완전한 이장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이 코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000명 분의 코가 묻혀 있다. 일본에서도 별도의 관리 예산이나 정부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고 한국에서도 별도의 예산 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서 3대째 개인이 관리했다. 나중에서야 교토시에서 관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필 임진왜란의 원흉 히데요시를 받드는 토요쿠니 신사(豊國神社) 건너편 공원[6]에 있어서 묘한 기분이 든다. 바로 옆 호코지(方広寺)[7]의 대불전터(大仏殿跡) 및 석축과 함께 쇼와 44년(196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설명판은 헤이세이 15년(2003년) 세워졌다.

징비록 48화에서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실제로 정유재란이 임진왜란보다 더 잔혹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바로 이런 코베기 때문이다.

교토에 있는 귀무덤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다. 1992년 오카야마현 비젠시 가카토 구마카와산 기슭에서 귀무덤, 1995년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귀무덤이 발견되었다.

2014년, 쓰시마시 가미쓰시마 히코텐성 남쪽에서 적석묘로 된 귀무덤이 발견되었다. 쓰시마 지역의 역사 문헌인 '카미쓰시마지'에서 일본군이 잘라온 조선인의 귀를 공양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현장 조사를 벌여 찾아냈다. 교토나 다른 곳에 있는 귀무덤과 형태가 다르고 다른 무덤과는 달리 표지석 등은 없었지만 현지인들의 진술과 사료가 일치한다고 한다.

2016년 초,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가스이엔 옆 언덕 숲 속에서도 귀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돌로 만든 높이 1.2m 정도의 사당 양쪽 기둥에 '괵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괵총의 괵(馘)은 '귀를 베다'는 뜻으로 곧 귀무덤을 뜻한다. 이들 귀무덤들이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과 연관되어 있는 걸 보면 정유재란 때 베어온 코나 귀가 일본 여러 곳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2023년,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 에이코쿠지에서 1,800명의 귀와 코를 묻은 귀무덤이 발견되었다.귀무덤 위치KBS 기사

일본 전국에 있는 귀무덤을 모두 환수하자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지만, 당장 교토 귀무덤도 완전히 환수되지 않고 있는 데다가, 국내에 일부나마 환수된 귀무덤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3. 관련 문서



[1] 비로자나불의 오자진언(五字眞言)인 '옹 아 비 라 훙 캉 스와하'(ॐ अ वि र हूं खं स्वाहा(oṃ a vi ra hūṃ khaṃ svāhā))에서 '아 비 라 훙 캉'의 모음을 뺀 기본글자에 해당한다.[2] 야사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리품으로 날아온 귀를 보고는 "사람에게 는 하나 뿐이지만, 는 둘이니 하나를 죽이고도 둘의 수급으로 늘릴 수 있다"며 코를 베라 했다고 한다. 물론 야사인 만큼, 실제로 이랬는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때의 그 부하들만 알 것이다.[3] 묻힌 대상과는 다른 '귀무덤'이라는 표현으로 돌려 말해 불길함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한다.[4] 사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전에도 패역하고 잔혹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아들 츠루마츠의 출신에 토를 다는 (츠루마츠가 외간 남자의 씨를 받아 태어난 아이라는) 벽서가 성문 앞에 붙자, 감시가 소홀했다는 이유로 벽서가 붙은 날 성을 지키던 문지기 15명의 코를 베는 잔인한 형벌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범인을 찾겠다고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몰살하는 숙청을 벌였다. 어쩐지 귀나 코 베는 것을 밥 먹듯 하던 이유가 있더라니[5] 조선도 비슷하게 왜군의 머리를 베어 전과를 확인했다.[6] 공원 이름도 미미즈카 공원이다.[7]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치기 위해 생트집을 잡았던 문구가 새겨진 범종으로 유명한 절이며, 이 범종은 중요문화재 공예품 제2239호로 지정되어 있다.